초대일시 / 2017_0426_수요일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6(관훈동 119번지) Tel. +82.(0)2.734.1333 www.ganaartspace.com
이 작업은 무엇을 기록하든 '기록은 의미를 만든다'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피사체의 이미지들이 누적되면서 사진은 그 밀도를 통해 스스로 의미를 드러낸다. 장바구니를 가득 채워오던 식료품의 포장재를 분리수거를 위해 모으다가 문득, 내용물의 부피만큼 차지하는 이 폐기된 포장재도 모이면 어떤 의미를 드러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니까 이 작업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것이다. 폐기물이 된 포장재를 모으고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처음 몇 달 동안은 이 사진일기가 어떤 구체적 의미를 만들어낼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1년의 기한을 정하고 출발한 이 작업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애초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2015년 9월에 시작한 작업은 의도치 않게 평범하지 않은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 기간 큰아이는 대입수능시험을 봤고, 아버지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자퇴를 고민하던 둘째아이 때문에 이사한 곳에서의 생활은 모든 게 낯설었다. 게다가 다시 시작된 직장생활로 삶이 매우 분주해졌던 것이다. 생활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음식에서부터 나타났다. 아이들은 엄마가 없는 집에서 조리하기 쉬운 라면이나 배달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해지고 회사 일이 바빠질수록 집안에는 더 많은 가공음식의 비닐봉지가 쌓여갔다. 그것들을 모아 작업하는 동안, 가정주부로서 '라면의 이미지'를 숨기고 싶은 나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숨겨졌지만 숨길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라면봉지가 쌓인 어느 달, 아이들에게 밥 한 끼 제대로 챙겨먹이지 못하고 있는 내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계획한 1년의 시간이 지나자 명징하게 나타난 것은 라면봉지로 드러난 삶의 고단함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도시빈민의 삶과, 경제적으로야 별 부족함 없는 나의 삶을 함께 관통하는 것은, 허기와 고단한 시간을 버텨준 라면의 존재였다.
시간의 기록은 그렇게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현실들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이 작업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그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이 그렇게 많은 라면과 배달음식을 먹으며 지낸 사실은 기억에서 희미해졌을지도 모른다. 대량으로 모인 라면봉지는 나의 1년의 자취였다. 나는 그것을 모아 화가가 물감을 덧칠해 그림을 완성하듯이, 시간과 일상의 흔적을 중첩해 이미지를 완성했다. 숨길 수 없었던 나의 시간의 흔적이 모여 붉고 노랗고 검은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숨기고 싶고 당혹스럽기만 했던 나의 시간의 껍데기, 라면봉지를 꽃처럼 피워올리며 이제야 후련함을 느낀다. 너무나 익숙한 그리고 늘 그리운 Home, Sweet Home... ■ 이진경
Vol.20170426c | 이진경展 / LEEJINKYOUNG / 李珍炅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