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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이끼 SPACE IKKI 서울 성북구 성북로23길 164 www.spaceikki.com
소녀가 온다(한 강『소년이 온다』 '너'와 '나' 차용) ● 그것은 무거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 나의 몸뚱이로 쏟아지는 흙들 위로 너의 땀이 촉촉이 내려왔다가 이내 흙으로 뒤덮인다. 간혹 '생각이 많은 부엉이'들이 너의 삽질에 박자를 맞춰 우우-. 사방에서 들려오는 정적의 소음으로 숨이 멎을 듯 헐떡이는 너의 숨소리. 너는 지금 숨 쉬는 법을 잊는다. 삽질의 리듬도 엉망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흙이 너의 땀을 덮지 못한다. 흙은 먼지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날리고 나뭇가지 사이로 교묘히 자리 잡은 부엉이의 눈 속으로 침입한다. 그것의 눈마저 멀게 하고픈 너의 심정일까. 우우- 거리는 그것의 주둥이마저 틀어막고픈 너의 헐떡임. 허공으로 흩날리는 삽질의 아우성이 그저 우습게 보이는 것 뿐 이라고 '생각이 많은 부엉이'는 우우- 한다. 너는 우는 것이다. 헐떡이다 못해 우는 것이다. 아래로 쏟아지고 위로 날리는 흙의 냄새를 너는 맡는다. 오로지 열려 있는 감각이라고는 후각뿐. 진한 흙냄새가 비릿하기까지 하다. 어둠보다 어두운 어둠속에서 부엉이의 눈만이 너를 비추고, 정적의 데시벨은 이미 너의 귀를 멎게 했다. 마치 너는 바다 속에서 삽질을 하듯 우아한 듯 우스운 꼴이다. 마침내 흙이 구덩이를 메웠을 때, 너는 안도의 숨을 잊는다. 이제 뭘 해야 할까 할 일을 잊은 사람처럼 할 일 없이 우두커니.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네가 덮은 흙들을 쏘아본다. 다시 파라, 우우-. 부엉이는 말한다. 너는 마치 최면에 빠진 듯 흙을 다시 파기 시작한다. 너는 전투를 하듯 철모도 벗지 않은 채 열심이다. 나를 어디에 묻던 너는 나를 다시 파고 다시 묻고 다시 파고 다시 묻고 다시 파고 다시묻고 다시파고 다시묻고 다시파고다시묻고다시파고다시묻고다시파고다시묻고…
엄마, 나는 죽었어. 아부지, 나는 드디어 죽었어요. 이제 괜찮아요. ● 너를 처음 봤을 때, 너는 나를 보지 않았다. 네가 천막을 걷고 들어왔을 때 너는 분명 무언가에 머뭇거렸지만 용감한 척, 무심한 척, 잔인한 척, 비인간적인 척, 비동물적인 척, 비생물적인 척, 아무것도 아닌 척 시선을 돌렸다. 너는 분명 두려웠었다. 나의 마지막 숨이 끊어지던 차에 나는 그것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나의 숨이 끊어진 후 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치마는 없어진지 오래다. 나는 죽었지만 나의 몸뚱이를 덮어줄 천 쪼가리 하나 조차 없어진 지 오래다. 너의 허리띠 버클이 끌러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의 바지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죽었다. 너는 나를 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너는 달랐다. 나는 요 근래 고마움에 대한 감정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천막의 문이 걷히고 너의 용감한 척, 무심한 척, 잔인한 척, 비인간적인 척, 비동물적인 척, 비생물적인 척, 아무것도 아닌 척 하는 눈빛이 다시 고마움이라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척이라도 하는 너의 애씀마저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너는 나를 봤고 반사적으로 나를 덮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를 덮을 무언가를 찾지 못해 당황해하고 있었다. 나의 치마는 이 천막 어디에서 굴러다니고 있는지 나조차 알지 못했고 너도 알지 못했다. 너는 심히 괴로워보였다. 그래, 생각해 보면 너의 인 척 하는 기만의 눈빛은 천막의 문을 걷어내는 손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너는 착한 사람인가 보다. 나의 착함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언젠가부터 한없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너는 어디선가 모포 따위를 가져와 그것으로 나를 둘둘 말아 들쳐 업고는 정신없이 숲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너의 무게와 나의 무게만큼 너의 군화는 숲을 엉망으로 패어 놓았다. 너는 왜 나를 묻으려 하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숲을 오르면서도 너는 왜 나를 묻어야 하는지 왜 자신이 그래야만 하는지 갈등했지만 너의 발은 이미 긴 발자국을 내며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나는 그것이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부엉이 눈동자만한 희망이라 생각했다. 그런 작은 희망이라니. 희망이, 희망이 될 수 없는 차가운 몸뚱이로 느끼는 절망적인 희망이라니. 순간 나는 너의 머리를 너의 어깨에 걸린 긴 총으로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나의 손은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너와 나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흘러넘치다 못해 미끈하게 너의 온 몸을 감아 쥔 땀이 나를 위한 눈물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 순간만이라도 천막의 문을 들어 올렸던 너의 손이 부끄러웠다고 느끼기를.
