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정원 Secret Garden

박민희展 / PARKMINHEE / 朴敏喜 / painting   2017_0322 ▶ 2017_0328

박민희_비밀정원 Secret garden_한지에 혼합재료_120×148cm_2016

초대일시 / 2017_032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자작나무 사간점 GALLERY WHITE BIRCH SAGAN-DONG 서울 종로구 사간동 36번지 Tel. +82.(0)2.733.7944 www.galleryjjnamu.com

심연에서 단계적으로 솟아오르는 서사로서의 회화 ● 지난 세기 서구 모던 페인팅은 회화의 평면성, 또는 2차원성'이라는 도그마를 향해 치달았다. 이 과정 동안, 3차원 이상의 것들을 끌어들였거나 끌어들일 여지가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제거되거나 추방되었다. 문학적 요소, 사실에 대한 반응, 심리적 배경, 원근법이나 명암법 등을 통한 시각적 효과 … 남은 것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초월로의 나아감도, 삶의 의미에 대한 해석도, 주체의 고백도 없다. 오로지 회화라는 개념적, 물적 기반에 대한 공허한 정의만 댕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강령과 지적 아집으로 점철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평면성'이 도그마로 진화하는 과정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이 거창한 예술담론으로 물신화하고 세계화하는 과정은 제국주의의 확장이라는 비극적 역사의 일환이다.

박민희_비밀정원 Secret garden_한지에 혼합재료_66×64cm_2016

박민희 회화의 담론에 다가서는 우선적인 길은 이 강령화된 평면성의 신화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열린다. 이 세계에 그러한 개념적 집착은 애초부터 부재할 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평면으로서의 캔버스는 ‘support'로서의 ‘surface' 일뿐, 그 이상이 아니다. 평면성은 보존되는 대신 많은 층들로 분화되고 분할된다. 2차원성은 조금도 특권적이지 않은 개방성으로 재정의된다. 표면은 그것에 이르기 이전의 많은 층들에 비해 조금도 특권적이지 않다. 표면은 복수의 이면들의 축적의 산물일 뿐이다. 축적된 이면들 자체가 곧 표면이다. 이는 물리적인 사실인 동시에 시각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박민희_나와 마주보다 Facing Myself_한지에 혼합재료_130×193cm_2017

박민희의 회화에서 표층은 심층으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關門)으로 기능한다. 이 회화론에서 평면은 수호해야 할 궁극의 가치로서의 막힌 벽과 같은 것이 아닌, 삶과 주체를 향해 개방된 지평이다. 그 지평에는 인생의 주석들이 수록되고, 주체로서 ‘나'의 고백이 저장된다. 그 미학적 초점은 캔버스의 표면을 관류해 존재의 심연에까지 가닿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언되어야 할 것은 평면의 2차원적 도그마나 캔버스의 유물론적 실체성이 아니라, 그것이 담아내야 하는 경험하고 자각하는 주체적 살아있음이다. 이것이 박민희의 회화론이다.

박민희_비밀정원 Secret garden_한지에 혼합재료_38×61cm_2016

"진정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 축적된 나의 내면의 모습이다."(박민희) ● 박민희의 회화는 표면에 얽힌 강령들을 뒤로 하고, 중층으로 된 내면으로 향한다. 그것은 무궁무진한 내부를 암시하는 유리창과도 같다. 표면은 누적된 복수의 층들을 보여준다. 각각의 층들은 시선의 투과를 허용하는 얇은 한지와 반투명의 천으로 콜라주 되어 맨 밑바닥까지를 드러내 보여준다. 하나의 층은 그 위에 또 하나의 층이 올려진 뒤에도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새로운 층이 부가되면 이전의 표면은 배경으로 물러난다. 명백했던 것들이 희미해져 가고, 사건들은 기억으로만 남는다. 한 때의 뜨거웠던 상황들은 어느덧 ‘저 밑바닥'이나 ‘그 옛날'이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누적이, 즉 삶의 시간구조가 시각화된다. 마치 세월의 도식이 그렇기라도 하듯, 이미지 위에 이미지가 얹히고, 나뭇잎 위로 또 다른 나뭇잎이 중첩된다.

