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6_1126_토요일_06:00pm
* 관람료는 무료, 단 자율적으로 조의금 받음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막사(플레이스막) MAKSA(placeMAK)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198 동진시장 내 Tel. +82.17.219.8185 www.placemak.com www.facebook.com/placemak
당신은 스스로 요단강을 건너본 적이 있는가. ● 본 서문을 위해 지난 수개월 간, 거의 매일 신건우 작가를 만나 수없이 이야기해왔다. 그렇기에 문장 은 졸렬하고 절반은 훌륭한 철학자들과 후학들의 문구를 발췌하여 조립해놓은 수준에 지나지 않을지 언정 그의 세계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다. 관찰해 본 결 과, 신건우는 기본적으로 직관적인 세계가 즉흥적으로 흡수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자신 안에 예술가 적 폭발력과 게으름이라는 인간 본연의 욕구를, 그리고 겸손함과 오만방자함을 절묘하게 병존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자살욕구 따위는 없다. 간헐적으로 자신에게 스스로 망치질 하려는 조각상 같았다. 특이한 정신세계와 기성 사회문화를 씨름시키듯 살고 있다. '셀프장례'는 그렇게 도출 되었다. 그렇다. 누구라도 "지금까지의 나 자신을 죽이는 퍼포먼스"임은 즉흥적으로 알아챘을 것이다. 작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노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래의 이야기는 사족으로 치부해도 좋다. 그러나 신 작가에 대해 좀 더 애정과 관심을 갖고자 한다면 한 번 들어보시라.
'셀프장례'를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고령화 사회의 슬픈 단면'이라는 수식과 함께 최근 일본에서 유행 하는 '웰 다잉well-dying' 운동 따위가 먼저 나올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참으로 무거운 의미를 지닌 행동 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티스트'라는 명찰을 떼고 보면 현재 혼자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젊 은이들 중 한 명인 신건우 작가에게도 그러한 세태가 아주 남의 말은 아닐 것이다. 전시장을 자신의 방처럼 꾸며 놓은 것 역시 현세에서의 필연적 종착점인 죽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 는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더 나아가 죽지 않은 작가에게 전시에 방문한 불특정 다수가 실제 장례식장에서처럼 방명록을 쓰고 부조금扶助金을 내는 행위는 이 땅의 죽어가는 아티스트들에게 진정한 공적 부조公的 扶助를 해주는 상징적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 여기에 신건우의 '셀프장례'가 갖는 철학적 방향은 현세에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얻는다는 분절점으로서, 기존의 실존주의에 대한 대중적 실천이기도 하다.
먼저, "현대적 의미에서 '실존'의 모습을 처음으로 획기적인 신선함을 가지고 조명한 20세기 철학계의 금자탑적인 저작"이라는 평을 받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이 노린 것은 현존재의 본질적인 실존론적 구조의 해명이었다. 이 시도의 수행에 있어 하이데거는 '현상학現象學'의 방법을 취한다. 현상학이란, "나를 가리키는 것을, 그것이 그 자신의 편에서 나를 가리키는 대로 보이 도록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현존성의 실존이라는 존재양식을, 그것이 나를 가리키는 대 로의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 시도되었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 의 현상학"이고, 그리고도 그때에 실존에 달라붙는 잘못된 편견이나 속견, 즉 잘못된 존재이해를 파괴 하여, 그 현존성에 자기의 존재구조나 존재의미의 본래의 내실이 "고지되는" 방식으로 해명의 순서가 진행된다. 이 때 현존성은 특히 세상 일반의 불특정 사람들의 생각이나 생활 방식에 좌우되면서 살고 본래의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 현존재는 본래의 자기의 적나라한 세계내 존재로 되돌아 가보면, 알지 못한 채 내던져진, 그리고 자기의 존재방식을 자기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피투적 기투被投的 企投 의 존재에 직면하여, "불안"의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고,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실은 퇴락의 방식 속 으로 도피하여 산다는 것이다. 이 퇴락의 방식을 '비본래성'이라고 부르고 이것으로부터 자기를 되찾 아야 '본래성'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본래성은 어떻게 하여 실제로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 사 람은 누구나 죽는다. 이 "죽음"이야말로 절대로 타인이 대신할 수 없는 각자의 실존에 가장 깊이 관련 되는, 추월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현존성이란, "죽음에의 존재"이다. 이 죽음이라는, 자기의 실존이 이제 불가능해지는 가능성으로 선구先驅해야만, 현존성의 '본래적인 전체 존재 가능'이 가능하게 된다. ● 그러나 사람은 이런 자신의 "죽음으로의 존재"를 '본래적 전체성'으로 이어받을 것을 싫어하고, 그것으 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한 비본래적인 도피를 타파하여 자기의 "본래적인 전체 존재 가능"을 이어받도록 촉구하는 것이 실은 '양심'의 소리인 것이다.(세계의 사상, 고영복, 사문연, 2002. 5. 20., 사회문화연구소 )
