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0422h | 최원석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24시간 관람가능
스페이스 이끼 SPACE IKKI 서울 성북구 성북로23길 164 www.spaceikki.com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이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김승옥 『무진기행』)
꽃잎이 진다-첨벙, 꽃신을 신은 개구리가 물에 빠지지 않는다 ● 그는 무진을 떠났다. 먼지를 날리며 멀어져 가는 버스가 안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침이 나오려 했지만 참았다. 참으니 눈물이 고였다. 목이 간지러웠고 얼굴이 붉어졌으며 눈이 아파왔다. 눈물이 떨어진다. 무엇의 눈물인지 모르겠다. 아니 알겠다. 편지 한 장 안남기고 떠나다니, 어쩌면 썼지만 주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왜 그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또 그렇게 서울에 가고 싶었는데, 꼭 같이 가고 싶었는데 왜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 '서울에 절 데려다 주시겠어요?' 밤새 이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어쩐지 그를 처음 본 술자리에서부터 그는 나를 서울로 데려다 줄 것만 같았다. 분명 데려다 주지 않을 테지만 꼭 이 말을 뱉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개인 날」 대신 「목포의 항구」를 부를 때부터. ● 그와 헤어지고 잠자리에 눕자 자꾸만 같이 서울행 버스를 타는 상상을 하게 됐다. 자정을 넘기자 개구리가 요란스레 울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개구리 울음소리가 최면 마냥 더 깊은 공상을 가능케 했다. 아침 해가 창문으로 넘어올 무렵 잠이 든 것 같다. 개운한 불면의 밤이었다.
무진의 새벽이다. 동이 트면 안개의 색을 더욱 짙게 만드는 무진의 새벽. 그 안개를 들이마시면 어쩐지 숨이 멎을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했다. 무수한 안개 포자들이 얼굴 솜털에 달라붙어 동글동글 소름끼치는 무늬를 만들어 낸다. 손등으로 쓱 문질러 포자들을 떨어내고 다시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숨을 참은 채 얼마나 오랫동안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무의식중에 숫자를 세다 그만둔다. 멀리서 목쉰 개구리가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며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첨벙! 발을 헛디뎌 냇가에 빠졌다. 첨벙! 냇가에 빠진 발은 그대로 인데 또 한 번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물도 산처럼 메아리를 치는 것인가. ● 그는 부인이 있다. 그것도 돈도 많고 예쁜 부인. 다시 결혼한다 해도 나 같은 시골 음악선생을 택할 리 없다. 그래도 서울에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끈끈한 공기로 숨 막힌 무진에서 그 말을 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다시는 「목포의 항구」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유행가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느 개인 날」을 달리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어쩐지 그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를 부르면…. 알면서도 모르고 싶다. 그와 바닷가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분홍 꽃들이 만개한 그 방안에서 담배연기를 맡으며 잠이 든 채, 잠이 들지 않은 채 들었던, 듣지 않았던 목소리. 인숙이 인숙이. 그 다음 말을 나는 꿈에서 이었다. 꿈에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일까. 동이 틀 무렵 나는 담배 연기에 숨이 막혀 잠에서 깼다. 매캐한 담배연기 가득한 방 어디쯤에서 분홍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무진의 공기에서 첨벙! 무언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날 사 두었던 '푸른 꽃무늬 하얀 고무신'을 꺼내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고 고무신을 신었다. 밤안개는 밤이라서 더 하얗다. 물가 가장자리를 걷다 보니 신 안으로 물이 들어와 걸을 적마다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개구리는 개굴개굴 울진 않지만 고무신도 개굴개굴 울진 않지만 어쩐지 모두가 개구리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개구리와 꽃신이 함께 운다. 첨벙! 어디선가 호전적인 개구리가 요란하게 물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조심스럽게 물가를 건너 마지막 발자국을 진흙위에 새겨 두었다. 그는 떠났다. 서울에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약속도 편지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새벽녘 안개처럼 짙게 머물렀다 한낮의 뙤약볕만을 남기고 서울행 버스를 탔다. ● 나는 물에 뛰어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청범 거리는 소리와 푸른 꽃무늬 하얀 고무신이 나 또한 안개 속에 몸을 던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저 서울행 버스를 멀리서 보내고 있을 뿐이다. 다시는 유행가를 부르지 않겠다고, 다시는 「목포의 항구」를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다시 「목포의 항구」를 아리아처럼 바꿔 부르며 무진의 안개에 젖어 꽃신을 고쳐 신는다. 서울행 버스를 잡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다시 그가 온다 해도, 그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며, 후회는 언제나 후회로 남을 것이다. 꽃잎이 다 떨어진 그 방에서 홀로 「어느 멋진 날」을 소리 없이 부르지 않았다.
