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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강원도_강원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2:00pm~04:00pm
장은선갤러리 JANGEUNSU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3-8(경운동 66-11번지) Tel. +82.(0)2.730.3533 www.galleryjang.com blog.naver.com/jang_gallery
작가는 「Litttle things」 시리즈에서 온갖 종류의 유리병을 수집하여 그 안에 작은 모형과 오브제들을 넣어 각각의 개성으로 빛나는 우주를 연출했다. 자신의 손이 행했지만, 그것들이 왜 한 한 자리에 모여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것들은 작가 스스로에게도 끝없는 해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발신자가 정해놓은 하나의 메시지가 아무런 손상 없이 수신자에게 전달되리라는 이상이 있지만, 그러한 투명한 소통에의 이상은 예술로서는 반쪽만의 승리다. 수집된 사물들로 연출되는 이덕용은 최근작품은 가식이 되기 쉬운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편에 선다. 무의식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세계지만, 자세히 보면 각자 다르게 해석될 겹겹의 이야기가 깔려있다.
작은 아이디어를 뻥 튀기고 잘 가다듬어서 상품가치가 높은 멋진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크게 서있는 작품으로 조각가로서의 솜씨를 널리 뽐내야 하는 것 아닌가. 자고로 조각다운 조각이라 함은 자연계를 지배하는 인간의 기념비적인 형상과 그 변주 아닌가. 그러나 이덕용이 요즘 몰두하는 「Litttle things」 시리즈는 기념비적으로 서있기는커녕, 눈에 잘 안 띄어 깔아뭉개질 수도 있는 취약한 것들이다. 손안에 들어 올만큼 작은 형태들이 유리병들에 담겨 눈에 띄지 않게 세상에 흩뿌려지는 방식은 전형적인 조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조각에서 금기시 되어있는 알록달록한 색채들은 작은 크기와 맞물려 장식적 효과까지 자아낸다.
전형적인 조각 작업이 열심히 할수록 작업실만 좁아지는 한계를 느낀 이덕용은 작업 환경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작업, 특히 구체적인 물질을 다루는 조각 작업에는 불가피하게 노동의 측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어느 순간 노동에 끌려 다니다 보면 작업의 지속가능성 자체가 불투명해진다. 노동 강도가 너무 세서 뚝뚝 끊길 수도 있는 작업과정은 끝없는 몰입으로 변모했다. 특히 얼마간의 사회적 경험을 통해서, 생산성을 위해 전문적으로 분화된 작업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게 됐다. 「Litttle things」 시리즈는 그림으로 친다면 대작에의 강박 관념 없이 가볍게 수행한 드로잉 같은 작품이다. 이 작업을 위한 사전 드로잉은 존재하지 않는다. 드로잉 같은 방식은 이후의 복잡한 마무리 작업에서 사라지는 발상 단계의 신선한 측면이 오롯이 보존될 수 있다.
그래서 현대미술에서는 드로잉이 그자체로 작품으로 인정받기도 하며, 늘 작품의 완성된 뒤에 도착할 수밖에 없는 연구자에게는 '완성작'만큼이나 귀중한 가치를 갖곤 한다. 드로잉이 순차적으로 정해진 페이지 위에 생각나는 대로 그려지는 것이듯, 이덕용은 조각적 차원의 드로잉을 위해 유리병을 선택했다. 수집된 병,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이라는 구성요소가 정해진 후, 작가는 그 규칙대로 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은 책상 위에서도 할 수 있다. 물론 책상 위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 책상머리에서 생각만 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의 스튜디오 안에는 이러한 미시세계의 연출을 위해 수집해온 수많은 오브제들이 널려있다. 깔판이나 인조 잔디같이 오밀조밀한 질감을 가지는 건축 모델용 재료들은 기본이고, 작은 생활용품부터 이런저런 자연물까지 종류별로 늘어놓고 화가가 물감을 선택해서 섞어 원하는 색을 만들 듯이 그렇게 각자의 색깔로 빛나는 소우주를 건설한다.
마치 초현실주의자의 자동기술법처럼, 오브제들은 '손에 닿는 대로' 선택되어 잘려진 병에 들어가 각각의 이야기를 만든다. 이덕용의 새로운 작업이 다소간 무작위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초현실주의자들의 발견된 오브제나 꼴라주, 자동기술법이 완전한 무의식의 결과는 아니듯이--초현실주의자들의 프로이트에 대한 짝사랑과 달리, 프로이트는 그들의 작품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그의 작품도 얼마간 그의 취향이나 조각가로서의 훈련 등이 배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업의 시작은 '우연적'이었다. 유럽에 갔을 때 사온 작은 모형을 수년간 작업 테이블의 한켠에 붙여 놓았다가 불현 듯 선택한 것이다. 무의식의 창고에 뒤죽박죽 쌓여있는 사물들은 어느 순간 각별하게 다가오고 작품으로 길어 올려 진다. 전혀 새로운 것이 당장에 작품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피상적인 소재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소재주의에 불과한 한 100개가 넘는 세계들로 증식될 수도 없다. 내 곁에 있다가 나의 일부가 된 후 그것들은 나로부터 나온다. 내 안에 있지 않은 것이 나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 예술작품은 작가의 민낯이며 맨몸이다. 그게 아니라면 작가들이 그들의 작품에 그렇게 애착을 가지는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바깥에서의 전시는 작가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발견적 가치를 준다. 작가는 '무심히 길을 걷다 문득 날 올려다보는 손톱만한 인간을 발견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하는 생각을 했다. 가령 거리의 볼라르같은 구조물 위에 어떤 작은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은 놀라움을 줄 것이다. 그것은 갑작스런 만남을,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질 해석의 순환 고리를 야기한다. 선재하는 하나의 메시지는 없다. 설령 그것이 있다 해도 다양한 맥락에 의해 달리 말해질 것이다. 그것은 화이트 큐브라는 중성적 공간이 아니라, 삶의 굴곡 면을 따라 배치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이선영
Vol.20161221f | 이덕용展 / LEEDEOKYONG / 李德庸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