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LIGHT IN FOREST

이재삼展 / LEEJAESAM / 李在三 / painting   2016_0707 ▶ 2016_0920

이재삼_MOONLIGHT IN FOREST展_해움미술관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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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71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5:00pm

해움미술관 HAEUM MUSEUM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133 Tel. +82.31.252.9194 haeum.kr

步履中庭月人 / 달빛 속에 뜰 안을 홀로 거닐며 / 梅邊行幾回巡 / 매화 둘레 몇 번이나 돌고 또 돌았던가. / 夜深坐久渾忘起 / 일어날 줄 모르고 밤 깊도록 앉았으니 / 香滿衣巾影滿身 / 꽃향기 옷에 가득 달빛은 몸에 가득 ● 윗글은 퇴계 이황 선생의 시들은 묶은 『退溪先生文集』 중 卷5(p. 245)에 실린 '陶山月夜詠梅詩六首' 중 한 首이다.

이재삼_BEYOND THERE_캔버스에 목탄_194×777cm_2006

이재삼의 회화-달빛 공간 속의 심미 체험: 自然至性을 일깨우다 ● 필자는 이재삼화가(이하 이재삼으로 약칭)의 그림들을 최근에 접하게 되었다. 글쓰기도 그렇지만, 이재삼의 그림들은 스치듯 체험하는 눈의 자극이나 몸 세포의 감각으로 느끼게 하는 사례가 아니다. 가능한 오래 두고 보고 또 보게 하면서, 조용히 좌망坐忘하는 정신적 심미 체험을 하도록 이끈다. 그가 그린 소나무, 매화, 대나무와 옥수수밭 그리고 폭포의 정경들은 한결 같이 교교한 달빛을 머금고 있으며, 한 밤의 적요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관객으로 하여금 고요히 잡념을 버리고 현실세계를 잊도록 할 만큼 그 탈속의 기운이 남다르다. ● 사실 작가의 그림 이미지들은 생각이나 의중의 표현인 사의寫意회화에서처럼 생략적이거나 추상화되어 있지않다. 목탄 가루를 첩첩이 쌓아 이룬 이들 공고한 형상들은 검정 숯가루의 속성 덕분에 시각적으로 어둡고 강렬할 뿐 아니라, 실사實寫의 정밀함으로 묘사된 탓에 그 형태의 구체성도 매우 높다. 그래서 언뜻 보면 그리자이유grisaille식 묘기의 사실주의 회화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머릿속을 맴도는 이미지들은 관객을 그림 표면의 세부 형상에만 머물게 놓아두지 않는다. 순연하게 그 너머로 이끌면서, 형상과 그를 둘러싼 검은 공간, 헤집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깊고 어두운 공간의 기운氣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송, 죽, 매의 형상들과 그 주변 공간의 긴장된 관계 속에서 촉지할 수 없는 기운의 긴 여운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제 작가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할 준비가 된 것이다.

이재삼_저 너머(BEYOND THERE)_캔버스에 목탄_291×364cm_2006

필자는 이재삼의 작품을 대하면서, 소재와 이미지에 대해 혹은 목탄이란 소박한 재료에 대해 흥미를 느끼기보다 작가의 예술관, 거의 정신적 심미의 경지라고 할 작가의 '의경意境'에 대해 더 큰 흥미를 느꼈다. 이러한 선택은 물론 개인적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먹색과 다름없는-차이가 있다면, 목탄가루는 화면 안으로 스며들지 않고 화면 겉에 쌓인다는 점과 그 가루입자들 때문에 질감과 광택이 먹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목탄가루의 검은 빛과 송, 죽, 매의 소재들로 말미암아 인지되는 저 관념적 심미성과 자연관 그리고 우리에게 오래 전부터 친숙한 달빛月色의 상징성이 작가의 회화를 근본적으로 밝혀주는 요소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한국 전통 문예에 내재된 자연관을 얼마만큼 참조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 그의 회화의 화가의 송, 죽, 매 그리고 폭포는 달빛 및 대지의 음기와 조화를 이루는 수직상승의 힘찬 양기를 띤 기운이라고 덧붙여도 되겠다. 그런데 이들 산천초목은 눈부신 태양빛 아래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형상들이 아니라 교교한 달빛 아래서 '꿈' 같이 드러난 형상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앞에서 말했듯이, 형상과 그 주변 공간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촉지할 수 없고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운, 그 언외지의言外之意의 노경老境한 경계의 氣를 주목하는 것이다.

