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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8기 입주작가 릴레이전展 & 오픈스튜디오 The 8th Artists-in-Residence of Yeongcheon Art Studio Relay Exhibition & Open Studio Part1-허지안_노기훈展 / 2016_1208 ▶ 2016_1212 Part2-정혜민_김수진展 / 2016_1214 ▶ 2016_1218 Part3-최경진_김교진展 / 2016_1220 ▶ 2016_1224 Part4-조미향_송미진展 / 2016_1228 ▶ 2017_0101
관람시간 / 10:00am~07:00pm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YEONGCHEON ART STUDIO 경북 영천시 왕평길 38(교촌동 298-9번지) Tel. +82.54.330.6062 bbmisulmaeul.yc.go.kr
□ 허지안展 / 세상의 빛 LUX MUNDI 자연과 정신에 편재하는 빛 ● 허지안의 최근 몇 년간의 개인전은 색들이 전면에 나와 있다. 『with color』(2009) 『talk in colors』(2014) 『echo of colors』(2015)라는 전시부제들은 그녀의 작품 속 색의 위상을 알려준다. 그 사이에 있었던 『감각의 기억』(2013)전은 색이 키워드로 나와 있지 않지만, 전시 작품의 면면은 색에 대한 감각의 기억이라 할만하다. 여기에서도 추상적인 구조를 통과하는 색이 주도하기 때문이다. 허지안의 작품에서 추상적인 구조들은 창들을 연상시킨다. 그것들은 그림이라는 창속의 또 다른 창들이다. 그것들은 때로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하기도 한다. 이번 영천 스튜디오에서의 전시 『세상의 빛』(Lux Mundi)은 색이 빛으로 승화한다. 이전 작품에서도 색은 빛으로 충전되어 있었지만, 최근 작품에서 색 속의 빛은 전면화 된다. 색은 창처럼 보이는 구조들과 그 사이에서 비쳐 나오는 빛처럼 제시된다. 구조들 안팎으로 나란히 또는 자유롭게 떠있는 색은 이 세상에 편재하는 빛을 표현한다. 빛으로 충만한 자연은 온 생명에게는 축복의 상황을 말한다. 색들은 대개 따스하고 화사하며, 생명의 온기로 가득하다. 작품 속에 충전된 색의 기운들은 계절로 치면 울긋불긋한 봄 같다. 그러나 단순한 자연 예찬은 아니다. 명시적/암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뾰족한 지붕이나 작은 창문들로부터 시작된 사각 형태들은 정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면모를 드러낸다. 빛으로 화한 색과 형태는 세상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춰준다. 산란하는 빛의 입자처럼 보이는 둥그스름한 형태들은 사각 형태들과 함께 어우러져 마치 세포 속까지 들어찬 빛 에너지를 표현한다. 그것은 내부로부터 발산되는 빛이다. 허지안의 작품에서 빛은 상징적 우주의 여러 차원을 횡단하며 비춰진다. 화면에 떠있는 것들은 사각형과 원을 원형으로 하여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는 동질이상(同質異像)의 것들이다. 그것들은 추상적이지만 원근감을 가지고 있다. 크거나 밝은 것은 앞쪽에 있는 것이다.
