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6_0928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2-1(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세계를 삼켜 대상을 사유하는 시적 과정으로서 회화- 박현진 개인전 'Food for Thought' ● 박현진 작가의 전시제목 'Food for Thought'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생각할 거리' 정도 된다. 먹고 생각하는 두 행위가 접합된 관용어는 외부 현상과 사건, 타자의 존재를 나의 것으로 씹고 녹이고 삼키고 소화시켜 흡수하는 과정을 함의한다. 혼돈과 모호의 세계를 명확한 의미로 번역하고 사유체계에 배치하며, 배치함으로써 다시금 사유체계를 구축하고 확장하는 과정을 육체적 행위로 빗댄 언어를 전시 주제로 내건 취지는, 작가로서 첫 걸음을 내딛으며 작업의지를 선언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 사유를 먹는 행위에 비유하는 어구를 그대로 작업에 옮겨왔듯, 각 작품에는 사유의 소재들로 가득하다. 화면에는 작가가 관심을 두는 환경, 종교, 정치, 국제사회 분쟁을 망라한 사회적 이슈와 소재들이 산재해 있다. 이슈가 부여된 화면마다 권력과 문명의 기호들이 알레고리처럼 얽힌다. 뱃속에 음식물이 잘리고 갈리며 엉켜드는 소화과정을 드러내듯, 캔버스에 소재들이 연결되는 방식은 그리 쉽게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배경의 상이한 소재들은 서로 다른 의미를 중첩시키고 조화하는가 하면, 충돌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거기다 묘사된 화면 위로 부유하고 화면에 섞여드는 음식물은 의미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 배경과 표면은 평면 위에 겹쳐 있음에도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며 상호 긴장과 충돌, 교섭하여 이질적인 의미의 연쇄를 생성한다. 「모두를 위한 초밥(Sushi for All)」에서 화면 한가운데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이 정글 속에 유인원과 나란히 있다. 그 사이 표층에 떠다니는 초밥은 4차원 알레고리처럼 시공간을 가로지른다. 윤기가 흐르는 초밥의 질감과 우주인의 매끈한 헬멧 사이 원숭이들은 힘 빠진 눈으로 화면 밖을 응시한다. 고급음식과 첨단과학에 대비되는 열대우림의 원숭이는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연상시키는 인류 문명과 우주의 탄생을 둘러싼 4차원적 알레고리일 수 있고, 계층과 인종적 관점에서 원숭이를 비인간적 환경의 현대인으로 비유한다면 사회비판적 독법도 가능하다. 「끈적이는 상황(Sticky Situation)」으로 눈을 돌리면 사막에서 소방관이 불을 끄는 장면이 두드러진다. 이들이 온갖 무장을 하고 물대포로 강타하는 타깃은 나체의 여성이다. 사막에서 불을 끄는 극악한 상황은 소방관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연상시키지만, 동시에 여성을 침묵시키고 폭력을 가하는 남성성을, 거리의 시위 군중에게 물대포를 직사하는 안보 국가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그 와중에 곰 인형을 뒤집어쓰고 상체를 노출한 근육질의 소방관은 성애화된 남성성을 드러내는가 싶지만, 연장을 들고 있는 소방관이 화면을 전면으로 등지고 미어캣 무리들과 마주하는 화면은 재난으로서, 동시에 재난의 구원자로서 남성-소방관 이미지를 교차시킨다. ● 화면에 배치된 소재들은 온전히 해석할 수 없는 기호의 그물망을 구성한다. 그 위로 부유하는 음식물은 배경과 의미적 연결성을 보이거나 장식적인 기능도 갖지만, 일차적으로는 물과 기름처럼 다른 층으로 포개어져 있다. 음식물은 뭉개지고 번져 있는 아수라장의 배경 위에 대비적으로 매끈한 외피를 드러내며 색을 발한다. 현행하는 사건사고 위에 음식을 포개어놓는 행위는 외부 세계를 음식물의 스크린을 통해 필터링하고 의미부여하겠다는 의도로 접근할 수 있다. 음식에 부여된 의미의 관습들이 배경의 이미지들과 부딪히고 긴장을 유지하며 교섭하고 의미를 소통한다. 「진달래에 경의를(Salute to Azalea)」에서 위안부 소녀상과 쪽진 머리의 한복 입은 여성들 위로 떠다니는 진달래 화전은 김소월의 시에 담긴 애상과 아픔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삼짇날 여성들의 문화를 교차시키면서 배경에 상응한다. 「달콤한 성모마리아(Sweet Mary Mother of God)」의 마카롱은 그 원류를 르네상스 수녀들이 만든 음식에 기원을 둔다는 점에 배경의 피에타상과 동시대성을 갖는다. 하지만 박제처럼 퇴색된 피에타와 달리 디저트 음식으로 사랑받는 마카롱의 이격감은 종교와 세속의 간극을 강화한다.
