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기도 304

조소희展 / CHOSOHEE / 趙素熙 / photography   2017_0413 ▶ 2017_0512 / 일,공휴일 휴관

조소희_봉선화기도 304-할머니손_사진_178.5×147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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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413_목요일_05:00pm

기획 / 아트엔젤컴퍼니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산지 Gallery Sanji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333길 20(서초동 1429-2번지) 산지빌딩 Tel. +82.(0)2.2055.3306

『봉선화기도 304』는 세월호 3주기를 맞이하며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우리사회의 비극인 세월호 참사에 대한 공동의 분노와 애도를 담은 예술적 결과물이다. 2016년 봄, 경기도미술관의 세월호 2주기 추념전 『4월의 동행』전에 출품할 작품 제작을 위해, 조소희는 작업의 취지에 공감하는 304명의 지원자를 모집하여 프로젝트 『봉선화기도 304』를 진행하였다. 34개월 어린아이로부터 97세의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시민들은 양손 중지에 기다림과 아픔을 은유하는 봉선화 꽃물을 들이고 기도하는 손 사진의 모델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304인의 손 중에서 약 20여 점을 선별하여 새로운 형식의 사진작품으로 선보인다. 작가는 다양한 손이 가진 각각의 표정을 섬세히 포착함과 동시에 이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수렴하는 방식을 통해 '개인'이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라는 공통체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참사를 통해 드러난 우리 삶의 거대한 부조리와 아픔에 대한 '연대'라는 의미로 확장되고, 공동의 염원을 제안한다. 전시와 더불어 기록과 공유를 위한 출판물인 단행본 『봉선화기도 304』(컬처북스)도 함께 출간 되었다. ■

조소희_봉선화기도 304-남자손_사진_124×51cm_2016

봉선화 손 304. 손을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보기는 처음이다. 누구의 손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저마다 살아온 삶의 이야기가 담긴 손이다. 아직은 작고 부드러운 손이 있는가 하면 주름이 깊이 파인 손이 있다. 마디가 굵은 손이 있는가 하면 가늘고 곱기만 한 손도 있다. 이런저런 상처가 새겨진 손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흔적이 없는 손도 있다. 위로 펼쳐 곱게 서로 마주보는 손이 있는가 하면 서로를 감싸 쥔 손이 있고 깍지 끼어 떨어질 수 없게 꼭 쥔 손도 있다. 하지만 어느 손이나 모두 기도하는 손이다. 하늘을 향해 비는 손이다. 붉고 시리고 뜨거운 마음,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말없이 부르짖는 손이다. ● 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요긴한 수단이다. 우리는 손으로 몸을 씻고, 손으로 가려운 데를 긁고, 손으로 옷을 입고, 손으로 밥을 먹는다. 손으로 농사를 짓고, 손으로 물건을 만들고, 손으로 음식을 만든다. 손으로 사물을 가리키고, 손으로 지시하고, 손으로 우리는 말한다. 손으로 만지고, 손으로 쓰다듬고, 손으로 애무한다. 손으로 얼싸안고 손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고, 손으로 악수한다. 손으로 사람을 찌르고,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손으로 남의 것을 훔친다. 우리의 손은 감정과 지성, 의지를 실현하고 표현하는 수단이며, 타인과 소통하는 통로이다.

조소희_봉선화기도 304_사진_각 56×46cm_2016

그런데 손은 단순히 몸의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손은 마음을 표현하는 통로이다. 이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이 손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손을 도구로 사용할 때, 예컨대 밥을 먹는다든지, 괭이를 들고 흙을 판다든지, 가방을 들고 걸어간다든지 할 때 손은 아래로 향한다. 글을 쓰거나 무를 자르거나 할 때도 손은 아래로 향한다. 그러나 기도할 때 손은 위로 향한다. 위로 향하는 손은 간절히 비는 마음을 드러낸다. 우리의 삶이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우리보다 큰 분이,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비를 지니신 분이, 한량없이 큰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시는 분이, 그분이 도와주시고, 그분이 섭리해 주시기를 비는 마음이 위로 향해 모은 두 손에 담겨 있다. ● 라틴어 표현에 " 우비 아무르, 이비 오쿨루스, Ubi amor, ibi oculus" 라는 표현이 있다. " 사랑이 있는 곳에 눈이 있다." 사랑은 눈을 뜨게 만든다는 말이다. 이때 눈은 고통을 볼 수 있는 눈이다. 따라서 이 말은 " 사랑이 있는 곳에 고통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라고 풀어 다시 옮길 수 있다. 이 세상을 냉정한 눈으로, 계산하는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에는 고통도, 슬픔도, 우리가 공감하고 아파해야 할 일도 없다. 그러나 사랑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 구석구석, 여기저기 고통이 없는 곳이 없다.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아 비는 손은 눈먼 손이 아니라 눈을 크게 뜨고 고통을 보고 고통을 부여안고 비는 손이다.

