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cGuffin Desire

권여현展 / KWONYEOHYUN / 權汝鉉 / painting   2016_0826 ▶ 2016_0909 / 월요일 휴관

권여현_The pond of Ophelia_캔버스에 유채_91×116.5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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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현 홈페이지_www.arthyun.com

초대일시 / 2016_0826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 컴퍼니 긱 Art Company GIG 서울 서초구 방배로42길 31-5 Tel. 070.7795.7395 www.artcompanygig.co.kr blog.naver.com/suntory0814

맥거핀은 히치콕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영화기법의 용어로 관람자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묶어둠으로써, 공포감과 의문을 호출하고 유도하는 장면 구성과 연출이다. '우리 놀란 눈앞에 등장한 화면 속의 낯선 이미지들은, 우리의 직감과 이성을 통해 표면적으로 이해를 허락하고,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고 쏟아놓은 시각적 버뮤다 삼각지처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 20세기 초, 초현실주의는 기존에 예술이 이래야한다는 수많은 전통적 사고를 뒤로하고, 현실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야한다는 자의식 아래, 꿈과 환영과 같이 시각적으로 잡을 수 없고 또한 증명 할 수 없는 것들을, 그들만의 표현으로 구현하길 갈망하였다. 이를 위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성에 의해 완전한 예술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그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에 의해 이루어진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킬 수 있는 극단적인 방법(약물복용)까지 시도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적극적인 실험은 우리 지성과 이성의 영역 뒤에 숨은 잠재적 이미지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고자하는 그들의 간절한 열망 때문이었다.

권여현_Rhizome book forest_캔버스에 유채_90×145cm_2016
권여현_Rhizome book forest_캔버스에 유채_90×145cm_2016

그 결과, 표현 대상의 단편적 의미와 가치 그리고 고유성은 그들에 의해 배제되고 상실되었다. 그 무렵 새로운 사유의 영역을 고대하던 철학자와 예술가들에게 이 신빙성 있는 시각적 접근법은, 과거 전통에 근거하여 사물과 대상 그리고 현상과 본질에 대해 경직되어 있던 사고를 전복시키는, 환영 받을만한 획기적인 발상으로 인식되어졌고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 여기 이 실험 정신을 이어 사물과 대상 그리고 보편적 가치와 사유의 기준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혼성적 결합'으로 '시각적 접속체계'를 구축하여 보여주는 작가 권여현이 있다. 그의 '시각적 창'에는 자연계의 모든 동식물과 인간 그리고 신화 속 인물들의 무작위적 결합으로, 다양성의 원리가 존재하는 탈 중심화 된 체계 (리좀적 사유)의 재구성을 통해, 정의 할 수 없고 규정 질 수도 없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설정과 연출이 전개되고 있다. ● 또한 권여현이 재현한 신화 속 인물과 상황의 재구성은,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상징성과 이야기 틀 안에서, 치밀한 관찰과 감상을 통해 이해 하고자는, 우리의 사고와 판단 근거를 무참히 무장 해제시켜버린다! 그 이유는 그가 리좀적 사유에서 말하는 각각의 가치와 의미의 뿌리가 다양한 집결지를 가지는 접속체계를, 그의 시각 공간에 초대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논리를 우선으로 하는 선형적 사유로, 그가 연출한 이미지에 다가간다면 그것들은 우리로부터 더욱 멀어져 갈 것이다.

권여현_The door of Ophelia_캔버스에 유채_162×131cm_2016
권여현_The pond of Ophelia_캔버스에 유채_91×116.5cm_2016

이제 그의 사유의 장소이자 영역인 수많은 이미지가 재 교배 된 '혼성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시각적 화면은, 낯선 분위기를 호출하는 미지의 입구이자 출구이다. 권여현은 이 세계를 마치 현실에서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 '중간 영역'이자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순간적 환영의 세계'를 기록한, 수평적 복수성을 제시하는 '탈 경계의 공간'처럼 소개하고 있다. 화면은 촉감을 느낄 수 있는 푸르른 배경을 뒤로하고, 이름 모를 녹색조의 식물과 나뭇잎들이 얽히고설킨 숲이 자리하고 있다. 그가 표현한 이 숲은 평온한 휴식과 안녕을 우리에게 선물하기보다는, 어디선가 무시무시한 것이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놀라게 하고 공포로 몰아넣을 것만 같은 으스스한 장소이자 영역으로 재현되고 있다. ● 권여현의 화면 속에서 밧줄은 어떤 넝쿨식물의 줄기인 듯하지만, 이내 끝으로 이어져 어느 미지의 세계에서 온 파충류의 머리로 변해 있고, 연약한 식물의 뿌리에서 누군가의 몸을 휘감는 하나의 위협적인 뱀으로 나아오고 있다. 반면 나무 기둥을 감고 있는 뱀은 우리를 미혹시켜 신으로부터 분리한 능란한 혀를 소유한 영물이라기보다는, 그저 자연계의 한 자리를 소유하고 있는 미개한 생물처럼 그의 화면에서 비추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설정하고 연출한 이 기이한 화면에서, 우리 인류사의 역사적인 한 장을 장식했던 철학자와 전쟁사의 영웅 그리고 낯선 신화적 인물들과 동물들은 병렬로 배치되고 있다. 그가 표현한 인물들은 마치 호흡이 멈춘 박제처럼 보인다. 더불어 화면의 하단에 자리한 진중한 내용의 철학서적들은, 장면적 관계성에서 인물들과 배경이 반드시 작가의 '어떤 의도'와 '상징적 복선'이 내재되어 있을 것 같은 사유의 착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그가 정교하게 장치한 혼돈과 혼성의 '미로'이자 '함정'이다.

