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7_0330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안창홍_오원배_최진욱_장샤오강 Zhang Xiogang 쩡판즈 Zeng Fanzhi_쩌춘야 Zhou Chunya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아트사이드 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6길 15(통의동 33번지) Tel. +82.(0)2.725.1020 www.artside.org
재현의 정치 - Ⅰ. 서로 개성이 다른 여섯 작가를 '트라이앵글'이란 이름 아래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트라이앵글은 강철을 삼각형으로 구부린 악기처럼 하나로 선으로 이어진 것이라기보다 각기 다른 점(point) 혹은 예술가로서 고유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여섯 작가를 '현실(사회)-예술-작가'란 세 개념으로 연결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동일한 사회현실이라 하더라도 관점, 이념, 이해와 태도의 차이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하며, 사회현실을 예술로 표현하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예술작품을 통해 사회현실을 표현할 때 재현의 진실과 함께 묘사의 탁월성뿐만 아니라 예술적 가치에 대한 판단이 항상 문제로 부각되었다. 재현을 특정한 대상을 모방한 것으로 그 범위를 축소할 경우 유사성이 비평의 준거가 되면서 가치에 대한 평가 또한 편협해진다. 사진이 출현하자마자 들라로슈(Hippolyte Paul Delaroche)가 '회화는 죽었다'고 탄식했을 정도로 예술가들로 하여금 회화가 독점하다시피 한 재현과 기록의 역할을 박탈당했다는 위기의식과 상실감을 느끼도록 만들었으며, 사진의 등장에 의해 손의 수고와 오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재현회화가 박물관 속으로 추방되는 듯했다. 그러나 최초의 인상주의 전시가 사진가 나다르(Félix Nadar)의 작업실에서 열렸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사진의 출현으로 회화가 종말을 맞은 것은 아니며, 인상주의 회화 또한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신흥부르주아의 문화, 그것도 도시문화를 재현하는데 집중했다. 추상회화가 나타나기 직전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특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는 베를린과 같은 대도시를 활보하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주관적이고 활달한 필치로 표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서 나타난 신즉물주의는 더욱 과격하게 독일사회의 모순과 지배계급의 위선을 폭로하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다. ●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자양분으로 성장한 20세기 미술, 특히 모더니즘미술은 재현을 문학에 종속시키는 퇴행의 잔여물로 취급하며 축출하려고 했으며, 더욱이 소비에트 등의 사회주의 진영에서 지배적이었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고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역사적 경험을 겪으면서 재현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신뢰는 거의 바닥나다시피 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비판할 때 예술을 정치의 도구로 만들고 예술을 정치에 종속시킨 공식예술이란 이유를 든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한 낭만적 이상주의가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만큼 사회주의 사실주의는 현실의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 미술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추상미술은 탈정치적일까.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보면 가장 단순한 추상이 가장 정치적임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예술을 이념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에 의해 작품의 의미와 가치가 매도되는가 하면 반대로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양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칠 때 추상회화가 공산주의와 동일시되는 이상한 현상도 나타났으나 추상표현주의는 1950년대와 60년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기 위한 효과적인 증거품이기도 했다. ● 디지털기술의 발달로 원본과 복제의 개념이 애매해진 오늘날,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회현실을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과거로의 퇴행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문제는 재현의 실패가 아니라 재현이 과잉되었으므로 재현을 신뢰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러나 이 시대를 극현실(hyper-reality)이 현실을 추월한 시대로 규정한다 하더라도 사회현실이 우리의 삶과 밀착해 있는 한 재현의 유효성이 소멸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때 재현이란 단순히 가시세계의 모방이나 모사가 아니라 사회와 현실의 구조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관계를 포착하여 드러내는 것이며 그 과정에는 정치가 작용한다. 