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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연 홈페이지_yyy1228.egloos.com
초대일시 / 2016_112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7길 12(옥인동 62번지) 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 누군가는 우리가 불신이 팽배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우리가 맹신이 창궐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당신을 지그시 응시하는 저 사람이 벗인지 적인지 도무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당신에게 다가서는 여러 손들은 당신을 어루만지려는 것도 같고 당신을 낚아채려는 것도 같다. 각종 매체는 누구든 각광받는 스타가 되어 갈채를 받을 수 있다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사나운 눈초리를 희번덕거리는 온갖 감시 시스템은 누구든 범죄자가 되어 색출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당신을 비추는 저 불빛은 영광의 스포트라이트인지 추궁의 서치라이트인지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기자니 그곳이 안온한 도피처인지 망각과 낙오의 심연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이 맹위를 떨치는 시대에 우리 모두는 쇼윈도에 전시된 상품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흠모와 매혹의 대상으로 격상할지 혐오와 공포의 대상으로 전락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길함과 흉함이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태가 오늘날 당신이 처한 상태이다. 요컨대 이곳은 과잉과 결핍이 서로 화학적으로 뒤섞여 균형을 이루는 데 실패한, 단지 물리적으로 뒤엉켜 있을 뿐인 불확실성의 도가니다. 이것이 양유연이 바라본 세계의 모습이다. ● 이 극단적인 불확실성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양유연은 기존의 작업과 다른 여러 형식상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먼저 그가 그리는 종이의 변화를 들 수 있다. 한동안 장지만을 고집하며 회화를 그려온 양유연은 최근 몇몇 작품을 순지에 그리기 시작했다. 두껍고 질긴 장지보다 얇고 연한 순지가 때때로 그의 착상을 실현하기에 더 유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지가 그 위에 옅은 채도의 물감을 수차례 쌓아올려 두터운 화면의 질감을 만들어내기에 적합한 종이라면, 장지보다 더 흡수력이 강한 순지는 그 밑에 물감을 끌어들이기에 더 적합한 종이이다. 순지에 내려앉은 물감은 종이의 표면을 가로질러 쉽사리 그 이면에까지 다다른다. 그리하여 순지에 가닿는 붓질은 종이의 표면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까지 지나간 흔적을 남긴다. 순지의 이런 특징을 염두에 둔 양유연은 종이의 표면에 붓질을 하면서 그 이면의 효과를 기대한다. 또는 종이의 이면에 붓질을 하면서 그 표면의 효과를 기대한다고 말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표면과 이면의 구별이란 본질적이기는커녕 우연적이고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종이의 한쪽 면을 표면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다른 한쪽 면은 예외 없이 이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양유연이 순지의 표면과 이면을 모두 작업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표면과 이면의 작위적인 이분법이 불신과 맹신의 극단적인 이분법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표면과 이면의 구분이 순지를 뒤집는 순간 금세 뒤바뀌어 버리듯이, 맹신은 사소한 계기로 그 마음이 돌아서면 순식간에 혹독한 불신으로 바뀌어 버린다. 극단의 감정은 마치 종이를 뒤집듯 쉽사리 뒤바뀌는 것이다. 불신과 맹신이든, 매혹과 혐오이든, 낙관과 비관이든 상관없이, 어떤 감정의 과잉과 결핍은 그것이 모두 맹목적인 극단의 상태에 다다르면 서로 희한하게 닮게 된다. 지독한 어둠만큼이나 과도한 빛도 눈을 멀게 만드는 것이다. 양유연이 순지에 그린 회화에서도 역시 표면과 이면이 매우 닮아 있다. 다만 좌우가 반전되어 있고 붓질이 직접 닿은 면의 이미지가 다른 면의 그것보다 더 촘촘하고 뚜렷할 뿐이다. 두 이미지는 표면과 이면이라는 엄격한 대립관계를 형성하는 듯하지만 그 내용은 실상 매우 유사한 것이다. 그중 어느 면을 표면으로 삼느냐에 따라 다른 면은 과잉된 또는 결핍된 이면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과잉과 결핍의 양자택일적 기로 앞에서 우리는 성마른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 양유연은 이런 불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순지를 사용한 작품을 전시하는 형식에서도 변화를 꾀한다. 회화를 전시하는 전통적인 방식, 즉 회화를 벽에 밀착시켜 감상에 적당한 높이에 걸어 두는 방식에서 벗어나 전시장의 허공에 매달아 양면을 모두 노출시키는 방식을 시도한 것이다. 더불어 밝은 조명을 전시장 한편에 설치하여 이렇게 매달린 회화의 한쪽 면을 비춘다. 회화를 마치 조명 앞에 놓인 스크린처럼 설치한 것이다. 이렇듯 조명과 회화와 관객 사이의 복합적인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양유연은 원근법의 환영적인 삼차원이 아니라 전시공간이라는 실재적인 삼차원을 회화와 결합시킨다. 즉 관객이 적당한 위치에 서서 정면을 관조하는 회화가 아니라 실재로 공간을 이동하면서 모든 측면을 체험하는 회화를 연출한 것이다. 