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7_0329_수요일
DAC작가시리즈Ⅰ
관람시간 / 10:00am~08:00pm / 월요일 휴관
대구문화예술회관 DAEGU ARTS CENTER 대구시 달서구 공원순환로 201 Tel. +82.(0)53.606.6114 artcenter.daegu.go.kr
대구문화예술회관의 『원로작가회고전』에서는 올해 서예의 남석 이성조(1937생), 한국화의 천우 이천우(1943생) 선생을 초대하여 각 분야에서 먹의 진수를 보여준 두 원로작가의 내공을 시기별로 보여준다. 올해 초대된 두 작가는 부산에서 부산사범대학교를 졸업하시고 대구에 정착하신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으며, 전시에서는 먹에 천착하신 두 분 작품의 여정을 조명한다.
남석 이성조 선생은 193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시절 청남 오제봉 선생(1908-1991)을 만나 서예에 입문하였고, 1960년에는 시암 배길기 선생(1917-1999)을 사사하였다. 1971년에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스님(1912-1993) 아래 입문하여 입산수도하였다. 남석의 활동은 초기 1950년대 청남 서풍과 1960년대 시암의 전예서 서풍을 이어받아 독자적인 서풍을 만들어나갔다. 안동과 경주를 거쳐 1974년에 대구에 정착하여 남석서예연구실(구, 이인성아뜨리에)을 개원하였고, 남산한묵회, 현현연서회 등을 주재하면서 대구 서예계에 전서와 예서를 비롯한 새로운 서풍을 전하였다. 그는 추상적인 서체와 선화풍의 문인화 작업 등 서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였고, 주요 시기마다 독립선언문, 묘법연화경 등 대형 병풍 작업을 하기도 했다. ● 그는 1981년 한미수교 100주년기념 전을 미국에서 가진 후 1985년에 팔공산에 공산예원을 설립하였다. 글씨는 인간됨에서 나온다는 소신으로 자연미와 천진함을 추구하였고, 암중취호(暗中醉毫)나 필령(筆靈)의 사용 등 글씨를 쓰는 데 있어 기술이 아닌 정신을 요구하는 엄격함을 취해왔다. 2010년대 들어서는 그는 추상적인 점과 선, 다양한 색채를 사용한 회화작업을 다수 선보이며, 글씨와 그림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성조선생은 오제봉에게 배운 대로 "서예를 배움에 하루도 글씨를 쓰지 않는 날이 없다.(學書無日不臨池)"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대학을 졸업하던 22살 때 국전에 첫 입선한 이후 총 13차례나 입상한 것은 지극한 수련과 노력의 결과였다. 1966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부산공보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며 35회의 개인전을 연 것은 이례적 기록이다. 오제봉의 안진경풍 해서, 황산곡풍 행서를 배웠고, 금문의 상형성을 활용한 김광업의 영향도 받았지만, '국전선생'으로 불렸던 배길기의 전서 서풍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아 「석고문」, 소전, 청대 전서 등을 두루 공부하였고, 「조전비」, 「장천비」, 「예기비」 등 예서도 많이 썼다. 전서, 예서에 주력하여 조형적 창의성에 뛰어났던 이성조의 서풍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살피기에는 다소 어긋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형(字形)의 수용 폭이 넓으며 글씨 근원에 기묘를 곁들인 자형 해석력이 있기 때문이다."(정충락)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중략) 50대 중반에 획이 유동적이면서도 가늘고 기필과 수필이 모두 뾰족한 자가풍 예서가 완성되어 불경 서사(書寫)에 주로 활용되었고, 60대 중반에 이루어진, 서법의 상규를 벗어난 동글동글한 자가풍 행서는 한글에도 응용되었다. 이성조 선생은 1980년대 후반 붐이 일었던 '현대 서예'에도 관심이 많았으나 이러한 경향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묵상(墨象)」 작품을 발표하였고 한자의 상형 이미지를 활용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1995년(58세)을 전후해 나타나는 '종자(種子)' 시리즈는 중앙에 점을 찍은 작은 동그라미를 무수히 반복하여 생명의 근원, 아득한 태고의 이미지로 발전한 듯도 하다. 그는 칠순을 넘긴 만년에 이르러 평생 걸어온 서예의 틀을 완전히 벗어던진 그림을 그렸다. 서예도 떠나고, 불교도 떠난 이러한 그림들을 '이성조 만다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인숙
이천우 선생은 1943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부산사범대학교와 계명대학교에서 한국화를 공부하였고 교육자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는 고교시절 경주 불교포교단 활동을 하며 한국화가 지홍 박봉수(1916-1991) 선생의 작업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등 경주의 예술적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69년 경북중과 경상중학교에 재직하면서 대구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1976년에는 강선동, 정치환, 정태진, 이정 등과 함께 한화회(1977-1993)를 창립하였다. 한화회는 '하나', '크다', '한뜻으로 모인다'는 뜻으로 종래의 한국화 답습과 모방을 벗어나 한국화의 창조적 모습을 만들고자 결성되었다. ● 그의 작품은 1960년대 담채 기법과 1970년대 수묵선묘 위주의 한국화에서 1980년대 들어 발묵의 굵은 선묘로 대담하게 그린 나무, 세심한 필선, 초가집, 여백의 구도로 화면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기법은 1990년대에 부드러운 담묵의 번지기 기법으로 발전하였고, 최근에는 화려한 색감을 보이기도 하였다. 故정점식 선생은 그의 작품이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적인 현실이지만 추억속의 관념을 남기고' 있으며, '작품에서 느끼는 푹신한 촉감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우리들의 잃었던 자연'이라고 평하였다.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은 자연으로의 회귀를 염원하는 동양의 정신성을 읽을 수 있는데, 산과 나무, 그리고 초가집 한 채를 화면에 상징적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이채로우며, 명상적이며 서정적이고 마음의 평안과 고요,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이태수(李太洙)는 그가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현대적인 감수성과 독특한 기법이 돋보이는" 작가로 "자연과의 親和, 또는 그 신비의 세계를 집중적으로 천착"하는데, 선(線)을 거부하거나 극도로 절제하는 대신 화선지 위에 물감이 번지게 해 면(面)을 이루고, 그의 유동적인 흐름이 형상을 빚게 한다고 보았다. 또한 여백의 미(美)를 중시하면서 동양적인 직관·관조의 정신과 정적(靜的)인 아름다움을 부각시켰다고 평한바 있다. ● 초가집은 무한한 하늘 아래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심리적 욕구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나무에 찍혀있는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점들은 '태점(苔點)의 변용'으로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 해석했다. 그리고 서민, 농악 등을 주제로 역동적인 선묘와 몰골법을 구사한 해학적인 인물화를 주로 제작했던 청초 이석우의 깊은 영향 하에, 작가는 필묵(筆墨)의 정신성(精神性)을 바탕으로 먹의 농담, 선묘의 리듬, 화려한 색감, 여백의 미 등으로 현대성을 담아내면서 자신의 관념화된 양식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홍원기
Vol.20170329f | 원로작가회고-남석 이성조_천우 이천우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