서로 다른 여섯 명의 작가들을 '재현의 정치'로 묶고자 한 것은 이들이 작품으로 정치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의 태도와 방법 속에 정치가 녹아들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Ⅱ. 한국은 오늘날 단색화로 호명되고 있는 집단개성의 시대를 지나 1980년대 민중미술이란 명칭으로 리얼리즘이 부활했다. 특히 1980년의 광주항쟁과 1987년의 유월항쟁은 예술의 사회정치적 의미와 역할을 고조시키며 재현의 정치를 실천하는 촉매역할을 했다. 오원배는 민중미술이 부상하던 1980년대 초반 프랑스로 유학하였으나 귀국 후인 1980년대 중반부터 민중미술과는 결이 다른 표현주의적 회화를 통해 특정 상황 속에 버려진 또는 갇힌 군상을 통해 사회현실의 중압을 견디면서도 몸부림치는 개인의 실존을 천착해 왔다. 반면에 안창홍은 '현실과 발언'의 동인으로 참가하기 이전부터 역사, 사회, 개인을 주제로 한 도발적인 작품으로 자신의 사회의식을 표현해 왔다. 최진욱은 회화를 구성하는 조건에 대한 탐색으로부터 그것을 제작하고 있는 작가 자신을 조명하면서도 한국의 사회현실, 정치와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운동으로서의 민중미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활동을 하거나 그것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기영역을 구축해온 작가들이다.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1980년대 한국미술에 나타난 형상성의 회복과 연관을 맺으면서도 각자 뚜렷한 언어를 벼려왔기 때문에 독립된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원배처럼 특정한 사회현실에 대한 증언과 고발보다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실존적 허무의식과 고독을 건축공간 속에 부유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든, 안창홍처럼 열정적이면서 당돌하게 한국사회의 모순과 질곡을 풍자적으로 드러내든, 최진욱처럼 냉정하면서도 무거운 시선으로 일상과 풍경을 관찰하면서도 그 속에 정치적 해석의 가능성을 개입시키든 재현의 정치를 실천하고자 한 점에서 다름 속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중국은 문화혁명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혁명적 낭만주의가 예술의 지배적 경향이었으나 문혁이 종결된 후 문혁의 트라우마를 기억, 기록하는 상흔미술을 거쳐 중국이 개방개혁을 추진하던 시기인 1985년을 기점으로 중국아방가르드운동이 나타났다. 그러나 1989년의 천안문사태를 거치면서 당시 중국의 젊은 미술가들은 앞 세대가 가졌던 역사적 책임의식과 중국문화를 구원하려는 이상주의로부터 급속도로 진행된 중국의 자본주의와 여전히 사회주의 체제와 전통의 무게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는 개인이 느끼는 당혹과 자조를 표현한 경향이 부상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리센팅(栗憲庭)은 완세현실주의(玩世現實主義, Cynical Realism), 정치적 팝(Political Pop), '염속미술(艶俗美術)'로 나눠 고찰한 바 있다. ● 저우춘야(周春芽)와 장샤오강(張曉剛)은 문화대혁명을 겪은 세대로서 개방개혁기에 미술을 수업했고, 동시대 중국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늦게 서구미술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반면 1964년에 우한(武漢)에서 태어난 쩡판즈(曾梵志)는 앞의 두 작가와는 달리 일찍 서구 모더니즘을 경험할 수 있었다. 미술대학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교육을 받은 저우춘야와 장샤오강은 중국사회의 급속한 변화를 지켜보며 완세현실주의, 정치적 팝, 염속예술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서구로부터 밀어닥친 포스트모더니즘 경향도 주목했다. 저우춘야는 중국의 현실과 정치를 희극적으로 그려내던 작가들과 달리 전통미술 속에서 해결점을 찾고자 했으며, 장샤오강은 초기의 서정적 표현주의와 1980년대 초반의 '마귀시기', 80년대 중반의 '피안시기'를 거쳐 가족사진을 통해 중국의 현대사를 조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완세현실주의와 강한 연관을 지닌 쩡판즈는 1990년대 초반 「세허의원(協和醫院)」, 「고깃덩어리」와 같은 작품을 통해 주목받았다. 특히 병원을 주제로 삼면화로 제작한 「세허의원」은 베크만의 상징적인 회화를 연상시키는 한편 환자와 의사가 다 같이 퀭한 눈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누가 환자인지 의사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상태를 보여주었다. 결국 이 작품 속에서 의사든 환자든 같은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2007년 갤러리현대에서의 전시를 통해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다. 「고깃덩어리」 역시 정육공간이 많은 우한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서 표현주의와 상징주의가 겹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 세 중국작가는 198·90년대 중국사회의 격동 속에서 예술가는 어떤 존재이며, 미술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란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여 각자 사회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을 작품으로 표명했다. 