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 휴관
서울시립대학교 갤러리 빨간벽돌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대로 163(전농동 90번지) Tel. +82.2.2210.2250
타고 흘러내린 투명한 껍질이 있으면 타고 흘러내렸을 때에 타였던 것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중력이 있기에 물만 떠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종유석처럼 생긴 표면은 시간의 흐름을 드러낸다. 곧, 길든 짧든 굳을 때까지 안에 무엇인가가 반드시 머물렀던 시간을 부정할 수 없다. 층의 다름은 시간의 다름이므로. 또한 이것이 투명한 액체였기에 물의 성질대로 안에 있었던 것의 형形을 그대로 드러냄을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물이 상온에서 스스로 모양을 가질 수 없기에. 둥근 잔에 따른 물이 별모양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대로, 껍질안의 모양처럼 생긴 것이 확실히 있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여기서 투명의 역할은 오직 두께이다. 껍질의 두께가 안과 밖을 만든다. 두께가 없으면 그자체로 없는 것이라. 두께의 있음은 안과 밖을 구분해 두 개의 경계면을 생성해 낸다. 불투명은 곧 전부가 밖이다. 그냥 다른 것이라서 증거가 될 수 없다. 안이 보이지 않기에 그렇게 봐달라는 암묵적 동의를 구할 수밖에 없다. 경계면이 두 개가 아니면 그것은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하나의 접면을 가지게 되고 곧 고루한 재현이 된다.
그러나 이 증거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부재한다. 있던 것을 없앤 네거티브공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유가 있다. 있는 것에 대해 말하려면 없어야 한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붙어있는 말이다. 있는 것을 보이게 하면 곧 있고 난 다음 단계로 흐른다. 그리고 이내 있음은 바탕이 되어 망각된다. 그렇기에 있는 것의 있고 없음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보이게 하기의 앞선 단계에서 머물 필요가 있다. ● 그럼 있는 것이 어째서 중요할까? 가장 먼저이기 때문이다. 반목과 대립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다시 서로를 감싸 안을 수 있는가.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그릇된 정신적 결속을 초월해 다시 서로 공존할 수 있는가. 역시 가치 있는 물음이다. 왜 아니겠는가. 허나 그 이전에 망각된 모든 것의 근원이 있다. 우리가 여기 이 세계에 같이 있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있고 난 다음의 문제다.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혼자 있지 않기에 당연히 서로가 생긴다. 다른 것이 같이 있고 있기에 나도 여기 있고 있다. 결국 갈등도 있는 것들에 대한 문제가 아닌가 말이다. 세계는 모든 있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 ■ 김성중
Vol.20160812e | 김성중展 / KIMSEONGJOONG / 金聲中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