사각형태가 내부로부터의 발산력이나 반사력이 강화되면 모서리가 둥글려지면서 다양한 도형으로 변화될 것이다. 작품에 퍼져있는 사각형과 그 변주들은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뾰족 지붕의 구조와 연관되어 빛이 쏟아지는 창이 된다. 그것들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처럼 빛이 색을 입은 상태다. 전시부제 『세상의 빛』(Lux Mundi)은 예수가 한 말인 'Ego sum lux mundi'(나는 세상의 빛이다)와 관련된다. 신이 빛이라면 작품 속 빛 또한 그러하다. '세상의 빛'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화이트가 많이 들어간 색들을 썼다. 화이트는 빛들을 섞을 때 나오는 색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금색, 은색, 형광색 같이 직접적으로 빛의 느낌을 주는 자체 발광적 색도 있다. 이러한 색들은 소리나 빛이 공간에 퍼지는 느낌으로 배열된다. 특히 소리와 색의 공감각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노래한 마태 수난곡과 관련된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 허지안의 작품에서 빛은 특정 시점이 아니라, 이미 사방팔방으로 쏟아져 나온 상태이다. 빛을 상징하는 화이트는 틈 사이로 비춰지다가 올해 작품에서 전면화 된다. 창들은 확 열려졌다. 빛에 대한 관심은 언덕 위에 있는 창작스튜디오에서 볼 수 있는 별빛과도 관계되지만, 이러한 시각적 상황은 상징으로 전화된다. 가령 성당을 상징하는 뾰족 지붕들 안팎으로 배치된 창들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종교적 울림을 준다. 작품들에는 카톨릭을 모태종교로 가진 작가가 최근 수년간 매일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다녔던 체험이 녹아있다. 종교적 세계관에서 빛은 세상의 탄생과 함께한다.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는 천지창조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밤에는 낮과는 다른 빛이 존재한다. 장 베르동은 『중세의 밤』에서, 밤이 되면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좀 더 잘 포착할 수 있다고 하면서, 유태 기독교 전통에서 인간이 신과 만나는 때는 바로 이때라고 말한다. 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조를 가리키지만, 세상이 죄에 의해 어두워졌을 때 영혼은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찾아 나선다. 신앙의 시대인 중세는 빛이 높이 평가되었다. 『중세의 밤』에 의하면 중세는 인간의 밤이 신의 빛으로 밝혀지고 있었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면 신은 순수한 상태의 빛이다. 이상적인 빛에 이를 수 없었던 중세인들은 빛과 대립하는 어둠을 줄이려고 애썼다. 고딕양식은 수직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빛의 명암대비 효과를 노리는 뤼미니즘(luminism)을 추구한다. 중세인들은 대성당처럼 높은 창으로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것을 선호했으며, 밤을 늦게 찾아오게 하는 귀한 유리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허지안의 작품에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대한 감수성은 지고한 실재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성스러운 장소와 연관된다. 빛이 쏟아지는 성당이 있는 그림들은 종교적 체험을 추체험하는 과정으로서의 작업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빛은 조형적 요소이면서 상징이다.
종교를 포함한 형이상학적 사고에서 빛은 진리의 출현을 상징한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빛이라는 개념은 원래 이원론적 세계관에 속했다고 말한다. 절대적 타자인 신은 인간과 구별되는 것이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진리는 존재 자체에 비춰지는 빛이며, 빛으로서의 존재이다. 그는 플라톤의 동굴비유를 든다. 거기에는 존재의 빛으로서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으로 형상화되는 선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선은 다른 모든 것들에 가시성과 대상성을 부여하지만, 그것 자체로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빛은 그것이 가시적이게 한 것들을 통해서만 보여 질 수 있다. 즉 빛의 은유는 이미 그 안에 빛의 형이상학을 함축하며, 진리는 초월에서 자신의 장소를 얻게 된다. 허지안의 작품에서 빛 뿐 아니라 하늘을 향하는 뾰족한 지붕, 그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보게 하는 창 등의 비유는 초월적 기미를 띠고 있다. 세상 속 인간에게 초월이란 곧 초월에의 의지나 욕망을 말한다. 일상에 속하기보다 일상과 평행한 존재인 예술은 이러한 초월적 의지와 관련된 것일 수 있다. 예술 뿐 아니라 종교의 힘에 의지해 이겨낸 삶의 고난들은 초월을 단순한 정신의 유희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 허지안의 작품에서 색을 포함한 풍부한 상징을 담고 있는 빛은 부분적이지 않고 편재한다. 이러한 편재성은 단순히 추상적인 화면의 특성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추상은 참조대상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명암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추상예술은 조형언어의 자율화에 큰 걸음을 내디뎠지만, 그 초창기 역사를 보면 종말론에서 신지학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그리스 종교에는 자연신이 풍부하게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의 신은 없음을 말하면서, 그것은 빛이 신으로 포착되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빛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이 존재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즉 편재(omnipresence)한다.
