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우석 갤러리 WOOSUK GALLERY 서울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 56-1번지) 서울대학교 예술복합연구동(74동) 2층 cafe.naver.com/woosukgallery www.facebook.com/woosukgallery.74.snu
신성함의 연극성 ● 1999년12월, 부모님에게 라면과 물을 사야 한다고 졸랐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의 어린 나는 세상의 종말이 두려웠고, 2000년이 되면 Y2K와 함께 우리 모두 먹을 것을 위해 싸워야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나를 조용하게 하고 싶어서 였는지 라면 여덟 개와 생수 한 묶음을 샀다. 나는 부모님이 이 심각한 문제를 농담처럼 받아드리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새천년이 시작됨과 동시에 우리 가족이 굶어 죽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2000년 1월 1일 오전 12시는 매우 다행스러우면서도 실망스러운 날이었다. ● 불확실성은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나쁜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며, 그 가장 나쁜 가능성에 노출시킨다. 나의 어린시절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나날이었다. 27년간, 나는 22번을 이사했다. 평균적으로1.2년을 한 곳에서 산 셈이다.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불확실성과 안정적이지 못한 상황은 나에게 이러한 불확실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과 힘에 대한 질문을 갖게 했다.
나는 이 문제를 매일같이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외부적 힘은 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은 매우 견디기 힘들지만 나는 종종 이러한 상황에 굴복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컨트롤의 획득이 불가능한 것은 나에게 한 사람을 굴복하게 만드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만약 내가 그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권위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알게 된다면 나에게 가해지는 강제력이 무엇인지 알고, 또 가능하면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기관이 만드는 사회적 압력, 즉 형식이 불러일으키는 압력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나의 작업은 끊임없는 권위에 대한 질문이며, 권위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연구이고 무엇이 권위를 만드는지 알아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강제되는 형식에 대한 불만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권위가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힘을 인정해주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 대상은 사람들이며 권위, 즉 기관은 연극적 요소를 사용해 그들의 힘을 더욱 강화하려고 한다. 나는 권위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을 재현하려고 한다.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연극적 요소를 재현하는 과정은 진짜 권위 대신 유사 권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내가 재현하는 과정 자체가 진짜 과정이 아닌 재현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 유사권위는 권위획득과정의 재현에서 생성되는 부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사 권위는 권위의 성격을 나누지만 진짜는 아니다. 나는 기관이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 하는 노력을 모방하는 과정을 만들어낸다. 나는 기도와 성가의 내용을 바꾸나 관객들은 그것들은 계속 성스럽게 받아들인다. 이것이 유사권위의 생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나의 작업들은 사람들로 권위 획득을 위한 연극적 요소의 사용 과정 안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진짜가 아닌 레플리카이다. 나는 권위를 조건을 만들어준다. 그 조건들은 권위와 비슷하나 유사권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의 작업들이 관객에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형식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이었으면 한다. ■ 강지수
중심의 그곳, 만다라 ● 가끔 현재의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소속된 집단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기쁨, 슬픔, 만족, 갈등을 느끼기도 하고, 일에 몰두해 열정을 바치기도 하고, 인생의 가치관을 만들어가며 나와 주변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내 존재의 가치를 느끼게 해주며 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 그러나, 내 일생의 일련의 과정들이 끝나고 나면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면서부터 마음 한 구석에서는 늘 내가 현재 바라보고 있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다른 어떤 더 큰 것'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큰 것'이란 사실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부분은 아니다. 나의 직관이다. 내가 느끼는 '더 큰 무언가의 존재'는 실체적으로 뚜렷한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유무가 증명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미지의 궁금증이 내 존재의 이유를 넘어선 자연생성의 원리와 태초의 원리를 품어냄으로써 그 안에서의 작디 작은 존재인 나의 삶을 품어줄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생각의 발전 과정에서 비단 이러한 갈망은 나 혼자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 인류의 역사동안 인류는 계속해서 '무한한 힘을 지닌 어떤 것'를 인식하고 이를 상징화 해왔었다. 그 중 나의 생각과 가장 밀접하게 그 사상을 같이 하는 상징체는 불교(中 밀교)의 만다라(mandala)였다. 만다라는 manda(본질)을 la(소유)한다 하는 의미로 수행자가 만물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염원을 상징화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만다라의 재해석을 통해 내 머릿속에 나열되어 있는 생각들을 시각화를 시킴으로써 내가 갈망하는 미지의 궁금증에 더 한발 짝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 전시에서의 작품들은 자기(自己: 내 마음의 중심), 원형(原形: 본디의 모양), 합일(合一: 합하여 하나가 됨)를 테마로 하고 있으며, 제목에서 나타난 의미를 찾아가는 공통적 행위로는 끝없이 연결해나가는 선의 누적으로 형성되는 원의 형태이다. 이 원은 완전함의 상징이며, 비어있지만 가득 찬 역설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원이 모든 존재의 이유가 되는 절대적인 것이라면 인간은 이 미지의 절대적인 것(혹은 원리)에 좀 더 다가가고자 한다. 그 과정의 끝은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고 자연의 원형을 이해하며, 이와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그 과정의 모습을 인체를 상징하는 토루소의 형상을 통해 재현하였으며, 원의 형상과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표현함으로써 모든 만물이 합일되어진다는 암시를 드러내고자 했다. ■ 최진하
Vol.20170103c | Numinous - 신성함의 연극성 · 중심의 그곳, 만다라-강지수_최진하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