소재의 중첩, 배경과 표층의 교차는 스마트폰과 PC에 여러 창을 띄워놓고 화면을 교차하여 작업하는 현대의 정신분산적 매체운용의 동시대성에 상응하며, 이질적인 레이어를 평면에 포개고 뒤섞거나 압착시키는 최근 회화의 흐름과도 맥이 닿아 있다. 한편으로 소재들을 엮어 의미의 알레고리를 심화하고 그 위에 음식물을 씌워 이중으로 필터링하는 작업은 작가 주체의 의식적인 거리두기를 시사한다. 이를테면 재현대상으로 옮겨진 기호들을 음식물로 여과함으로써 외부 대상을 메타적으로 재전유하는 시도인 셈이다. 음식이라는 소재는 그 특성상 배경의 기호들을 해석하는 과정을 '먹는 행위'로 번역함으로써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를 눈으로 만지며, 눈으로 씹고 뜯고 맛보는 중층적 감각으로 치환한다. 동시에 음식은 배경과 포개어지면서 각 소재마다 함의된 관습적인 설명들에 의미론적으로 상응하는가 하면, 이질적으로 교차한다. ● 의미가 생성되는 방식은 다르지만 기저에는 소재와 소재 사이의 간극, 소재에 대한 일련의 거리두기가 전제된다. 예의 거리두기는 작가가 소재들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두며 주체성을 유지하는지, 화면 속 기호들과 수축이완의 완급조절을 어떻게 조율해내는지에 따라 효과를 달리한다. 거리를 두는 작가의 전략은 작가의 개인사적 배경과 조우하는 듯 보인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경험한 8년여의 영어강사 생활은 강남 학부모들의 극악한 교육열정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순수미술에 뜻을 두었고, 사교육 시장에서 생업을 이어간 시간들 속에서 거리두기는 생체리듬을 유지하기 위한 생존전략이자 처세였을 것이다. 이후 작가는 국내 대학에 들어가 자신보다 젊은 학생들의 생활고를 관찰할 수 있었다. 작가의 일상은 계층과 세대의 사회문제에 접해 있는 동시에 당사자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구술된다. 현실사회에 속해 있음에도 다소 간 거리를 두는 작가의 시선은 문지방에 걸쳐 있다. 이를 작가가 어떻게 의식하고 표명하는지에 따라 화면은 다른 의미로 독해된다. ● 표명의 두드러지는 방식이 화면에 음식물을 띄워 온전한 사유의 고리에 흠집을 내는 시도였을 것이다. 예의 형식적 전략이 멀게는 16세기 한스 홀바인이 「대사들」에 새겨 넣은 외상적인 해골이미지에 닿는다. 하지만 캔버스 위의 음식들은 무겁기보다 장식적이며, 배경의 무게에 극적으로 대치될 만큼 가볍다. 음식물은 배경과 충돌하고 경합하는가 하면, 이미지의 맥락을 묶어내고 서로에게 부여된 관습들을 보충하고 공명하기도 한다. 표층의 음식물은 회화를 감상하는 행위를 의미를 먹는 과정에 상응시키며 의미의 연쇄를 작동하는 감각적 누빔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음식물은 캔버스 표층에 부유하며 평면상의 이질감을 심화시켜 배경의 의미과정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고 소화되지 못한 증후를 잔여처럼 남긴다. 사실주의적 소재들의 알레고리 위에 음식물 레이어가 덧입혀지면서 평면의 작품은 심도를 확보한다. 압축된 간격 위로 부유하는 음식물은 즉각적인 의미연쇄를 일시정지 시킨다. 유예되고 지연된 의미과정 속에 감각의 촉이 음식물을, 배경의 이미지를, 음식과 배경 사이의 간격을 더듬는다. 그 결과 소재와 레이어의 중첩으로 납작해진 시간성 위에 역설적인 깊이가 벼려진다. 작품을 읽는 과정 속에 음식은 생각할 거리가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해 음식은 대상이 내포하는 의미를 사유할 것을 추동하지만 동시에 화면에 온전히 흡수되는 과정에 저항하며 완결된 의미해석과정을 방해한다. 의미구조의 스크린 위에 균열처럼 떠오른 음식들은 일종의 '예외'로서, 소화되지 않은 잔여이자 부분대상으로서 재차 평면 위에 층위를 분할하고 하나의 징후로, 소화해야 하는 소화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의미의 굴레에 외상처럼 도드라진 음식은 소화되기보다 소화를 촉진하며 완결된 사유에 끝내 흠집을 내고 소화과정으로서 사유를 추동한다. 완전한 소화가 불가능한 음식이 입 안에 덜그럭거리는 잔여로, 시적 언어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작가가 의미의 연쇄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던진 포석으로서 음식을 표층에 띄우는 행위는, 외려 일관된 의미연쇄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지속적인 소화와 먹는 행위를, 사유를 추동케 하는 동기가 된다.
