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E-아르케

이호영展 / LEEHOYOUNG / 李昊英 / photography   2016_1029 ▶ 2016_1111 / 월요일 휴관

이호영_ARCHE #02_C 프린트_80×190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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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1029_토요일_05:00pm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릴레이 개인展

관람시간 / 01:00pm~06:00pm / 월요일 휴관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777 RESIDENCE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03-1 3층 Tel. +82.31.8082.4246 changucchin.yangju.go.kr www.facebook.com/777yanju

이호영 개인전(2016. 10. 29)에 부쳐 ● 이호영은 2008년 개인전부터 2016년 지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자연의 생성과 소멸과정을 형상적으로 사유해 왔다. 그는 이를 위해 그 자신이 조성한 '압축적 자연'(이번에는 연기, 그 이전까지는 페인트를 이용. 페인트를 부은 넓은 바트에 다른 색의 페인트를 밑에서부터 호수를 통해 밀어 넣어 만든 페인트들 사이의 간섭 현상)을 매개로 성찰하면서, 노자(老子)가 자연의 행정에서 영감을 받아 자주 그랬듯, 이 가운데에서 자연 뿐만 아니라, 인간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 원리, 참된 원리를 찾아내려 하였다. 이 가운데 그가 탐구해 얻어낸 논리들은 각 전시의 주제 역할을 맡게 된다. ● 먼저 2008년의 전시 "Another E×istence of You"에서 이 자연의 생성소멸과정은, 시간의 흐름 가운데 끊임없이 미끄러져 나가는 한 실존의 변용에 대한 탐색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는 이와 같은 일종의 탈근대적인 존재론적 논리를 "Another E×istence of You"(또 다른 너의 존재)이란 제목 아래 호출하였다. 즉, 시간의 흐름 가운데 현존재는 영원히 고정된 실체로 존재할 수는 없고, 매 순간마다 다른 현존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하나의 흐름 속에 존재하기에 어떤 동일성도 그대로 지탱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시간적 흐름을 한 과정에 대한 몇 장의 시리즈 컷으로 형상화하였다. 한편 2011년의 개인전에서는 이 "압축적 자연과정"에서 특히 꽃이나 나비 등 동식물의 이미지에 가까운 것을 선택해 주제화하였고, 2012년 작업에서는 바로 "팽창과 분열, 터짐과 확산, 생장과 소멸"(박영택) 등의 사건 자체에 중점을 두고 이미지가 선택되었다. 2014년 개인전에서는 "규정과 무규정"이란 타이틀 아래 생성 소멸에 특히 시간적 계기들에 중점이 주어졌다. 즉 한 현존에서 다른 현존으로의 이행 사이에 존재하는 그 '사이'들이 의미 있게 다뤄지고 있었다. 이호영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유동성 그 자체로서의 존재의 무한한 변용과정을 장노출과 다중노출을 이용해 형상화한다. 이를 통해 '응고된 시간이미지'는 하나의 음악과 같은 색채 덩어리의 신비한 울림으로 전달된다. ● 그런데 그가 이토록 중요하게 다루는 실체의 시공간 내에서의 유동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시간적 흐름 가운데 실체는 어떻게 존재할까? 원래 실체는 그 자체가 원인으로 어떤 제3자에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그렇기에 시간과 공간의 규정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식에서는 눈앞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실체가 되고 만다. 그것은 눈앞의 경험적 대상이 지닌 관습적-사회적-정치적 권력 행사의 결과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험적인 것들에 복종하게 된다. 실체니까. 하지만 바꿔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사실상, 그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주어진 시간적 흐름가운데 변전하는 현존들만이 있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오로지 무한한 흐름만이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현존은 개념적으로 끊임없이 규정에서 무규정으로, 그리고 규정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2016년 초의 것 역시 이런 규정의 무규정으로, 무규정의 규정으로의 이행에 대한 탐구로 그는 이를 "사이"란 개념으로 형상화하면서 '유무 생성'의 내재적 이행관계를 사유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그의 형상적 사유는 자신이 직접 그 이름을 언급하든 안하든, 노자와 더불어 헤겔, 들뢰즈 등에 걸쳐 있는 현대철학사의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호영_ARCHE #03_C 프린트_80×130cm_2016
이호영_ARCHE #07_C 프린트_80×130cm_2016
이호영_ARCHE #09_C 프린트_80×130cm_2016