들어봐, 스즈키. 곧 어느 화창한 날에 저 수평선에 하얀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오르는 거야. 그리고 배 한 척이 나타나는 거지. 하얀 배가 천천히 항구로 들어와. 가까이 다가와서 예포를 쏘고 있어. 귀향을 알리는 거야. 자, 보여? 그가 돌아왔어, 그가! 하지만 난 마중하러 안 나갈 거야. 안 나가. 대신에 언덕배기 능선에 꼭꼭 숨어서 기다릴 거야. 그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 기다리는 건 이제 전혀 힘든 게 아니거든. 이제 항구에 몰린 인파를 헤치고 배에서 내린 한 남자가 보여. 꼭 찍어놓은 점처럼 작게 보이는 그가 언덕을 향해 올라오기 시작해. 그가 누구게? 누구일 것 같아? 올라오는 걸 좀 봐! 와서 뭐라고 하게? 뭐라고 할 것 같아? 멀리서부터 '나의 나비'라고 부르면서 오고 있잖아. 그래도 난 대답 안 하고 숨을 거야. 조금은 골려주고 싶으니까. 그리고 안 숨으면... 내가 가슴이 터져 죽어버릴 것 같으니까. 그를 마주치면 말야... 그러면 그도 초조해져서 나를 막 불러대겠지. 내 작은 비둘기, 내 작은 아내, 향기로운 베르베나... 날 보러 올 때마다 나한테 붙여준 이름들을 부르면서 나를 찾아 헤매겠지. 봐, 스즈키. 꼭 이렇게 된다니까. 약속할게. 그러니까 제발 내 걱정은 넣어 둬. 난 그를 믿고 있으니까, 그를 믿고 있으니까 기다리는 거야.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 중 '어느 개인 날') ■ 피서라
사진이라는 매체를 처음 다룰 때부터 나도 모르게 도시에 이끌려 작업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것도 3류 도시, 짝퉁도시 같은 곳에서 말이다. 이번엔 3류도 짝퉁도 아닌 정치적인 도시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공간을 발견한다. 우연히 세종시를 지나다가 발견한 내일이면 사라질 빈방의 피어난 꽃이 참으로 대견해 보였다. 요즘말로 웃프다고 해야 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 사람으로 치면 죽어서 주민등록상에 사라진 것처럼 연기군이란 주소는 이제 지도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한 연기군 죽은 집에서 세종시란 이름으로 태어난 꽃들이 비장한 마음으로 찾아간 여행에서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으니 나는 죽음의 공간에서 꽃구경을 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했다. 20대 시절 내가 제일 좋아하던, 우울한 날이면 가장 듣고 싶었던 안치환의 '마른잎 다시 살아나'라는 노래가 문득 머리에 스쳐간다. ● 서울을 닮고 싶었던 시골의 한마을에서 좌우대립의 싸움을 말리는 듯이, 보상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쫓겨난 시골 농부의 할머니를 위로하듯, 또는 다시 태어날 세종시의 안녕을 기원하듯이 활짝 피어있는 꽃들이 지쳐있는 나와 우리 현대인들을 위해 다시 살아난 것 같은 착시를 안겨준다. ● 이렇게 점점 도시화되는 세상에서 영원한 도시인인 나에게 또 새로운 도시는 공간을 죽이기 살리기 하면서 세상을 교묘히 조작한다. ■ 최원석
Vol.20160906g | 최원석展 / CHOIWONSUK / 崔原碩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