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 獨樂

유영미展 / YUYOUNGMI / 柳榮美 / painting   2017_0220 ▶ 2017_0224

유영미_망우_스테인리스망, 아크릴채색, 석채, 먹_52×72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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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8:00pm / 토요일_10:00am~06:00pm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Hongik Museum of Art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94 문헌관 4층 Tel. +82.(0)2.320.3272~3 homa.hongik.ac.kr

심해에서 길어 올리는 긍정의 힘 ● 화면의 물고기는 관상어를 닮지 않았다. 아름다운 모양과 색이 아니다. 오히려 심해 어디엔가 살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외모를 가졌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촉수로 가늠해야 하는 세계 속에서 사는 것들로 보인다. '심해 아귀'라 불리는 이런 종류들은 생김뿐만 아니라 습성도 특이하다고 한다. 몸집이 수십만 배나 작은 수컷은 암컷의 배를 물어서 아예 핏줄까지 통해 한 몸이 되어버린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벌린 입에서는 아우성을 쏟아낼 것 같다. 한결같이 검은 배경은 또 뭔지. 이런 작품을 '미술(美術)'로 만나야 하는 이유는 뭘까.

유영미_망우_스테인리스망, 아크릴채색, 석채, 먹_52×72cm_2015

자발적 빈곤의 흔적들 ● 20세기 중반에 끔찍한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잔혹과 그 트라우마를 풀어냈던 작가들, 예컨대 뒤뷔페와 장 포트리에, 프란시스 베이컨의 세대나 그들의 작품 경향이 그렇다. 전쟁의 상흔을 살덩어리로 보여준 장 포트리에의 「인질」, 핏빛으로 물든 그림자 속 얼굴을 그린 베이컨은 이미지 자체의 충격이 적지 않았다. 그 중 뒤뷔페는 좀 다른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의 그림 출처와는 다르게 이미지 자체는 친근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모티브는 소위 '정상인'이 아니었다. 벨기에 탄광촌으로 들어갔던 빈센트 반 고흐에게 의심의 시선을 보내며 '자발적인 빈곤'의 진정성을 의심했듯이, 이런 자기 파괴적 모티브의 그림들이 환영받기는 쉽지 않았다.

유영미_독락_스테인리스망, 아크릴채색, 석채, 먹_30×30cm_2016
유영미_독락_스테인리스망, 아크릴채색, 석채, 먹_30×30cm_2016

유영미 또한 '자폐증(autism)'을 그리고 있다. 자폐증과 같은 주제를 다뤘던 뒤뷔페의 경우는 어땠을까. 뒤뷔페는 자신의 미술을 '원생예술(art brut)'이라고 불렀다. 발달장애나 자폐, 신경증 환자의 그림을 수집하고 전시하기도 했다. 이들 작품을 모아 그것을 뒤뷔페는 자신의 작품에도 인용했다. 거기서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영감을 얻고자 했다. 무슨 필요 때문이었을까. 그가 받은 미술교육과 훈육된 감각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예술을 펼치는 법이 필요했다. 예술적인 숙련과 기법, 기능을 빼버린 미술로 말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자발적인 빈곤이 의심을 샀듯이, 의도적인 기능과 기법을 버리는 것은 과연 생산적이긴 한 것일까. 여기서는 장 뒤뷔페와 함께 이 운동에 기꺼이 협력했던 앙드레 브르통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의 법황'이라고 불렸다. 3차에 걸친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썼다. 그건 거의 한 권의 책으로 묶일 만한 분량이었다. 초현실주의 제1선언문에서 그는 '초현실주의는 자동기술법'이라고 규정했다. 현실을 뛰어넘는 초현실의 세계를 펼쳐낼 방법이 자동기술법이었다. 그것은 뻔한 예술적 기능에 길들여지지 않은 원초적인 감성으로 작업하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경험했듯이 역사적인 초현실주의만 해도 수많은 상상의 세계를 펼쳐냈다. 초현실에서 당대의 이성으로 제한된 것과는 전혀 다른 무한한 예술의 세계를 펼쳐낼 수 있었다. 그게 신세계로의 출구를 여는 열쇠가 되었다. 무의식의 세계를 펼쳐내는 방법은 이성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즉 이성을 버리는 방법이었다. 이성을 버려야만 이성을 초월할 수가 있는 법. 버리는 것이야말로 힘이었던 것이다.

유영미_독락_스테인리스망, 아크릴채색, 석채, 먹_160×174cm_2016
유영미_독락_스테인리스망, 아크릴채색, 석채, 먹_160×174cm_2016

잔혹 속 긍정의 힘 ● 유명미의 미술이 이제 또 다른 초현실의 세계를 펼쳐내려는 것은 아닌 듯이 보인다. 환상의 세계, 가령 현실을 넘어선 '초'현실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림은 우리를 전율하게 할 만큼 강하다. 형상도 그럴듯함과 기괴함으로 가득 차 있다. 어두운 배경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없는 바탕에 거친 경계를 두고 어두움이 부유하는 화면을 만든다. 그 속에 이빨을 드러낸 거대한 입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물고기를 배치한다. 그런 강한 효과와 함께 그림은 때로는 기법적으로 깊은 예술적 효과들을 과시하기도 한다. 검은 바탕 위로 드러난 형상에 몰입하게 하는 묘사는 때로 정교함으로 예술적이다. 작품 경향이 특정 소재를 통한 묘사의 묘미에 기반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금분과 금분이 섞인 붉은색, 무채색 은분으로 데생하듯 그려놓은 형상들도 단단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어항에 갇혀있거나 모래시계에 남은 모래처럼 빨려들듯 떠있는 물고기는 고립된 폐쇄적 상황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유영미_동거독락_스테인리스망, 아크릴채색, 석채, 먹_180×227cm_2016

돌아보면 현대인의 현실은 여전히 참혹하다. 꽃다운 아이들을 거두어간 통곡의 바다 앞에서 무엇 하나 할 수 없던 현실도 여전하다. 야만이 세계 뉴스로 생생하게 날아드는 것도 날마다 도를 더하고 있다. 야만과 부도덕이 우리 바로 옆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질 조건과 철학의 부재도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여전히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류의 자폐적 현실들은 가히 광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각을 유명미는 작품의 주제로 삼고자 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의 직시로부터 진실과 긍정의 실마리가 마련될 수 있을 것임은 분명한 일이니까. 그 속에서 우리는 자폐와 자기파괴를 넘어 긍정의 힘을 필요로 한다. 창조적 계기를 삼았던 작가들은, 그들이 이룬 초현실이든 어떤 거대한 새로운 것이든 창조의 세계를 일구어냈다. 그런 예술세계가 창조된 것은 새로운 감각을 담아낼 새 그릇을 선택한 것에서 나온 결과다. 버린다는 것을 긍정하는 일, 버린다는 것의 힘을 믿어서 가능해진 표현 세계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기쁨을 어디에 비할 것인가. 결핍과 부재로서의 욕망 대신 무한한 긍정을 불러내는 욕망도 있다. 그 선택이 풀어낸 결과로서의 작품이 우리의 시각을 자극해 전율케 하는 표현들은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길 충분한 자격이 있다. ■ 최형순

Vol.20170220f | 유영미展 / YUYOUNGMI / 柳榮美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