이와 같이 이호영은 근 10년을 끈질기게 한 주제를 천착해 왔다. 그것은 곧 자연의 생성과 발전 소멸에 대한 압축적 형상화였다. 그러나 이번 '새로운 전시'에서는 이런 그의 오랜 주제의 매개체가 바뀐다. 즉 페인트에서 연기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는 '작업실 밖의 자연 환경'에서 연기를 피워 이것의 생성, 소멸을 관찰하며 적절한 시점에서 이를 주변 환경과 함께 형상화한다. 결과적으로는 이런 달라진 작업과정을 통해 그의 작품의 미적 성격도 바뀐다. 전기에서의 작업은 스튜디오 안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압축적 자연과정"이었다. 작가는 일단 사건이 벌어지면 이 과정에 사실상 인위적으로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기에 이 과정을 찍은 결과물들은 일종의 '자연 과정 자체의 압축적 형상화'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작업에서는 이를 '작업실 밖의 자연환경'과 같이 찍음으로서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자연 자체가 아닌 셈이 되었다. 그렇기에 연기가 생성/발전/소멸하는 과정은 자연적 과정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과정이기도 하다. 그는 곧 가장 추상적 차원에서 이차적 자연의 세계에 심미적으로 접근한 셈이다. 이리하여 그의 작품들을 지배하는 미학은 더 이상 자연적 과정 자체가 빚어내는 직접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사회와 매개된 것으로 무거운 신비, 아련함, 회의, 희고 흰 막막함, 기괴함, 두려움 등 '세속적인 것'이다. 이제 '절대정신'(헤겔)이 인간들 제도 안에서 운동하기 시작한 것일까? ● 전기 10년 동안의 그의 작업 성향들은 '거칠게' 말해 인간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이라고 요약할 수도 있다. 즉 그는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의 삶을 생성 소멸하는 자연적 과정으로 환원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을 다시 사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사진은 자연적 과정이 지닌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그 무한한 변용에서 오는 '경이와 신비로움'을 제공하기도 하며, 때로는 고배율의 현미경 사진, 혹은 우주망원경 사진처럼, 우리의 가시적 세계 너머에 있는 비가시적인 것을 바로 목전에 대상화해서 관중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그의 철학적 의미부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 표현되는 차가운 즉물적인 자연법칙의 작동에서 어쩔 수 없이 주체성의 소외가 발견되기도 한다. ● 그래서 문제는 언제나 "자연"이다. 예술이든 과학이든, 인간 사회의 운동법칙을 자연법칙에서 찾으려는 수많은 시도들의 난점은 언제나 "주체성" 그 자체에 있었다. 예를 들어 거울을 이용한 많은 작품들의 경우, 어떤 방법론에 의지하든, 그것에 비친 영상이미지들의 흥미로움에도 그것의 한계는 자주, 그 이미지의 기계적, 물리적 성격에 의해 설정되어지곤 한다.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요약될 수 있는 자연주의 역시 따지고 보면 당시 춘추시대 주나라의 봉건사회의 부패상을 지켜보며 내린 고도의 정치적 개입의 산물이다. 헤겔의 철학체계에서 이것은 "정신"이 결여된 "자연철학"과 그것이 스며 있는 "정신철학"의 차이로 나타난다. 헤겔 체계의 완성은 정신철학에서 이뤄진다. 또 탈인간주의, 탈주체를 천명하고 이를 개념화하려고 애쓴 초기 푸코와 󰡔성의 철학󰡕 3권의 "자기배려'에서 시도하고 있는 주체에 대한 수양을 깊이 사유하는 말년의 푸코 사이의 차이가 그것이다. 또한 약 10여 년 전 한국에 소개되어 폭넓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통섭󰡕에서의 인간사회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접근도 결국에는 인간 존재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에서 난점을 드러냈었다. 그렇기에 인간에 대한 자연주의적 환원은 인문사회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적 과정에서도 그렇게 성공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이호영_ARCHE #11_C 프린트_80×130cm_2016
이호영_ARCHE #12_C 프린트_80×130cm_2016
이호영_ARCHE #15_C 프린트_80×130cm_2016

이런 그의 전기의 '자연주의적 접근'이 지녔던 나름의 '장점과 난점'은 흥미롭게도 이번의 새로운 전시에서는 상당부분 해소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작업의 결과물은 압축적 자연과정의 자연주의적 형상화가 아니라, 자연-사회적 현상의 형상적 사유로 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이번 전시는 사람에 따라서는, 전기의 전시와는 다른 전시, 다른 개념적 구상을 가진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미적 결과물로부터 출발해서 그 작업방식을 검토해 보면 작가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에 작가 자신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도 있겠다. 즉, '연기'를 매개로 한 새로운 작품에서 주제화되고 있는 것은, "모든 만물의 근원으로 자연의 자기 운동방식에 대한 연구인 것은 전기와 동일하지만, 이제 그것은 헤겔식으로 표현해 사회화된 '정신'의 영역에 대한 형상화로 형태변화(transformation)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호영이 그의 이번 작품에서 힘겹게 와 닿은 곳은 초월적인 일자가 영원의 세계에서 내려와 저 말 많고, 탈 많은 유한한 인간들과 비로소 직접적으로 교섭하는 곳이다. 이미 그 접촉 지점에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사유하게끔, 그의 작업노트가 아니라, 사진 이미지들이 재촉하고 있다. 그의 사진을 통해 그가 형상화한 이미지는 그가 스스로 개념어로 말하고 있는 것 그 이상이다. 그것은 거의 모든 창작예술품들에게 해당된다. 작품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항상 작가가 말로 하는 것, 그 이상을 말해 준다. ■ 김경수