그러나 신화적, 종교적 사고는 결국 근대적 사고에 자리를 내준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의하면 계몽(enlightenment)과 함께 빛은 행해져야할 대상의 영역 쪽으로 비춰진다. 근대의 계몽주의 또한 빛의 은유가 있었지만, 이제 진리가 스스로 빛을 발하면서 침투한다는 생각은 변화한다. 이제 진리는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근대의 극적인 명암법은 이러한 사고의 변화에 기초한다. 특히 전기의 발명 이후 인공적인 빛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 그대로 편재하게 되었다. 빛은 길들여지고 통제되었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의하면 베이컨과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방법의 이념에서 빛은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사고된다. 시점(원근법)의 제약성 및 이에 대한 의식, 나아가서 이 시점 선택의 자유가 이제부터는 본다는 개념을 규정한다. 근대의 과학사 뿐 아니라 미술사 역시 만물을 지배하는 매체로서의 빛이 목표가 정해져서 주사되는 조명으로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 근대에 빛은 재현되어야할 대상을 확증하는 어떤 국부적인 요소로 변모된 것이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이 연출했던 극적인 명암법은 항상 자연적인 상태로서의 어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의도적으로 목표하는 빛의 가능성인 조명(illumination)은 인공적인 빛을 강조한다. 이러한 빛의 조작은 주위를 둘러보는 자유를 배제시키며 강제적인 시각이 지배하는 상황을 만든다.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은 시선의 고정, 시각의 조립이 지배하는 근대 세계는 그 구조상 다시금 동굴과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조명이라는 기술적인 빛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인간으로부터 타자적인 시각을 추방한다면, 그 인간은 고대의 저 '하늘을 명상하는 자'와 그가 갖고 있던 관조의 자유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추상적인 패턴처럼, 때로는 풍경처럼 보이는 허지안의 작품에는 국부적인 빛이 아니라, 편재하는 빛을 표현한다. 그것은 많은 진보와 더불어 많은 퇴보도 낳았던 근대에 대한 반작용을 말한다. 작가는 그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 진리의 자연적인 발산력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빛의 탄생처럼 세상이 시작되었던 순간의 신선함을 되찾고 싶은 것이다. ■ 이선영
□ 노기훈_묵독 Silent Reading 푸석한 사진 사이로 스며드는 시선 : 노기훈의 사진 ● 노기훈은 근대화 이후 한국사회에 유물처럼 남아있고 또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어떤 현상들을 작업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풀어놓는다. 민주화 이후 하나의 관성처럼 작동하는 '집회'라는 행사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미장센」 시리즈), 근대화의 출발점인 지하철 1호선 주변의 풍경에서 근대화의 흔적을 관찰(「1호선」 시리즈)한다. 또한 지금은 작가의 고향이자 한때 산업화의 전초기지였던 구미의 오늘날을 고향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들 세 작업에는 모두 인물이 주 피사체로 등장하지만, 관객은 프레임 속 인물의 모습보다는 이들이 속한 풍경에 먼저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 특유의 푸석한 이미지들은 그가 보여주고픈 것이 인물도, 풍경도 아니라는 점을 지시한다. 결국 노기훈이 작품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사진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업을 구상하고 진행하며 느낀 자신의 심상이다. 덕분에 이들 세 작업은 얼핏 하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뻗어나온 가지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 「미장센」 시리즈는 2009년 6월 노무현 대통령 추모집회부터 2013년 12월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까지 어떤 정치적 성향이나 목적을 가리지 않고 서울 곳곳의 광장에서 열렸던 집회 풍경을 대형카메라로 기록한다. 서울지방경찰청 홈페이지에서 얻은 집회 정보-장소, 인원, 시간만이 명시된-를 기준으로 자신이 촬영하려는 집회가 어떤 행사인지조차 알지 못한 상태에서 광장으로 향한 작가는 사전에 통보된 집회 시간만큼만 필름에 노출을 주어 사진을 찍는다. 