한국작가든 중국작가든 재현의 태도와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작품을 통해 각자 속한 사회현실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나 직접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하기보다 은유적, 상징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 점을 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을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Ⅲ. 2008년 12월경 안창홍은 자신의 작업노트에 '절망의 회색, 혹은 최악의 그림'이라고 적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이 「베드 카우치」 연작으로 주변에서 섭외한 평범한 사람들을 모델로 그린 흑백 누드초상이다. 그는 2007년 암선고를 받고 입원하여 매우 힘든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병마를 이겨낸 후 자신을 추스르며 「베드 카우치」 연작과 문신 연작에 몰두했다. 이 연작의 배경은 모두 작가의 작업실로서 캔버스, 붓통, 플라스틱 용기, 사다리, 등 주변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는 소품들과 심지어 마룻바닥에 튄 물감자국들은 모두 작업실을 마치 격전장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로젠버그(Harold Rosenberg)는 미국 액션페인팅 화가들의 캔버스에 대해 '행동을 위한 경기장(arena in which to act)'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안창홍의 작품에서는 작업실 자체가 격렬한 전투장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벌거벗은 육체의 노출이 지닌 즉물적 공격성 못지않게 그것을 둘러싼 배경에서 작업하는 행위 자체를 투쟁과 동일시한 결과임을 보여준다. 이 전시에서 그는 도발적인 자세로 베드 카우치에 누워 관객을 향해 노려보고 있는 여성과 함께 겉옷만 걸친 세미누드의 여성이 서 있거나 사다리에 걸터앉은 모습을 그린 작품을 출품하고 있는데 특히 흑백으로 그린 세미누드는 에로티시즘을 자극하기보다 박제된 시간, 즉 흑백사진이 불러일으키는 죽음에의 불길한 유혹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이런 점은 그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절망의 회색'이라고 표현한 것과 상통한다. 비록 젊은 여성을 모델로 제작한 것이지만 청춘의 풋풋함이나 활력보다 침묵, 처연한 관조의 눈빛, 열정이 배제된 냉정한 태도 등에서 죽음의 터널을 통과한 안창홍 자신의 심리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문신가게를 하는 한 남자를 모델로 작업을 하면서 그의 작품에 또 하나의 변화가 나타났다. 「문신한 남자」에서는 앞의 흑백작품과 비교할 때 감정이입이 감소하는 대신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대상의 재현이 전면으로 돌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정치적 상징이 소품처럼 나타나고 있는데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죽은 쥐가 어떤 정치적 함의를 지닌 것인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형식적 특징을 주목할 때 이 남자가 취하고 있는 포즈에서든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에서든 이 작품이 연극성과 즉물성이란 두 대척지점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음을 간파하기란 어렵지 않다. 드라마의 한 장면을 옮겨놓은 듯한 상황의 연출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연극적이다. 주인공 남자의 공격적인 태도와 아울러 화면의 구조나 내용과 상관없이 불쑥 등장하고 있는 쥐의 사체는 이 연극성을 고양시키는 소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연극성 못지않게 대상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재현한 시선과 방법은 이 작품을 더욱 즉물적인 것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연극성과 즉물성이란 두 상반된 세계의 불편한 공존은 또한 작품의 특이한 아우라를 강화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닫힌 공간에 유폐된 인물들이 마치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듯한 상황을 연상시키는 오원배의 작품에서 이 인물들은 코레지오(Antonio da Correggio)가 파르마 대성당 쿠폴라에 그린 「성모승천」란 천정화처럼 무중력상태에서 부유하는 듯한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의 정립은 인간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란 관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부동의 지구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인간은 원근법적 질서와 시각체제의 주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매너리스트의 스승이기도 한 코레지오의 천정화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하여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정식화되고 교회가 받아들인 천동설이 의심받으면서 르네상스가 수립했던 일시점 원근법이 해체되기 시작한 징후를 나타낸다. 물론 종교개혁에 의한 교회의 분열, 전쟁으로 인한 로마의 약탈,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로마경제의 위기 등으로 나타난 주지주의적 경향이 르네상스고전주의를 대신한 매너리즘의 사회적 배경임에 분명하지만 지상에 두 발을 딛고 것이 아니라 중력의 법칙과 상관없이 하늘 위에 떠있는 듯한 형상의 등장은 다시점 원근법으로 가는 과정이자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구원을 갈망했던 매너리즘의 정신적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오원배의 밀폐구조는 격리와 감금의 장소이다. 