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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401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01:00pm~08:00pm
예술 연구소 반 artlabban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114 4층 Tel. +82.(0)10.3406.7199 www.facebook.com/artlabban
몇 해 전부터 동굴벽화에 매료되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만 같은 동물의 생생한 묘사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추상적인 패턴은 현대미술을 보는 것 같았고 독특한 시각으로 사람을 관찰하여 표현한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혼이 빨려 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 옛날 사람들은 왜 동굴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그 사람들에게 자연이란 어떤 대상이었을까를 혼자 상상해보는 일이 나에게는 두근거림과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 ● 내가 동굴벽화에 빠져 있을 때는 미술이라는 것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들을 품고 있을 때였다. 미술이 점점 개념화되고 비 물질화 되면서 내가 처음 미술을 시작했을 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태로 나에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왜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나에게 미술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현대판 동굴벽화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정신분석 워크숍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산과 물, 불, 동물들을 만났다. 도시에 사는 나는 그런 거대한 산과, 물, 호랑이, 여우 같은 동물을 만날 일이 없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그런 이미지를 집단 무의식의 원형적 이미지라고 불렀다. 그 이미지들은 동굴벽화를 그리던 사람들로부터 나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온 이미지라고 융은 말하고 있다. 나는 동굴벽화를 그리던 사람들이 살던 환경과는 많이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런 자연 이미지는 살아남아서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일까. 내가 꾸었던 일련의 꿈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자연이라는 이미지 속에 나를 숨겨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자연은 언제든지 나를 기꺼이 숨겨주었다. 나의 어떤 모습은 호랑이의 모습으로, 또는 물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꿈속에서 산과 들, 물과 바위 그리고 다양한 동물들을 만나게 되는 것과 선사시대 사람들이 동굴벽화를 그리는 것이 어쩌면 비슷한 이유이지 않을까.. ● 이렇게 나는 꿈속에서 내가 잊고 있었던, 혹은 잊고 싶어 했던 나와 나의 자연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동굴벽화 그리고 예술의 다른 이름이었다.
작품설명 ● 얼룩처럼 그림이 새겨져 있다. 종이 속으로 형상이 스며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검은 색 잉크는 익숙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지만 구름처럼 금세 사라질 것 같다. 아직 이미지로 남아 있는 잉크는 사람을 보여주기도 하고 집을 만들고 있기도 하고 정확한 종은 모르겠지만 네발 달린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 밖에도 언뜻 언뜻 알 것 같은 형상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의 조합은 낯설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분간할 수 있는 형상의 묘사가 구체적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원형의 잉크 덩어리에서 사람의 형상을 한 사람이 선 하나를 호수처럼 보이는 원의 형상에 드리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믿게 된다. 다만 그 장소가 어디인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물고기를 몇 마리 잡은 건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작품은 위와 아래 공간 혹은 밖과 안의 공간으로 나뉘어있다. 아래쪽 공간은 집이 있고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부 공간이라고 추측된다. 위의 공간은 집 밖으로 나가면 펼쳐지는 외부 공간으로 생각된다.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은 울타리처럼 보이는 형상으로 확실히 구분되어져 있다. 울타리는 처음엔 담 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물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형상은 물에 번져서 사라지고 있다. 형상은 정체를 숨기고 점점 흩어지고 있다. ● 문 밖에는 네발 달린 짐승과 숲이 보인다. 그 짐승은 개처럼 생기기도 하고 늑대처럼 생기기도 하고 말처럼 생기기도 하다. 어디론가 무리지어 가고 있다. 외부 공간에서 인식할 수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이다. 그 짐승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뒤에 보이는 숲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그 의미와 목적을 알 수 없는 잉크의 흔적들이다. 형상을 미쳐 이루지 못한 채 끝나 버린 잉크도 있고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아 볼 수 없는 잉크자국도 있다. 그냥 어떤 흔적으로만 존재해 보이는 것들이 공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는 꿈속에서 만난 자연을 그렸다고 한다. 그 자연은 숨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연은 무엇을 숨기려하는 것일까? 인간의 마음과 자연의 유사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적어도 작품에서 시각화 되어 만들어진 형상과 심지어 형상화되지는 못했지만 특정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흔적들은 분명히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형상은 서로 끊어 질 듯한 연관성으로 서로 관계 맺음을 하고 있다. 그림 안에서 관객은 어떤 이야기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게 그림의 마음에 동하여서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샌가 이야기는 물에 녹아 흩어지는 잉크처럼 어느 순간 모호해지고 잊혀진다. 결국 다시 자연 속에 나의 이야기는 숨어버리고 만다. 그림과 관객, 그리고 자연과 나의 대화는 과연 어떻게 끝날 것인가? ■ 신미리
Vol.20170402e | 신미리展 / SHINMIRI / 申미리 / draw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