짧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3~4시간까지 이어지는 집회 시간동안 열린 셔터는 집회 참가자와 단체에 대한 단서를 무심하게 흩날려 버린다. 이 작업은 마치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집회시간동안 광장을 바라보는 작가 자신에 대한 기록으로 존재한다. 이런 지점에서 장노출은 퍼포먼스의 기록을 위한 도구로만 남는다. (이러한 퍼포먼스적 요소는 작가의 다른 작업에서도 이어지는 특징이다.) 덕분에 관객은 각각의 작품에 붙은 캡션과 홀로 선명하게 남은 집회 장소에 대한 정보만을 기준으로 해당 집회의 성격과 내용을 유추한다. 하지만 각각의 사진에 숨은 집회의 내용을 애써 알아채려고 하는 것 역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이번 작업을 통해 던지는 물음은 집회의 내용이나 정치적 성향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행사의 무대가 되는 광장과 그저 흔적으로만 남은 집회 참가자들의 모습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노기훈은 실제 집회나 시위가 제 기능을 발휘했던 민주화 시기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집회를 두루 관찰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시민과 단체들이 이미 그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딱히 대안을 찾지 못하고 여전히 집회라는 형식만 '최후의 보루'처럼 고수할 수밖에 없는 실상을 목격한다. 집회의 목적과 방향성이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진 않지만 '연대'라는 흐릿한 관성으로 자리를 지키거나 혹은 어떤 집회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집회를 위한 집회'를 위해 동원돼 공허한 외침만을 반복하는 무력한 군중의 모습은 그들이 점유한 광장에 비하면 한없이 가볍고 일시적인 현상으로 작가의 카메라에 비춰진다. 그중에서도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철제 설치물에 서로 등을 마주하고 걸려있는 두 쌍의 사진은 작가의 건조한 시선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2012년 대선 전날(12월 18일)과 몇 달 후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던 2013년 2월 25일 광화문 광장의 풍경, 그리고 2011년 한나라당, 2012년 통합진보당 당사 앞 집회 모습은 정치•사회적인 시선과 그곳의 사람들을 지워내고 '집회'라는 현상 자체만을 조명한다. 이처럼 같은 장소의 사뭇 다른 모습이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두 장소의 유사한 풍경은 집회가 열리는 '광장'이라는 공간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 '미장센'이 한국사회의 광장이 소비되는 방식을 외부의 시선으로 덤덤하게 보여줬다면, '1호선'은 좀 더 적극적으로 작가 자신의 관점을 드러낸다. 이러한 차이는 작품 자체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미장센」의 작품들은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고, 또한 '(그 성격과 관계없이)집회'를 찍었다는 것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호선'을 구성하는 사진들에서는 쉽사리 그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몇몇 사진에서 1호선 역사가 등장하지만, 비중은 크지 않다. 작품 바깥의 캡션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곳이 어느 역 근처인지 알아낼 수 있는데, 결국 관객이 볼 수 있는 건 '1호선 주변의 어떤 분위기'일 뿐이다. 물리적인 '1호선'이 그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작품은 더욱 모호해지지만, 그 앞에 선 관객은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업을 선보였는지 좀 더 고민하게 된다. 결국 '1호선'은 작가 개인의 시선이 전면에 드러난 '1호선 관찰기'처럼 작동한다. 동인천에서 노량진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만큼이나 오래된 지하철 1호선의 역사는 그 자체로 무엇을 말하진 않지만, 선로 주변으로 이어지는 1호선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인천에서 서울로 향할수록 조금씩 다르게 존재한다. 작가는 한 덩어리로 묶이면서도 각기 다르게 존재하는 '1호선'을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분류한다. 이는 어떤 결과를 상정하고 시작할 수 없으므로 계획없이 떠나는 모험에 가깝다.