이 공간 속에 갇힌 인간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는 구원의 환희가 아니라 탈출이 원천봉쇄된 장소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고립과 단절된 상황 속에 방치된 인간들이 각자 보여주는 과잉된 제스처는 어두운 색조에 의해 비극적이면서 연극적인 상황을 고양시킨다. 폴란드 소설가 마렉 플라스코(Marek Flasko)의 『제8요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국가가 된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단 하룻밤만이라도 같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찾지만 결국 실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삼면의 방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바란 남자 주인공에게 그 벽은 그들을 보호해줄 장치이지만 오원배의 작품에서 벽은 인간을 가두는 제도와 폭력을 상징한다. 사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적 장치는 너무나 많다. 오원배의 작품은 그 닫힌 공간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폐쇄공포가 풍선처럼 가벼운 인간을 짓누르거나 옥죄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진욱의 「서서히」는 친구의 부친장례식을 모티브로 제작한 것이다. 산의 능선에 맞춰 조성해 놓은 한국의 공원묘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구릉의 등고선을 따라 구획해 놓은 축대와 아직 잔디를 입히지 않아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봉분, 그리고 하관 현장에 모인 문상객과 인부들을 표현적인 필치로 그린 이 작품은 서서히 관을 내리고 있는 인부들을 지켜보는 상주와 문상객들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쿠르베(Gustave Gourbet)의 「오르낭의 매장」에서 볼 수 있는 수평적 시점과는 다르다. 「오르낭의 매장」은 수평으로 도열한 성직자, 묘지관리인, 조문객들을 통해 '죽음 앞에 만민은 평등하다'는 작가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서서히」의 올려다보는 시점은 엄숙한 의식(儀式)으로서의 장례식을 연상하도록 만들지만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세 그룹의 인물들을 담담하게 배치하여 그들의 특징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일상의 풍경을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관하고 있는 인부와 주변에 모인 가족, 정중한 자세로 그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들, 트럭 뒤에서 휴식하고 있는 인부들은 이 사건의 일상성을 드러낸다. 물론 장례식을 찍은 사진에 기초하여 제작했기 때문에 이 장면을 일상의 풍경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이런 점은 최진욱의 작품이 쿠르베의 리얼리즘 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엘 그레코(El Greco)가 그린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특정한 인물의 죽음을 기념한 것이라고 한다면 「오르낭의 매장」이나 「서서히」에서 개인의 죽음, 그것도 오르가스 백작과 같은 영웅적 존재의 죽음을 기리고 있지는 않다. 두 작품은 장례식의 한 정경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더욱이 「서서히」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활달한 붓질과 구축적인 색면에 의해 원근법이 축소되는 대신 평면 지향적인 특징이 강화되고 있으므로 사실적인 기록이라기보다 사건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래 이 작품은 최진욱이 2008년 대안공간 풀에서 '88만원 세대'를 주제로 가졌던 개인전에서 발표한 「메멘토 모리 2」를 확대하여 다시 그린 것이다. 작가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를 제목으로 채택했다는 점은 「오르낭의 매장」의 '죽음 앞에 평등'과 겹쳐지면서 죽음의 평범성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최진욱은 「메멘토 모리2」를 확대하여 다시 그린 이 작품의 제목을 왜 '서서히'로 정했을까. 그가 이 작품을 다시 제작하고 있을 2012년 겨울은 대통령선거가 막 치러지고 있을 때였다. 그는 '구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작품을 완성했을 때는 이미 보수진영의 후보가 당선된 후였으므로 제목을 바꿔야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서서히 바뀌겠지'라고 말한 것에서 착안하여 그는 제목을 '서서히'로 결정했다고 한다. 물론 제목이 이 작품의 정치적 함의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승자독식체제와 청년실업, 비정규직의 고통을 겪고 있는 세대를 일컫는 '88만원 세대'를 주제로 한 전시에서 처음으로 발표했다는 사실을 주목해보면 장례식의 일상성 속에서 사회현실에 작동하고 있는 정치적 구조를 읽어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 그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의 옥상에서 학생들이 웃으며 점프하는 모습을 포착한 「웃음」 역시 좋은 사진, 재미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있는 제자들의 일상의 평범성을 셔터를 누르는 순간처럼 빠른 필치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연작의 이면에는 천진한 웃음은 순간이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들이 감당해야 할 어려움은 지속적일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위기감이 배어있다. 그런 점에서 메멘토 모리는 한 개인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무서운 절망 앞에 내버려진 시대를 기억하란 경구처럼 들리기도 한다.