그런데 과연 이렇게 읽기에도 어려운 하이데거의 실존과 양심에 대한 호소를 삶의 실천, 예술적 표현 으로 옮겨보는 것은 쉬운 일일까. 신건우 작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남이 보면 답답할 정도로 양심적 이기 위해 노력하는 한 개인으로서, 그러나 예술적으로는 분명한 선을 긋고 싶어 하는 야심가로서 본 기획에 대해 무척 적극적인 작가다. 이는 이번 전시가 자신의 삶의 공간을 재현함과 동시에 현대적 디스플레이 방식을 활용한 현상학적 설치, 그리고 자신이 '하루, 그리고 하루'라는 '분절되면서 사실은 끊이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퍼포먼스로 구성되는 결과를 낳았다. 신 작가 는 방에서 이따금씩 TV를 통해 감정과 활력의 상태가 변화하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어떤 시간대에 는 스스로 오수를 취하기도 함으로써 '현존성'을 거부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하루에 한 번, 자신에게 절을 하며 디스플레이 속 자신이 자신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가 대표작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를 통해 소개한 바 있는 "자기에 있어 있는 '즉자존재卽自存在 en-soi'"와, "자기에 대하여 있는 '대자존재對自存在etre-pour-soi'"의 관계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건우가 자신의 생동하는 초상에 절을 하는 행위는 무의식적 관습에 따르는 전 통적 제의와는 다르다. 오히려 삶의 공간과 죽음을 맞이한 공간을 해체함으로써 예술(가)의 영생을 주장하는 무신론적 행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는 "지금까지의 나 자신을 죽였다."고 선언했다고 하여 자신이 그려온 세계를 스스로 평가절하하거나 부정하는 행위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오히려 "나는 어 차피 화가로 태어났으니 미추의 이분법 앞에 늘 앉아있는 것은 운명이다."라고 말하는 입버릇처럼 스 스로를 어떻게 계승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의지이기도 하다. 잊지 말라. 이 역시 그의 '작품'이다.
더 들어가 보자.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인간은 항상 하나의 무 때문에 자기의 본질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자 신을 되돌아본다고 하자. 분명히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가치관을 지녔던 사람임을 반성적으로 알 수 있다. 즉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존재를 수립한다. 그런데 이런 반성을 수행하고 있 다는 그 사실 때문에 반성되고 있는 존재는 이미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과 거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것을 관조하고 반성한다는 점은 이미 우리 의식이 이 존재로부터 분리 되어 있음을 뜻한다. 즉 의식은 이 존재가 현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렇다면 이 의식 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모든 존재와 거리를 두는 힘이라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고정된 본질을 지닌 존재도 이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 이 의식 자체는 아니므로, 이 의식은 아무 것도 아닌 것, 바로 '무le néant'이다. (철학의 숲, 서동욱, 2010. 8. 29., 네이버캐스트)
따라서 티저 영상에 등장한 묘령의 여인은 미망인일 수도 있고, 천사일 수도 있고, 유령일 수도 있지 만, 신건우라는 존재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신건우의 『셀프장례』가 단순 히 "죽어야 산다."의 역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임은 더욱 자명하다. 이번 전시가 모든 사람들의 삶에서 한 번씩 공감을 자아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것은 실존주의가 자기 부정을 통해 이따금씩 만나게 되는 허무주의가 사실은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오히려 커다란 효용성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반 문만으로도 기대해 볼 자격은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본 전시를 어떤 '퀄리티'라는 일차원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그럴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으리라 생각해본다. 신건우 작가는 지금 여기서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요단강을 건너본 적이 있는가. ■ 마틴 배런
Vol.20161112j | 신건우展 / SHINKEONWOO / 辛建友 / installation.perform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