이처럼 어떤 '모험'을 상정하는 작업의 경우, 촬영 과정에서 작가 자신도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덕분에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재빠르게 촬영할 수 있는 소형 카메라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노기훈은 굳이 대형 카메라와 대형 삼각대를 짊어지고 '1호선' 시리즈를 진행했다. 촬영 준비에만 10여 분이 소요되는 대형 카메라의 특성상, 순간적인 장면을 포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대형카메라는 주로 작품 자체의 조형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선택되지만, 노기훈의 사진은 대형 카메라를 사용한 것 치고는 너무나 푸석하다. 그렇다면 결국 그는 대형 카메라의 장점도 활용하지 않으면서, 그 단점만 극대화되는 작업방식을 택한 것인가? 이와 관련해 노기훈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사진이 테크닉면에서 잘 찍은 것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이어서 자신이 대형 카메라를 사용하는 건 '최대한 힘을 빼고' 싶었기 때문이라 밝힌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작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피사체의 '힘'일 것이다. DSLR로 사진을 찍힐 때와 스마트폰으로 찍힐 때 피사체(모델)의 태도가 다르다는 걸 생각하면, 더군다나 영화에서나 본 듯한 대형 카메라 앞에 세워진 이들이 평소보다 위축될 것은 확실해 보인다. 옷매무새를 좀 더 다듬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이처럼 보다 큰 카메라는 대상을 보다 더 주눅들게 만든다. 그렇게 힘이 빠져버린 피사체를 담은 사진은 인물이 중심에 등장하더라도 초상사진이 아닌, 풍경사진처럼 작동한다. 이는 촬영과정뿐 아니라 결과물에도 적용된다. 피사체의 힘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작가의 시선이 빼곡하게 채워진다. ● 이런 맥락에서 '1호선' 시리즈를 선보인 두 번의 전시인 『1호선』(KT&G 상상마당 갤러리, 2016)과 『사진미래색』(고은사진미술관, 2016)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1호선'시리즈를 보여줬다는 점은 흥미롭다.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1호선』은 지하철 1호선 자체의 맥락보다 작품의 이미지에 집중했다. 여기에는 전시장과 전시의 성격(수상자전)이 갖는 조건들도 작용했을 테다. 하지만 노기훈은 전시가 서울에서 열렸다는 측면에서 전시장을 찾은 관객 각자가 경험한 나름의 '1호선'이 존재할 것으로 상정했다고 말한다. 서울 전시에서 '1호선'시리즈는 '노기훈이 본 1호선'이라는 하나의 레이어로 제시되면서, 관객은 평소 자신이 경험했던 1호선의 인상을 여기에 겹쳐보는 방식이라면, (역시 수상자전이긴 하지만) 부산에서 열린 『사진미래색』에서 '1호선'은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지하철 1호선'을 부산으로 옮겨온다. 서울의 관객과 부산의 관객이 느낄 지하철 1호선의 거리감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1호선 역이 표기된 인천-서울 지역 지도와 함께 디스플레이된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1호선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부산 관객에게 인천-서울을 잇는 하나의 선으로써 '1호선'이 갖는 의미를 전달하고, 이를 기반으로 '노기훈이 본 1호선'을 다시 살펴보게끔 한다. 덕분에 두 전시에서의 '1호선'은 미묘하게 다른 의미로 작동하며 이는 그의 다른 작업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부산 전시에서의 '1호선'은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시선이 투영됐다는 점에서 '미장센'의 연장선상에 놓인다면, 작가 개인의 시점을 강조한 서울 개인전에서의 '1호선'은 '구미'시리즈와 가깝게 자리한다. ● 이제 노기훈의 시선은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구미'시리즈를 향한다. 인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수평적 공간인 1호선과 '위에서 내리 꽂아' 탄생한, 서울로 '올라가려는' 욕망이 여전히 존재하는 수직적 공간인 구미는 어떤 지점에서 교차할 수 있을까. ■ 이기원
*본 원고의 일부는 『월간 포토닷』 2015년 12월호에 실린 「미장센」 리뷰(흩날리는 풍경을 파고드는 경계인의 시선)를 정리하고 덧붙였음을 밝힙니다.
Vol.20161208c |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8기 입주작가 릴레이展 & 오픈스튜디오 Part1-허지안_노기훈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