이제 내려놔, 우우- ● 부엉이가 우우- 한다. 나는 몇 초라도 평온해지고 싶어 힘들어하는 너의 등에서 빨리 내려오려 했지만 역시 나는 주검일 뿐이다. 너는 나를 내동댕이치다 시피 바닥에 던져 놓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분노, 후회, 책망,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을 너의 감정들이 땀으로 전이되고 있었다. 그리고 땅으로 흡수됐다. 나의 치마를 찾아와 줬더라면 아마도 나는 너를 용서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그렇게 말하겠지. '난, 아무것도 하지 않... 다만 호기심에 들 ... 그래도 난 널 이렇게 묻어 주...' 그래, 나의 판단기준은 이미 낮아질 대로 낮아져 너의 땀방울마저, 너의 주저함마저 고마울 따름이다. 드디어 너는 땅에 나를 묻었다. 저고리 하나 간신히 입은, 입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헐벗은 나를 차가운 진흙으로 덮어 주었다. 나의 주검에 착 붙어 점점 짓누르는 그것의 무게가 포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파헤쳐지고 다시 묻히고 다시 파헤쳐지고 다시 묻히고 다시 파헤쳐지고 다시 묻히고 다시파헤쳐지고 다시묻히고 다시파헤쳐지고 다시묻히고 다시파헤쳐지고다시묻히고다시파헤쳐지고다시묻히고... 너와 나는 온전히 온전치 못할 것이다. 너의 너희들을 이 무덤에 불러 세울 때까지. ■ 피서라
니체는 자신의 저서, 권력에의 의지를 통해 역사는 허구라고 단언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가 사실에 대한 기록일거라 믿는다. 또한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어진 어떤 사건이나 사실은 개별의 역사가 아닌 파편화된 역사이며, 보편에 의한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는 이러한 지점에서 지금까지의 역사관에 대하여 심각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지나온 길을 거슬러 가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함이 바로 역사의 가장자리에서 중심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거대한 아우성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중심의 역사가 아닌 주변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스스로가 지난 과거에 대해 재해석하려는 간절함과 절실함이 지금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나를 행동하게 하는 원천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러한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이념으로 얼룩진 인간과 내가 서 있는 지금 여기, 한국이라는 곳에 관심을 기울이려 한다. 바로 '역사의 선 사람들'이라는 주제로써 말이다. 인간이 공동체 삶을 지향한 후, 이상적 삶을 같이 고민하였고, 같이 꿈꾸었으며, 무책임한 이론들 일지라도 그것들을 믿었고, 그 주장들을 수긍하고 긍정해 왔다. 국가 통치를 위한 이념, 그들만의 변명을 위한 이념들 일지라도 말이다. 결국 권력유지를 위해 쏟아낸 수많은 외침들은 서로 간의 대립과 충돌로 막을 올렸고 폭력이라는 꽃을 피웠으며, 또한 죽음을 통해 그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 무대 뒤엔 얼룩진 유령들만 남았다. 곱디고운 나이에 온몸으로 시대의 잔학성을 경험하였던 그들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죽은 영혼에 대신할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억은 대체 불가능한 그들만의 잠상일터,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이다.
이러하듯, "108인의 초상"은 이념으로 얼룩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작업이다. 우리의 참혹했던 지난 역사와 더불어 인간의 존엄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또한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치부된 여성인권에 대한 묵묵한 성찰을 그렸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사진 틀 속에 불러 세움과 마주 세움이라는 의미적 확장이다. 불러 세움은 망각과 기억의 경계를 지시하며, 마주 세움은 사변적 혹은 변증법적 성찰을 유도한다. 특히, 검은 배경 속에 출몰한 유령처럼 선 그들의 모습은 마치 부유하는 망자의 흔적인 양 우리를 엄습한다. 본래 사진은 비가시적인 가시성을, 현재였던 어떤 과거와 있던 그대로의 현재가 되어 있을 바로 그 과거 사이에 우리를 머무르게 하지 않던가! 나는 그들 앞에 섰고 그들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들은 이제 한 분 한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 어쩌면 내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이미 망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역사 속에 머물러야 할지 여전히 의문만을 남긴 채 말이다. 그것이 내가 이 사진들을 통해 고민하는 바이기도 하고, 지시하는 바이기도 하다. "사진에는 과거와 현실이 결합된 이중적 상황이 있다"라고 바르트가 언급했던가... 이러한 사진적 지시체, 그것이 과거에 대한 반성과 현실에 대한 가능성이기를 나는 희망한다. ■ 차진현
Vol.20160711c | 차진현展 / CHAJINHYUN / 車珍玄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