이재삼_저 너머(BEYOND THERE)_캔버스에 목탄_182×908cm_2006

익히 알려져 있듯이, 동양 고전에서 예술작품을 설명할 때는, 표현 장르나 구체적 기법보다 예술가 개인의 기풍과 사상 그리고 심미의식을 중심으로 다양한 풀이를 개진해왔다. 마찬가지로 이 글도 그러한 의경론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래서 작가의 자연 대상과의 합일인 물아일체에서 비롯된 정신적 심미 체험을 세속적인 지知에서 벗어난 고요한 마음의 체험으로 파악한다. 마음心은 생각하고 감각하는 주체이다. 몸을 절제하고 마음을 닦으면 절로 이치理가 밝아오고, 그러면 마음과 이치理가 일치 '心與理一 '을 이루게 된다. 이 心與理一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사유와 존재의 일치, 주체와 대상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퇴계 이황은 이 심여리일이 이루어지면, 학문에서나 예술에서 진정한 기쁨인 眞樂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작가가 '달빛 '과 '산천초목 '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 속에서 궁극적(초월적)인 기운과 이치를 느끼고 추구하면, 자연은 미학적인 공간인 동시에 고상한 품성을 함양하는 공간이 된다. 그러기에 허령한 마음 즉 깨끗하게 텅 비고 신령한 마음으로 자연을 지각하며 심미적 체험을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작가가 그림에 진정한 가치를 둔다면,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 여겨지며, 관객인 우리 역시 이 점을 알고 감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작가가 송, 죽, 매의 자연 대상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앎을 이루는 치지治知의 한 방법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내면주의적 성격이 강한 작가의 작품이 또한 자연과 자신을 들여다보는 수기修己적 인식의 과정으로 생각된다고 말하려 한다. 이 수기라는 논제는 성리학이 강조한 경敬-정신적 수양 개념-이라는 포괄적 명제와 관련이 깊지만, 여기서는 글의 짧음과 필자의 학식 부족으로 깊이 있게 개진할 수 없다. 단지 작가 주체의 수양이 심미 창조의 전제이자 관건이 된다고 보는 한에서 부각시켜보려 하는 것이다. 작가에게서 돋보이는 실로 정밀하고 성실하기 그지없는 사실 묘사의 과정은 자기 수양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제작법은 작가에게 절실한 마음 표현을 위한 정칙이자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길道이 된다. 하지만 수기적 인식 때문에 작가의 제작과정이 순수한 감정 표현을 억압하거나 긴장된 엄숙함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은 결코 메마르지 않고 도덕적 교훈에 얽매여 있지도 않다. 은은한 달빛 속 나무들은 한가로이 우리 눈길을 사로잡고 무아지경에 이르게 하며,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게 한다. 마치도 존재 근원과의 만남- '心與理一 '-을 통해 알 수 있는 저 궁극적 즐거움을 작가는 누구보다 아낌없이 체현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재삼

작가의 달빛 그림들은 어둡고 고요하다. 그 어둠은 자연의 본래 모습인 불가해하고 적요한 텅 빔의 공간-天地玄黃의 공간-을 암시하며, 그 공간을 비추는 달빛은 어둠 아래 잠재된 생명의 기운을 밝혀낸다. 달빛이 어둠 속 물상들을 감싸며 혼연한 일체를 이루면, 산천초목은 이 합일을 통해 여여하게 생동하는 기운을 흘려보낸다. 작가는 이와 같이 자연이 주는 흥취인 山林至樂에 흠뻑 빠져, 자연과 무아지경으로 하나 되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퇴계가 '일어날 줄 모르고 밤 깊도록 앉아' 매화를 완상하며 시작詩作을 했을 때도, 이와 같았으리라 여겨진다. 작가의 자연 체험이 이처럼 그림 안에서 깊은 내면 의식과 일치된 채 나타난 덕분에 관객 역시 그의 그림들 앞에서 인간 본성이 자연지성自然至性임을 깨우치는 미적 체험을 할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달빛 속 산천초목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내지는 주변 공간 너머에서 지각되는 신령한 기운-이 기운을 묘사하기 위해 작가의 리얼리즘의 형식미는 성립된다-의 본연은 과연 무엇인가? ● 달빛을 더듬고 그 빛에 취하며 그 빛의 울림에 먹먹해하는 작가-그의 그림 앞에선 우리 관객도 마찬가지다-의 자연 합일은 '꽃향기 옷에 가득하고 달빛은 몸에 가득' 하다고 한 퇴계의 자연 합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자연지성의 본성으로 지각하게 되는 저 공간 너머 기운의 본래 근원은 한마디로 요약해서 그러한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전제해주는 性 즉 理이다. 理는 자연과 인간 둘 사이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화해하게 하며, 인간 본성인 자연지성을 일깨우고, 인간과 자연의 기운을 상호 조화롭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모든 존재와 기운의 원인인 것이고, 지각하고 사유하는 인간 주체의 마음을 주재하는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라면, 이제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달과 그 빛을 반영하는 산천초목의 형상들은 자연스레 그리고 무위롭게 理의 기운을 비추는 존재들로 이해가 된다. 그리고 달빛은 어두운 공간을 가르는 맑은 정신의 상징으로, 송, 죽, 매와 폭포의 자연적 속성은 세속의 때에 물들지 않는 고결한 정신-퇴계는 이를 절개라고 표현했다-의 상징으로 파악이 된다.