1955년 충칭에서 출생한 쩌춘야는 스촨미술학원을 졸업하고 카셀미술대학으로 유학해 1988년에 졸업했다. 그는 바젤리츠(Georg Baselitz), 펜크(A. R. Penck), 키퍼(Anselm Kiefer) 등 신표현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명말청초에 활동한 팔대산인의 파격을 존경했다. 중국 미술평론가 뤼펑(呂澎)은 저우춘야의 「산석(山石)」 연작이 팔대산인의 괴석(怪石)이 지닌 형태 없는 자유로움을 현대적으로 번역한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 나타난 표현적이면서 주관이 두드러진 필치는 중국의 전통서화와 표현주의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녹색 개」는 몇 번의 붓질로 형태를 구성하는 필법을 구사하고 있는데 활달하면서 유기적인 필치가 초서(草書)의 서법을 연상시키고 있음은 물론 산석에서 볼 수 있던 견고한 덩어리의 피부가 거침없는 붓질로 개의 털과 그 결로 되살아난 것으로 봐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 개가 나타난 것은 1994년부터 독일산 양치기개 헤이건(黑根)을 기르면서부터였으며, 1997년 처음으로 녹색 헤이건이 등장했다. 애완견을 기르면서 그것을 그리다보면 개의 습성을 잘 관찰할 수 있는데 그의 그림 속의 개는 대부분 야수의 공격성을 드러내기보다 이미 가축화한 개가 인간 앞에서 취하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저우춘야는 단지 개의 다양한 습성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개를 통해 인간이 지닌 욕정을 포착하고 있다. 예컨대 병들어죽은 헤이건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그린 「녹색 개」에서 보랏빛 성기를 노출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발정한 개가 교미의 본능을 달성하지 못해 끙끙대고 있는 형상을 빌어 인간이 지닌 어쩔 수 없는 욕망을 은유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개와 함께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복사꽃 연작은 도연명(陶淵明)이 『도화원기』에서 묘사한 낙원을 떠올리게 만든다. 붉은 빛이 감도는 복사꽃이 흐드러진 동산은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처럼 목가적이면서 이상적인 땅을 상징하지만 저우춘야의 작품에서 복사꽃이 흐드러진 숲은 성적 판타지와 폭력적으로 아름다운 욕망이 뒤섞인 장소이다. 게다가 붉은 꽃과 녹색이 극적으로 대비를 이루는 공간에서 마치 체액처럼 흘러내린 물감을 배경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남녀의 붉은 육체는 휘갈긴 듯한 날카로운 붓질에 의해 달성할 수 없는 욕망 앞에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점에서 「녹색 개」의 발정과도 연관됨을 알 수 있다. 결국 낙원에서도 성취할 수 없는 욕망이 농염하면서도 폭력적인 색채와 필치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은 '썩어 문드러진 곳이 복사꽃 같이 화려하게 아름답다(潰爛之處 豔若桃李)'는 중국 옛 문헌을 떠올리게 만들 뿐만 아니라 메멘토 모리와도 맞닿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쩡판즈는 후베이미술학원에 다닐 때 표현주의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고향 우한에서 날것의 고깃덩어리를 가공하고 있는 사람들을 표현적이면서 도식적으로 그리기도 했던 그는 준수한 외모에 비해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이유때문인지 베이징으로 옮긴 후 새로운 도시에서 느꼈던 낯설음, 두려움과 수줍음을 가면을 쓴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나/우리」에서 그는 가면을 벗은 인물을 보여주고 있으나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에 뚫린 구멍처럼 커다란 눈에 비해 무표정한 얼굴과 가는 목, 해부학과는 상관없이 큰 손의 특징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이런 특징은 앞에서 말한 베크만의 작품과 함께 항일시기 신흥목판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강인한 윤곽선으로 표현된 인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유니폼 위에 붉은 목도리를 맨 인물과 정장을 잘 차려입은 두 인물을 보면 동일한 사람이 의상만 바꿔 입은 것처럼 닮은 외모를 하고 있다. 외모는 물론 성격이나 감정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그린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획일적인 모습이 가면을 벗은 이 작품에서도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폐허를 연상시키는 구조물을 배경으로 서있거나 혹은 그 위에 걸터앉아 있어서 급속한 자본주의에 따른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가까운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면서도 달라진 사회에 맞춰 쫓아가는 중국 지식청년들의 평균화된 모습을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듯 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감정을 억제한 무표정한 얼굴과 정면을 향해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을 지닌 두 인물은 서로에게 상관없이 무대 위에서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에 가깝다. 