권여현_The pond of Ophelia_캔버스에 유채_91×116.5cm_2016
권여현_The pond of Ophelia_캔버스에 유채_91×116.5cm_2015

미술사적으로 권여현은 초현실주의자들의 기법을 차용하고 있는데, 이는 한 가지 형태에서 동시에 여러 형상을 담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즉 그가 색조나 형태에서 다양한 의미를 탐구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시에서 음률이 비슷한 단어를 병치하므로, 단어와 단어 사이의 유연하고 분명한 관계를 우리에게 이해하도록 허락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권여현은 자신이 알고 채집한 모든 예술사의 배경지식을 그의 화면에 재현하여, 다시 한 번 더 우리를 '무엇인가 있을 것 같다'는 의혹과 의심의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 권여현의 이 의도적인 행위는 표현의 소재와 주제가 내포하고 있는 형체에 집중하면서, 그 틀에서 방법론적 '변주의 유희'를 즐긴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를 구현하는 시각표현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실험했던 이성과 직감 사이를 교차하며 오가는, 창조적 조형 행위와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각인되고 있다. 그의 내면영역 한 층으로부터 호출 된 이미지의 기억은, 점차적으로 화면을 치밀하게 구축하여 나간다. 이 과정은 화면의 시적리듬을 동반하고 있으므로 강력한 응집력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는 '이성의 옷을 입은 직감적 논리'로 권여현의 회화적 표현 방법론으로 선택되었다. ● 이러한 이유에서, 그의 직감과 이성이 순환되는 행위의 이미지들은, 그 두께에서 발산되는 진동과 확장 속에서 '사실의 실체'로 등장한다. 그의 화면은 '확증 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리고 '논리와 감성'사이를 유추하는 사유 가운데서, 저 미지의 영역 밖 고뇌와 갈등의 원인 중심을 밝혀내고자하는 의미로 우리에게 비춰지고 있다. 그의 시각적 표면에서 이미지들은 명쾌하게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권여현의 작품을 수많은 미지의 비밀이 숨겨지고 봉인 된 '혼돈의 판도라 상자'처럼 대하고 있다. 이는 시간과 공간, 역사와 사실 그리고 민족과 나라의 혼성적인 상황(Context)으로 인한 '혼돈과 공허' 그리고 '불안감의 엄습'을, 작가는 알레고리적 표현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여현_루 살로메 Lou Salome in magic forest_캔버스에 유채_130×163cm 2011
권여현_부유자아 'Fioating I'_캔버스에 유채_91×116.5cm_2002~16

다시 말하자면 권여현은 그의 시각적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지만, 초현실주의자들처럼 결코 이미지의 의미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의 화면에서 느끼는 감정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을 처음 대하는 그것과 같은 충격이자, 화면 자체에서 전달되어 오는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 그리고 전율일 것이다. 권여현의 시각 이미지들이 자리한 장소를 바라보는 우리는, 사고의 방향을 어디로 향하게 해야 할지 판단의 선택만을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마치 방향 지시성을 잃은 나침판과 별들로 거대한 대양 위를 항해하는 배처럼, 우리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 권여현의 시각언어가 재현되는 장소는, 그의 끊임없는 지적사유와 시각적 호기심의 결과가 일치되는 지점이다. 더불어 이 영역은 그가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나타내는 확장된 '다른 자아의 바다'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그가 '왜' 이런 시각적 행위를 하는 이유와 의미에 대해 다가가게 되었다. 권여현의 작품은 '단순한 형태의 관념'이 아니라 '시적 구성'이 확립 된 예술세계이기에, 작가의 주의를 맴도는 위험과 그가 이룬 성과에 스스로 가두는 착오로부터 분명히 보호해 줄 것이다. 어떠한 답변도 동반하지 않는 끊임없는 시각적 질문을 하고 있는 권여현은, 스스로의 '자아 탐구와 정체성'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타자와 환경', 이 모든 것에 대한 사유의 질문을 중력을 벗어나지 않고 던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제 우리는 권여현을 우주만큼이나 광대한 미지의 영역인 마음을, 여행하는 시각철학자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다! ■ 구기수

Vol.20160826f | 권여현展 / KWONYEOHYUN / 權汝鉉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