이재삼

이재삼 작가가 표상해내는 자연 이미지들, 달빛과 송, 죽, 매는 우리 고유의 문화적 감수성으로 혼쾌히 소통하고 수용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그림 앞에서는 누구든 세속적 지식에 가로막힘 없이 감정이입하고 몰입할 수 있는 장점에 가까운 특성이 있다. 그런데 작가의 정밀한 묘사와는 대조적으로 낮은 명도의 어두운 화면과 짙은 목탄 채색은 그의 의중이 대상 자체에 대한 즉물적인 재현에 있지 않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러니까 관객이 대상을 어떻게 경험해야 할지, 가령 단순한 시각적 경험에 그칠지 아니면 정신적 심미의 차원에서 경험할지를 선택하도록 한다는 말이다. 만일 그 작품이 달빛에 비친 소나무라면, 맑고 은은한 달빛과 어우러진 소나무의 아름다움과 달빛 아래 어두운 공간의 정취 및 기운을 느낄 것이요, 이 흥취와 더불어 정신적 사유를 하게 된다면, 인간의 자연지성을 회복시켜주는 자연 합일에의 성찰과 이를 이끄는 근원적 이치인 성즉리性卽理를 직관하는 경험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관객이 그의 작품 앞에 서서 적극적인 사유를 실현하지는 않을 터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작가의 그림 속에서 달빛과 산천초목을 빌어 정감 있게 표현된 心意를 교감하고 즐길 수 있다면, 또는 어둠 속에 빛나는 물상들을 대하는 작가의 마음과 자연의 경계가 서로 만나고 있음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작품이 우리의 정신적 삶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확신한다. ●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금 퇴계의 감성이 짙게 뭍어나는 자연관을 담은 시 한 수를 덧붙이고자 한다: "달은 차갑게 못에 비추고 집안은 고요한데, 그윽한 방안에서 조용히 (달빛의) 비고 밝음을 즐긴다." (『退溪先生文集』 중 卷1의 시 "秋夜"에서 발췌) ■ 서영희

이재삼

마디 하나에 또 마디 하나 / 천 개 가지에 만 개 잎이 모여도 / 내가 기꺼이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 벌과 나비를 붙들지 않으려 함이네 / (청나라 화가, 시인 정섭(鄭燮, 1693~1765))

이재삼

사물마다 고유한 형상이 있습니다. / 사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이, / 그 고유한 형상의 바깥(너머)이 만들어 내는 빈 공간입니다. / 그 어둠, 그 여백, 보이지 않지만 / 그 안에 비경이 있습니다. 일종의 '초월'일 것입니다. / 그림엔 보이지 않지만 달빛이 있어요. / 숲은 신령한 존재로 드러나는데, / 달의 빛, 달의 소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재삼)