이호영_ARCHE #18_C 프린트_80×130cm_2016
이호영_ARCHE #27_C 프린트_80×130cm_2015

2016 ARCHE(아르케) ● 이 세계의 존재는 순간순간 이어진 연속체 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 연속체 속에 갇혀 있는 세계의 존재는 과거・현재・미래가 이어진 시공간을 사유하며, 그저 '지나가는 존재이다. 이 세계를 '지나가는 존재'는 생성과 소멸의 변증법적인 순환 관계로 이루어진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반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세계 내에 '지나가는 존재'인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페인트를 가상의 세계로 끌어냈다.(2007-2014). 나는 얼마 전(2015)부터 연기를 가상의 세계가 아닌 실제의 세계로 내던져, 그 연속체 속에 놓인 세계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이렇게 쓰이는 연기는 나무와 풀에 불을 붙인 후, 다시 젖은 풀이나 덜 마른 나무가 더해져 만들어 지는데, 이것이 세계에 뿌려지면 연기와 세계는 스스로 하나가 되어 비가시적인 순간에서 가시적인 순간으로 전환하여, 근원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지체 없이 형태를 바꾸며 그 존재를 증명한다. 이처럼 연기를 통해서 이 세계의 변화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연기가 세계 내에 자연스럽게 흘러 유기적으로 상호 흡수되어,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어떤 근원적인 작용(아르케-ARCH)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계 내의 존재 이유로, 나는 이 세계를 원초적이며 발생론적인 "아르케(Arche)"에 의해서 존재하는 시공간으로 받아드려, 지속적이며 무위(無爲)적인 생성의 순간을 인위(人爲)로 상정하기 위해 때로는 오랜 시간의 노출로, 때로는 여러 컷을 겹쳐서 카메라에 담는다. 세계를 증명하는 자연현상은 동 시간의 생성과 소멸이 반복・순환하는 것처럼, 마치 無속에 有를 품고 有속에 無가 존재하며, 陰과 陽이 공존하듯, 불규칙적이면서 일정한 규칙을 지닌 수많은 중첩된 관계 속의 원천인 아르케와 맞닿아 있다. 이처럼 아르케는 예상할 수 없는 혼돈 속에 머물고 있으며, 공존 속에 교차되어 생성된 이 세계 내의 모든 존재의 시작이다. 이를 동아시아 생성론적 관점으로 보면, '노자의 無極(무극)'이나 '주렴계의 太極(태극)'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즉 이 세계 내의 존재는 어떤 모습을 가릴 것 없이 멈추지 않고, 지속적인 변화와 작용으로 근원적인 자연원칙 속에 갇혀 있음과 동시에, 이 중첩된 연속체 속을 그저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아르케를 이 세계에 내재된 순수자연성으로 인식하고, 우연적이고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존재에 대한 그 현상으로 본다. 그러므로 나는 이 연속체 속의 원천인 아르케의 존재 단면과 交融(교융)하는 것이 이번작업의 시도, 그 자체이다. 한편 나는 이 세계가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체 속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과거・현재・미래가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임의로 규정했을 뿐, 우리의 현존재적인 의미를 대신하긴 어렵다. 결국 나는 이 작업을 통하여 우리가 과거・현재・미래로 규정하고 있는 그 순간순간을 세계 내의 어떤 부분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아르케와 같은 근원적인 원인으로 인해 이어진 세계 내의 '지나가는 존재'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나의 전작에서 보여준 작업처럼, 이 사회는 모든 것을 규정해서 그 세계 내의 사건들을 사각(틀) 속에 넣으려 한다. 하지만 세계는 규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그 만의 유기적인 사이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세계의 사이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의 연결로 이어져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연속체 속에 위치한 원리나 작용으로서의 그 근원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 이호영

* ARCHE 아르케는 고대 서양철학에서 유래된 용어로, 이 세계의 감각적으로는 느낄 수 없지만 우주(이 세계) 근본원리나 근원적인 존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보면 노자의 道, 주렴계의 太極, 성리학의 理氣, 그리고 불교의 緣起說에서 유사점을 볼 수 있다.

Vol.20161029b | 이호영展 / LEEHOYOUNG / 李昊英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