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6_1103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1: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오 Gallery O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108 108호 Tel. +82.2.549.2891 www.gallery-o.co.kr
권력의 파사드를 허무는 지속적인 응시 - 무엇을 보다에 앞서 무엇인가를 묻다. ● 롤랑 바르뜨는 인간 얼굴의 고유한 분위기는 분해할 수 없는 것으로 얼굴이란 육체에 동반되는 눈부신 그림자라고 했다.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체에 본질적인 특징이 있어 다른 이미지나 존재와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 고유의 본질이 얼굴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바르뜨가 스치듯 언급한 이 문장은 퍽 공감이 된다. 그런데 왜 하필 눈부신 그림자라고 했을까? 상반된 의미 눈부신/그림자는 얼굴 자체가 존재를 규정하는 대단한 증거는 아니지만 쉽게 뗄 수 없는 명백한 육체(삶)의 증거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다. 얼굴에 관한 집요한 미적인 관심, 문학적인 쓰임새를 일일이 들추지 않아도, 얼굴은 모든 곳에 있다. 눈부신 그림자란 바로 이 얼굴에 권력의 표출구인 '시선'이 있다는 점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시선'의 문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양식에서 위치 해 왔다. 보는 것은 곧 인식하는 것으로 시선은 권력의 파사드처럼 그 힘의 주체를 드러내준다.
권성운의 신작은 배경 없이 프레임을 채우고 있는 사람 얼굴이다. 하지만 이 '얼굴들'은 구체적이지 않다. 아크릴 물감으로 안면 헤어 라인의 실루엣, 눈과 코와 입의 형태가 때로는 거칠게 표현된 작품들은 울고 웃고 생각에 잠기고 무표정하며 지치거나 희망에 차 있다. 어떤 작품은 얼굴인지도 분간하기 힘든 색, 면과 굵은 붓이 지나간 선 몇 개로 표현된다. 형광의 주황과 연두, 어두운 청색과 보라로 한정되어 사용되었으나 전체 시리즈로 보았을 때는 다양한 컬러감이 느껴지는 모호한 표정을 가진 이 얼굴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눈, 바로 시선이다. 속눈썹과 눈의 본체, 그리고 눈동자. 표정과 감정을 정확히 분간하기 힘든 이 얼굴들에서 감상자가 처음 시선을 두는 곳은 눈의 위치와 그 눈이 바라보는 곳,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표정일 것이다. 눈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어적 한계를 넘어 상대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렇다면 권성운 작품들의 눈, 시선은 어떤 것을 담아내고 있을까? 형태가 뭉개진 작품 속에서 애써 찾아낸 눈은 불균형하게 확대되어 있거나 두 눈동자는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거나, 그림자나 안경의 형태인 듯한 얼룩에 가려져 있거나, 아예 눈동자 없이 시선의 방향만 붓 선의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반짝이는 구슬처럼 생명이 차단된듯한 망막을 둘러싼 속눈썹과 밤하늘처럼 어두운 배경에 별처럼 흩뿌려진 물감의 현란한 색감까지 더해지면, 작품 속 시선은 인간적인 얼굴의 눈이라고 보기가 어려워지기까지 한다. 이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찾으려 해도 클로즈업된 얼굴들이 꽉 채운 프레임 바깥, 그들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바로 나이거나, 나는 볼 수 없는 따라서 알아낼 수 없는 무엇이다. 작품 속의 시선, 그 시선에 유착된 삶이 더 알고 싶어진다. 더 낮게 물러나 보자. 대상의 진실에 충분히 다가가려면 내 몸을 낮추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시선을 다시 얼굴로 확장해보면 이들의 집합은 놀랄 만큼 익숙한 면이 있다. 다름아닌 도시 속의 일상, 길을 걷다 혹은 붐비는 지하철 통로를 바삐 지나며 뜻 없이 바라보는 수많은 얼굴들이 권성운의 얼굴들에 겹쳐진다. 나름의 역사와 감정과 드라마를 품은 불특정의 수많은 얼굴들이 내 삶의 배경으로 스쳐 지날 때 나는 그들에게 어떠한 시선도 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의 얼굴도 너에게는 무의미한 배경으로 희석된다. 이 점을 깨닫는 순간, 권성운의 얼굴들은 익명이 아닌 각각의 역사, 무수한 '나'로 다가온다. 