조소희_봉선화기도 304_사진_각 56×46cm_2016

고통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얘기한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고통으로 인해 웅크리게 된다. 말을 잃은 채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고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진다. 알프스 등산을 갔던 아들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아들의 친구가 전화를 통해 알려 주자, 철학자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이렇게 반응한다. " 약 3초 동안, 나는 체념에서 오는 평안을 느꼈다. 축 늘어진 아들을 두 팔로 안아서 누군가, 그 누군가에게 바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다음에는 차가우면서도 불타는 듯한 강렬한 아픔이 밀려왔다." 월터스토프는 글로 자신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이 그가 겪은 일종의 두 번째 단계였다. 말을 함으로, 글로 씀으로 그는 고통을 되새기고 잃어버린 아들을 생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월터스토프는 이렇게 쓰고 있다. "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고통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이전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고통을 겪어 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고 고통 받는 타인과 연대하게 된다. ● 이를 배경으로 우리는 프랑스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 고통은 윤리적 전망을 열어 준다" 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윤리는 단순히 규칙을 준수하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타인과의 관계, 내가 아닌, 나와는 다른 타자를 향해 나를 열어 주고 타자를 환대하는 것을 두고 레비나스는 '윤리'라 부른다. 고통 받는 이에 귀 기울이고 그의 호소를 들어 주고 그의 얼굴을 직면하는 곳에 윤리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를 만난다. 이러한 타자는 공무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 공무원이 볼 수 없는 눈물이 있다" 고 말한다. 관료화한 사회 속에서는 여기서 말하는 윤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조소희_봉선화기도 304_사진_각 56×46cm_2016

다시 손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본 손은 기도하는 손이다. 간절한 소원을 담고 있는 손이다. 손마다 가운데 손가락은 봉선화 꽃물로 붉게 물들어 있다. 마치 심장 한가운데서 솟아난 핏물과 같다. 진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진한 사랑이 없이는 이런 핏물을 쏟아낼 수 없다. 붉게 물든 손가락은 관료적이고, 계산적이며, 무정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을 공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바꾸자는 외침으로 들린다. 두 손 모아 비는 손들이 서로 떨어져 있지만 진하게 드러난 붉은 마음으로 인해 이제는 부패 없는 세상, 안전한 세상, 부름에 응답하고 책임지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손에 손을 잡고 서로 다짐하는 듯하다. 아름다운 세상, 눈물을 서로 닦아 주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있다. ■ 강영안

조소희_봉선화기도 304_도서출판 컬처북스_2017
조소희_봉선화기도 304_도서출판 컬처북스_2017

고통이 하나의 몸이라면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감각의 기관들은 매우 복잡하고 섬세하다. 세월호의 아픔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기관들이 공통의 심장박동에 따라 격렬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진다. 코끝에 차오르는 죽음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영원보다 더 길었을 아이들의 시간, 그 어두움과 공포를 생생하게 상상해야만 하는 엄마의 무력감은 그 심장과 가장 가까운 명치와 목 울대 그 어디쯤 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의 육체를 유린하는 4월의 바다속보다 더 차가운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는 어디쯤의 고통인가. 손을 모으자. 슬픔과 애도와 분노를 손가락에 물들이고, 고통의 몸 안에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 가까이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자. ■ 조소희

Vol.20170413b | 조소희展 / CHOSOHEE / 趙素熙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