이재삼

달빛의 매혹 ●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고종석은 채호기의 시집 『수련』에서 "너의 몸은 보이지 않아. 그러나 너의 몸의 미세한 부분을 확대하면 거기엔 꽃잎실로 짠 꽃천들이 너울거리지."와 같은 시행을 읽고 "그들의 발가벗은 육체는 서로에게 후끈 달아, 더러 눈맞춤의 단계도 생략한 채 입맞춤으로, 배맞춤으로 돌진한다."고 의역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수련』의 공간을 수련과 물과 빛과 공기의 세계라고 말한 뒤, 수련의 몸뚱이 둘레에는 밀레토스 철학자들의 상상 속에 존재했던 네 원소 가운데 물과 공기와 불(빛)이, 그것들의 육체가 배치되었다고 고백했지요. 채호기의 '수련'을 이재삼의 '대나무'로 바꿀 때 사물과 풍경의 에로티시즘은 빛을 발합니다. 사물과 빛의 성애로 터질 듯 충만한 것이죠. 대나무의 몸(짓)에도 물과 공기와 불(빛) 그리고 흙(대지)가 배치되어서 미학적 둘레를 형성하기 때문이에요. ● 오랫동안 '지조와 절개의 미학'을 함축했던 대나무는 왜적의 칼에 오른 팔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왼팔로 붓을 잡아 절정의 미학을 꽃피웠던 탄은 이정(灘隱 李霆, 1541-1622년 이후)의 묵죽도(墨竹圖)에서 오롯해요. 숙종(肅宗, 1661~1720)은 이정의 여덟 폭 묵죽병풍을 구해 본 뒤 "숲을 이루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듯하다. 묘한 필치가 아니면 어찌 이러하리오. 오작(烏雀)이 보면 반드시 날아와 앉으려다 떨어지리라."라는 평을 『열성어제』에 「탄은묵죽팔폭병풍(灘隱墨竹八幅屛風)」으로 남겼어요. 그의 그림은 풍죽(風竹)과 우죽(雨竹)에서 아름답죠. 왜적의 칼날을 견딘 그의 정신이 댓바람에서 힘찼던 것. ● 수운 유덕장(峀雲 柳德章, 1694~1774)도 묵죽을 잘 그려서 이정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유덕장의 묵죽도를 보고 이렇게 평했죠. "수운(峀雲)의 죽(竹)은 창경(蒼勁)하고 고졸(古拙)하여 팔목에 금강저(金剛杵)를 갖춘 듯하다. 탄은(灘隱)에 비기면 어느 한 구석이 빈 듯하지만 천학(淺學)의 무리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였을까요?「수어산수관집(峀魚山水館集)」에서 유덕장은 이정과 자하 신위 (紫霞 申緯, 1769~1847)와 더불어 동국화죽(東國畵竹)의 3대가라 불렸어요. ● 나는 그들의 후예로서 이재삼(목탄화)과 최병관(사진), 홍성민(수묵)을 신동국화죽(新東國畵竹)의 3대가라 부르고 싶어요. 이재삼의 목탄화가 어둠의 여백, 그 너머의 매혹을 드러내는 미학적 대상으로서 대나무를 그리고 있다면, 최병관은 흑백사진으로 대숲에 어린 '빛의 그늘'을 깊게 포착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죠. 반면, 홍성민은 연진회와 아산 조방원 문하에서 수묵을 익힌 뒤, '곧은 지조'의 뜻을 저항의 상징으로 표출했어요. 민중의식과 시대정신의 미학을 실험했던 홍성민의 대나무는 현재 '아시아-샘'이라는 화두로 넓어져 있죠.

이재삼_MOONLIGHT IN FOREST展_해움미술관_2016

청나라의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정섭(鄭燮, 1693~1765)은 예술과 현실을 접목해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했어요. 그는 시서화를 잘해서 삼절(三節)이라 불렸고 관직을 그만둔 뒤에는 양주에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렸죠. 그 때 대나무를 즐겨 그린 것은 강직하여 불의에 굽히지 않는 그의 성품 때문이었어요. 그는 많은 중생들과 어울렸고 자유로웠으며 호방했죠. 양주사람들은 그런 그를 '권세를 뜬구름으로 여기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고고하게 살아간 괴짜 예술가'라고 불렀고 팔괴(八怪)라고 했어요. 우리가 흔히 '양주팔괴'라 부르는 바로 그 예술가들 : 금농(金農), 황신(黃愼), 이선, 왕사신(汪士愼), 고상(高翔), 정섭(鄭燮), 이방응(李方膺), 나빙(羅聘). ● 정섭이 그린 「죽석도(竹石圖)」(1735) 화제에 이런 시가 있어요. "우레 그치고 비 개어 햇살 비스듬히 비치니, 한 줄기 새 대나무 곱게 흔들리네. 푸른 깁 바른 창 위에 그림자 비치니, 문득 붓과 종이 꺼내어 그려보았네." 그 외에도 많은 제화시(題畵詩)가 있고, 「석죽(石竹)」, 「죽(竹)」, 「이죽(籬竹)」, 「순죽(笋竹) 2수」등의 시를 남겼으며,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난, 수많은 세월 절개를 지키는 대나무, 영원히 자리를 뜨지 않는 바위"를 배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죠. 그렇다면 이재삼의 목탄화와 대나무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중략).. ■ 김종길

Vol.20160707b | 이재삼展 / LEEJAESAM / 李在三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