또한 이렇게 제시된 양유연의 스크린-회화는 얇고 연한 순지를 사용한 까닭에 불투명과 투명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 반투명의 속성을 띠게 된다. 빛의 반사와 투과가 뒤섞인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반투명의 회화는 표면과 이면의 불확실성을 배가시킨다. 조명의 이편과 저편 중 어느 곳에서 보이는 화면이 회화의 표면인가? 우리는 어느 곳에서 이 회화를 감상해야 하는가? 어느 면을 불신해야 하며 어느 면을 맹신해야 하는가? 이 정답 없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하릴없이 작품의 주위를 맴돌며 성마른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불확실성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오늘날 끊임없이 부정되고 소거되는 경험이다. 과열된 경쟁과 가속화된 시간으로 점철된 극단의 자본주의 사회는 신속하고 확실한 판단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무엇을 맹신할지 불신할지, 누구를 벗으로 여길지 적으로 여길지 순식간에 결정해야 하는 시대이다. 판단의 진정성은 나 몰라라 하는 시대이다. 일단은 불확실성 자체를 어떻게든 몰아내야 한다고 다그치는 시대이다. 불확실성을 그 자체로 응시하고 사유하는 것은 소외와 낙오로 전락하는 지름길이라고 을러대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이 광란의 질주를 되돌아볼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탈락한 불확실성의 세계를 다시금 소환해내는 것이 절실한 시대이다. ● 양유연의 지난 작업들에서 그가 소환해내던 것은 주로 특정한 대상의 불확실성이었다. 예컨대 위안과 위협을 동시에 가하는 듯한 보름달의 모습, 불확실한 의미를 띤 얼굴이나 손 등 신체의 부분을 클로즈업한 모습, 빛과 어둠 속에서 각기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공장의 굴뚝 등이 그러한 대상들이었다. 최근의 작업에 등장하는 마네킹의 낯선 모습도 역시 불확실성을 띤 특정한 대상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그의 회화의 배경은 대개 단일한 색조를 띤 단일한 방향의 붓질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았고 클로즈업된 신체의 부분이 등장할 때는 배경 자체가 거의 사라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물론 배경의 색조가 회화의 정서를 형성하는 데 어느 정도 일조하는 바가 있었겠지만, 대상에 들인 관심에 비해 배경의 회화적 역할이 상대적으로 미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몇몇 회화에서 그가 배경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 기존의 일관된 붓질과 달리 다양한 형태의 붓질이 시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뭉개진 붓질이나 다양한 방향의 붓질이 배경을 처리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배경이 대상 못지않게 고유한 회화적 존재감을 지니게 된 것이다. 화면에 묘사된 손의 흉터, 달의 무수한 분화구, 낡은 건물의 벗겨진 외벽만큼이나 배경의 공간도 자기만의 '살갗'을 지니게 된 것이다. 심지어 가장 최근에는 특정한 대상 없이 빛과 어둠만이 자리한 텅 빈 공간의 질감을 표현한 회화들도 시도되고 있다. 아마도 이런 변화는 양유연이 소환해내는 불확실성이 단지 특정한 대상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공간과 환경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요컨대 불신과 맹신, 벗과 적, 빛과 어둠, 서치라이트와 스포트라이트, 매혹과 혐오 등 양유연의 회화를 가로지르는 이분법적 대상들은 외관상으로는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떤 공통점을 지닌다. 그것은 그 양편이 모두 극단의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불신과 맹신은 모두 사태의 진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버리는 태도이며, 벗과 적의 이분법은 결국 무조건적인 배타성으로 귀결될 뿐이고, 눈부신 빛과 냉정한 어둠은 모두 눈앞의 현상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림막이다. 하나의 극단은 언제나 또 다른 극단과 직접적으로 통하는 법이어서 맹신은 쉽사리 불신으로 돌변하며 벗이 적이 되어 버리는 것도 한순간의 일이다. 갈채와 매도만이 허락된 세계에서 모두가 끊임없이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극단적 이분법이 야기하는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상품자본주의의 논리는 역설적이게도 매 순간 더욱 더 민첩하고 확실한 판단을 강요한다. 이처럼 가속화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심지어 불확실성을 불확실성으로 받아들일 시간적 여유마저 박탈당한다. 이로 인한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 어느새 우리의 모습은 영혼을 잃어버린 허수아비의 그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인간 같은 마네킹과 마네킹 같은 인간이 한데 뒤엉켜 버리게 되는 것이다. 양유연의 회화는 이 극단의 아수라장을, 불확실성의 폐허를 집요하게 형상화한다. 강요된 판단을 애써 중지시키고 피로사회의 불확실성을 그 자체로 응시하고 사유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황폐한 영혼을 일깨우는 질문을 던지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 김홍기
Vol.20161124e | 양유연展 / YANGYOOYUN / 楊裕然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