하지만 간극의 이질성을 그대로 노출하는 작가의 시도 한편에는 간혹 전통-여성(성)-아픔-진달래의 의미고리나, 서구-전통-여성(성)-블루베리의 관용적인 의미연쇄가 강화됨으로써 간극이 은폐되고 좁혀지는 경우가 포착되기도 한다. 음식에 내포된 의미와 역사가 배경의 소재들을 설명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의미부여가 일어나는 구조는 의미순환의 닫힌 원환을 함의한다. 소재로 가득 찬 화면 위에 음식물은 화면의 의미들을 함축한다. 이 경우 작품은 기존 의미망을 반복하는 유사 사실주의 회화의 의미 과잉으로 비쳐질 우려가 없지 않다. 위안부와 진달래, IS와 크래커 등 서로를 반영하는 의미의 원환은 다소간 설명적인 특성을 갖는다. 「22번 교향곡 "달콤한 슬픔"(Symphony No.22 "Sweet Sorrow")」에서는 북극곰 위에 떠다니는 원환의 사탕들을 이질적으로 배치함에도 불구하고 구조튜브를 형상화한 사탕의 본 의미를 (굳이) 찾아내 북극곰으로 표상되는 환경문제를 연결시킨다. ● 배경과 표면 사이 간격은 이질적일 뿐 아니라 의미론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역설적인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간혹 음식과 배경 이슈 사이 의미론적 싱크로가 높아지고 장식적 완결성을 갖춰 서로를 보충하고 설명하는 지점이 눈에 띄는데, 이는 작업에 놓인 음식과 소재의 거리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교과서적 해석을 언제든지 호출시킬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작가가 배경과 표층을 나누려는 것인지, 관습적인 의미망으로 접합하려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두 층이 불화하거나 습합되는 정도 역시 작품마다 균일하지 않다. 현실과의 거리를 인지하면서도 사회에 기여하는 회화를 이어가고 싶다는 작가의 의도는 작업을 명확한 의미로 수렴시킴으로써 소위 '캠페인 회화'의 오명을 덧씌울 여지를 남기는 것이 아닌지 곱씹을 필요가 있다. 사유를 위한 대상의 메타 소재로서 음식물을 덧입히는 작가의 재치 있는 시도가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화면의 클리셰를 운용하고 레이어 간의 이질성을 드러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배경과 표층 사이 이질성을 납작한 간격으로 드러내는지, 이를 관습적인 의미사슬로 붙박아둘 것인지 확정되지 않은 가운데 화면에는 이상한 긴장이 감돈다. 관습적인 의미가 잠식하는 이미지의 연쇄를 어떻게 인식하고 비판적 거리를 취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작업에 물음표로 붙는다. ● 예의 긴장이 감도는 중첩된 스크린에 또 하나의 요소가 개입한다. 음식과 배경 사이, 또는 음식과 배경 위로 뿌려지고 흘러내리는 물감은 음식과 배경과 다른 질감을 제공함으로써 또 하나의 레이어를 덧씌운다. 아니, 뿌려진 물감은 각 층위의 간극을 압축하고 관통한다. 이질적인 소재들의 간극 속에 흘러내리는 물감은 화면을 뒤섞는다. 중력을 잃고 화면 위를 떠다니는 음식과 달리 흘러내리고 흩뿌려진 물감은 여느 소재의 표현들보다 물성이 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소화액, 소화제부터 표현에 따라서는 캔버스에서 흘러나온 고름이나 배설물까지도 연상시킨다. 사회적 기호들의 알레고리 위로 흘러내린 마티에르는 풍경을 덮치고 소재 사이로 스며들어 의미를 녹인다. 