박민희_나와 마주보다 Facing Myself_한지에 혼합재료_150×128cm_2017

하나의 층이 생성되면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생의 경험들이 그렇듯, 화면은 조각나 있는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부분은 전체를 이루고, 전체는 상이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품으로 보듬는다. 때론 애가(哀歌)가 낭송되고, 때론 성가(聖歌)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때때로 절망적이었을 테고 고통은 또 왜 없었겠는가. 깊은 잠과 슬픈 꿈의 와중에도 다시 희망을 움켜쥐어야만 했었으리라. 고독한 밤과 불타는 낮의 경험들, 하지만 그것들의 합(合)인 인생은 이렇듯 예기치 못했던 걸작이다.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예측되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그 방향조차 처음부터 주어졌던 것이 아니었다. 이 시간성, 조각난 무기질의 경험들을 유기화 하는 의지, 무관해보였던 시간의 분절들 속에서 생의 질서를 포착해내는 태도, 이것이 곧 그의 회화론의 바탕인 것이다.

박민희_비밀정원 Secret garden_한지에 혼합재료_39×60cm_2016
박민희_비밀정원 Secret garden_한지에 혼합재료_39×60cm_2016

그렇다. 박민희의 회화는 그저 여러 층들이 겹치면서 만들어낸 시각적 효과로만 설명되어선 안 된다. 작가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비밀의 정원'에 관한 서사다. 그건 아마 존재의 심연의 다른 표기쯤이지 않을까. 여기서 그가 구성한 회화의 층들은 마음의 마음이거나 내면의 내면으로 향하는 단계들이다. 마음의 마음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그리고 내면의 내면까지라야 겨우 자신과의 진정한 대면에 이르는 것이라고, 이 비밀의 정원은 말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 정원은 조심스럽게 스스로를 개방하고, 존재의 저 밑바닥의, 마음의 저 안의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과의 조우(遭遇)를 허용할 기세다. 사람들은 그 안으로의 여정에서 규명되어야 할 ‘나'와 대면하는 길, 치유되어야 할 ‘나'를 만나는 방식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박민희_나와 마주보다 Facing Myself_한지에 혼합재료_60×80cm_2017

그것을 ‘업'이라 말하건, ‘구조'로 이해하건, 뭉뚱그려 시간의 서사라 하든, 삶은 늘 이 누적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늘 새로우면서도 조금도 새롭지 않기도 한 것이 삶이 아니겠는가. 삶은 역사 속에서만 영위되고, 경험은 시간의 족쇄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미래는 경작되어 온 과거의 토양에서 자양분을 취할 것이다. 마치 인생이 그렇듯, 삶의 꽃은 이 누적된 층 위에서 만개한다. 박민희의 회화는 그 꽃이 다소 신비로운 푸른빛을 머금거나 선홍빛이 감도는 것이라고 넌지시 속삭인다. 그것들은 종종 더 밝은 빛에 둘러싸인 채 주변의 어두움들 속에서 활짝 피어난다. 꽃의 형상들이 민화(民畵)의 전통으로부터 취해진다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닐 터이다. 이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시간의 여행과 무관하지 않은 것들이다.

박민희_비밀정원 Secret garden_한지에 혼합재료_22×30cm_2016
박민희_비밀정원 Secret garden_한지에 혼합재료_120×200cm_2017

예술에는 나름의 의무가 부과된다. 박민희의 회화는 장엄한 팡파르를 울리는 쪽은 아니지만, 그 지조만큼은 엄연히 서사적이다. 이 세계의 임무란 저 심층부로부터 단계를 거쳐 올라오는 인생의 서사가 다시 중심을 이루도록 하는 회화론의 재구성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임무는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회화론의 멈췄던 시계를 다시 돌리는 것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지난 세기 내내 굳은살이 배겨온 어떤 미학적 도그마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 심상용

Vol.20170323b | 박민희展 / PARKMINHEE / 朴敏喜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