따라서 이들을 연결하는 사회적 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운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공허함과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고립감이며 텅 비다시피 한 배경은 그런 정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 「나/우리」가 불러일으키는 황량함과 쓸쓸함에 비하면 「교외 8번」은 형태가 해체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현대의 신화이자 아이콘이 된 인물들의 초상을 어지러운 선으로 해체하거나 혹은 지워버리는 작업을 통해 재현을 거부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 이 풍경에서 자연대상은 어두운 색조로 환원되고 묘사가 사라진 대신 선의 유희가 전면으로 돌출되고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을 연상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에 불과하며 두터운 물감과 난폭한 선이 서로 얽힌 추상화된 구조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특정 지역에서 취재한 풍경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장소는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마음의 상태가 손의 압력에 따라 자동기술적으로 만들어낸 의사(疑似) 풍경은 작가의 심리 속에 자리하고 있는 폐허의 풍경을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윈난성 쿤밍에서 혁명 간부의 아들로 태어난 장샤오강은 문화혁명기 부모가 하방을 하자 형제들과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 정신 재무장 교육을 받기위해 산간벽지로 쫓겨나기 전 어머니는 당시 아홉 살이던 아들에게 '밖에서 말썽피지 말고 그림이라도 그려라'고 충고했고, 그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그리움과 외로움을 잊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 소년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엄청난 경쟁을 거쳐 마침내 스촨미술학원에 입학했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초조, 고민, 고독 속에 고통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으로 입원하여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2년 독일여행 후 그의 작품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에 「혈연-대가족」 연작을 통해 주목받았다. 이 작품들은 쿤밍의 부모님 집에서 발견한 오래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으로서 문화혁명기 당시 인민복을 입은 부부가 하나뿐인 자식을 사이에 놓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엄숙하면서도 다소 얼이 빠져있는 듯한 표정으로 촬영한 가족사진을 작가 나름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 재해석의 증거는 단정하게 잘 차려입었지만 딱딱한 자세로 배열된 인물들을 통해 작은 집단으로서의 가족이 사회주의 체제 아래 얼마나 표준화, 평준화되었던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과 함께 작은 창으로부터 받은 빛을 표현한 것과 같은 얼룩, 핏줄을 암시하는 붉은 선을 통해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우수어린 상실감과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가족 사이의 연대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장샤오강의 이런 작품은 1980년대 초반 이미 초상사진을 통해 역사의 격랑 속에 살아갔던 개인의 삶을 고찰하고자 했던 안창홍의 「가족사진」과도 상통한다. ● 장샤오강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소년」에서도 잘 나타난다. 청회색의 우울한 색조 가운데 마치 유령처럼 부상하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눈물을 머금고 있는 슬픈 눈을 가졌으며, 약간 벌인 입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토해내는 듯하다. 소년의 뺨 위에 상흔처럼 떠있는 붉은 조각은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 묻은 거즈조각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그것은 신체에 난 상처라기보다 마음에 얼룩진 고통을 암시한다. 「망각과 기억 –전구와 책」 역시 현실과 몽환의 경계에서 작가가 겪은 우울한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펼쳐진 일기장 위에 놓인 만년필은 작가의 부재가 아니라 곧 돌아와 남은 공간을 채울 것이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백열등의 플러그가 빠져있지만 전구에 불이 들어와 일기장의 일부를 비추고 있는 모순된 상황을 통해 그는 이 작품이 내면의 성찰에 대한 고백임을 보여준다. ■ 최태만
Vol.20170330a | 트라이앵글 Triangle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