점액질의 물감이 침식하고 오염시키며 삼키려는 대상은 작가가 비판적으로 그려낸 남성 본유의 문명과 자본주의 질서의 재난일 수 있다. 부수고 부식시키는 행위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애브젝트(abject) 개념을 끌어당긴다. 이 경우 물감을 뿌리고 흘러내리는 작업은 상징질서를 드러내는 가운데 이를 부식시키고 월경하는 행위로서 그리기를 부각한다. 여기서 그림 그리는 행위는 문명과 자연의 경계, 주체와 타자의 구분을 복기함과 동시에 이를 삼키는 행위로, 경계를 재확인함과 동시에 이를 넘나드는 이중적 수행의 과정으로 자리매김한다. 화면의 기호들이 소화대상이 되고, 음식으로 비유됨에 따라 캔버스는 흡사 생각할 거리들이 음식에 의해, 음식과 함께 부서지고 흡수되는 '사유의 내장'으로 비유된다. 소화가 일어나는 내장으로서 캔버스는 겉과 속이 뒤집어진 모습으로 제 속내를 관객에게 드러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작가가 표현하는 레이어마다 미술사적 양식들을 선회한다는 점이다. 층층이 다른 미술사적 양식들이 교차한다. 「S'more World」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시리아 난민을 애도의 촛불들과 함께 섞어내는 사실주의적 기호들의 알레고리가 뭉개진 물감층 위에 아스라이 솟아오르는데 이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법이나 프란시스 베이컨의 이노켄티우스 10세를 소환하는 듯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미지를 삼키는 소화액은 폴록의 액션페인팅을 연상시키는 스트로크로 구현된다. 구상적인 소재들 위에 드리운 음식들은 팝아트적 뉘앙스를 뿜어내며 화면 위에 지분을 차지한다. 작가는 사회이슈를 사유의 연료로 삼지만, 사유를 위한 양식으로서 미술사적 표현형식들을 절합하는 것일까. 이는 최근 레이어를 중첩시키며 미술사적 양식들을 메타적으로 전유하는 탈역사적 맥락의 회화의 경향들과 공명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존의 미술사적 양식들을 탈맥락화하는 형식적 유희로 비쳐지기도 한다. 미술사적 의미를 어떻게 경유할 것인가, 어떤 소재를 택하고 얼마나 거리를 유지할 것인가, 이를 어떤 작법을 운용하며 가공해낼 것인가의 고민들을 지속적으로 이어가 작업 과정 속에 누적한다면 메타-작업으로서 작업의 의미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박현진작가의 '생각할 거리(Food for Thought)'는 기호의 알레고리 위에 음식을 하나의 층처럼 포개어놓는다. 음식패턴과 사회이슈라는 이질적인 소재가 서로 다른 층으로 겹쳐지는 가운데 평면의 간극 위로 물감이 뿌려지고 이질적인 층 사이로 흘러내린다. 음식과 배경, 마티에르의 층위들이 삼중으로 겹치는 화면은 의미구조에 외상을 남기고 의미를 중첩시키는 작가의 재치 있는 시도이기도 하다. 음식의 소재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먹고 소화하는 행위로 전치함에 따라 캔버스는 하나의 소화기관과 등치된다. 그렇게 평면 위에 뒤집어진 장갑처럼 소화의 행위가 그려져 있다. 캔버스와 물감이 의미대상을 구현하는 동시에 의미작용의 과정을 함축하는 하나의 기관으로서 내장을 드러낸다고 한다면, 그림은 의미를 먹고 시를 뱉어내는 행위의 편린들이 아닐까. ■ 남웅
Vol.20160928a | 박현진展 / PARKHYUNJIN / 朴賢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