한 개인의 이름과 가족과 역사를 가진 얼굴로 돌아와 슬프고도 웃긴 나의 얼굴까지 마주 하게 된다. 바로 이 순간, 얼굴들은 동일한 선상에서 서로 바라보게 되며 그 시선들은 자연 그대로 우위가 없고 일치되어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모두 잃은 유태인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55)는 우리는 모두 타인의 얼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나와 타인 사이에 놓인 절대적이고 무한한 깊은 심연은 나와 다른 사람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한다. 그러나 지금도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없는 감추어진 존재인 타자가 나에게 '얼굴'로 나타날 때 나는 그의 소외와 고통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이며 섬겨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 책임은 나 개인의 주체적 자유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권성운의 '얼굴들'은 우리의 삶이 무심코 지나치는 타자들, 나와 무관하게 여기는 주목 받지 못하는 삶들을 얼굴 위로 주목시켜 그 '시선'과 마주하게 조용히 이끌고 있다. 작가의 앞 전시 '연결되어 살아간다'에서 모티브로 표현되었던 다양한 '표정'들은 이제 시선을 가진 얼굴로 구체화되었다. 이들은 40cmx30cm의 프레임과 뿌옇거나 줄이 간 유리 막 안에서 다양하게 재현되고 있지만 사실은 단 한번 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 바로 어느 한 인간의 총체적 삶이다. ● 따라서 권성운의 얼굴들은 절대적이고 바보 같고 더할 나위 없고 무디면서도 찌르는 듯 각인되는 우연한 인간, 바로 나의 모습인 것이다. 생명은 찢어질 수 없고 분해될 수 없는 상태로 흔들리며 삶의 모든 국면에 저항한다. 하나의 얼굴은 바라 보기, 보여지기가 동시에 가능한 눈부신 공간으로 빛과 그림자처럼 떼어 버릴 수 없는 영혼과 육신이 걷는 삶의 흔적을 담는다. 우리는 얼굴이 나의 '자아'를 제대로 표현해주기를 원하며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 무엇도 한 존재를 완벽하게 담아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권성운의 작품에서 알 수 있듯 타자가 그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담은 얼굴로 나에게 다가올 때 그 생명력 넘치는 희로애락의 파장에 우리는 흔들리게 된다. 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나라고 믿는 사람, 다른 사람이 나라고 믿어주기를 바라는 사람, 남이 나라고 믿는 사람이자 언제나 나 자신이 확실히 진짜가 아니라는 느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의 '시선'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으로 그 행렬은 앞뒤로 너무 길지 않아서 뒤에 선 사람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어 인간이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점점 더 드물게 만나고, 점점 더 드물게 얘기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프란츠 파농의 말처럼, 인간은 서로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인간을 못 알아보는 비극, 그 참사는 어쩌면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는 것인지 모른다. 작품 속 얼굴의 주체들이 타자인 나를 만나는 현실의 접합 지점에서 우리는 각자의 욕망에 따라 분출되고 분리되고 소외되고 결여된다. 작가 권성운이 지정한 프레임 안의 시선만 쫓아가면 나는 결국 나이거나 아무것도 아닌 허공에 던져진다. 다른 시선을 가져보자. 욕망의 접점을 응시하는 절대적 제 3자의 눈이 되어보자. 각기 다른 삶의 무게를 지고 일그러져 있는 면면들은 다름아닌 나의 육체에 동반된 눈부신 그림자, 부인할 수 없는 나 혹은 내 이웃의 얼굴이 아닌가? ● 권성운의 전시 [시선의 주체-작은 나라 작은 백성]에는 시선이 바라보는 대상이 없다. 짐작되는 단서 조차 남기지 않았다. 작가는 특유의 나지막하고 기쁨이 묻어나는 일관된 몸짓으로 그림자 같은 권력의 파사드를 허물고 단절시킨다. 그리하여 빛나야 할 부분을 프레임 안에 남겨 놓았다. 우리가 무엇인지 함께 응시하고 있다. ■ 윤정아
Vol.20161106c | 권성운展 / KWONSUNGWOON / 權星雲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