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6_0627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마도예술공간 AMADO ART SPACE 서울 용산구 한남동 683-31번지 Tel. +82.2.790.1178 amadoart.org
1. 적과 동지의 구별 ● 정치는 역사적 시기마다 구체적으로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언제나 한 사회가 운영되는 원리로 기능했다. 한 사회의 운영자들은 최고의 정치적 이상을 구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의 방법으로 사회를 운영한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정치는 지배질서를 영속하려는 (비)합법적인 절차이며, 오직 자신들만이 소유하고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통치의 수단이다. 그들 이외의 집단이 정치를 점유하려 할 때 즉각적인 처단과 탄압으로 대응한다. 정치가 한 사회에서 지배 집단의 소유물일 때, 모든 질서는 그들의 운영원리에 따라 규정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운영자들은 모든 경우 그 시대 경제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 지배할 능력과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믿는 소수의 집단이다. ●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 어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도 불멸하지는 않았다. 그 시대의 생산양식의 모순에 의한 붕괴나 피지배계급의 전복으로 이러한 관계는 지양(aufheben)되었다. 따라서 한 사회 안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은 언제나 긴장(갈등)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들의 관계는 늘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한 사회를 운영하는 지배계급에게 계급적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은폐되어야 할 그 무엇이며, 피지배계급에게 계급적대는 비록 그것이 침잠해 있다하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신들의 존재 기반이다. ● 적대성 개념은 여러 철학자, 정치가에 의해 선언되고 발언되었는데, 그중 1932년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The Concept of the Political)은 적대성을 논의할 하나의 참조점을 제공한다. 이 글에서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핵심을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 규정하면서 "적이란 경쟁상대 또는 상대방 일반은 아니다. 또한 적이란 사적인 혐오감 때문에 증오하는 상대방도 아니다. 적이란 단지 적어도 때에 따라서는, 즉 현실적 가능성으로서 투쟁하는 인간의 전체이며, 바로 그러한 전체와 대립하는 전체이다. 따라서 적이란 공적인 적만을 말한다."고 서술했다. ● 슈미트의 적대성 개념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적대를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과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 이 두 계급은 자본주의의 시작과 함께 출현했고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전자가 자본 운동의 의식적 담지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후자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만 생존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대립은 생산수단의 (비)소유라는 경제적인 사실로 규정된 것이지만, 나아가 사회의 정치적인 운영 원리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경제를 소유함으로써 정치를 행사하는 지배계급의 적은 노동계급이다. 자발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을 굶어 죽도록 만드는 것, 변화를 요구하는 모든 시도를 폭력과 범죄로 규정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운영 원리이다. 반대로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에서만 자신들의 적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시위나 파업과 같은 형태에서, 혁명과 같은 구체적인 투쟁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노동계급이 작업장에서, 현장에서, 거리에서 끈질긴 저항과 거부를 지속했다는 사실 또한 직접적인 충돌은 아니더라도 적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공포스러운 혹은 위태로운 세계 ● 적에 대한 지배계급의 일관된 입장과 달리 노동계급의 계급적 인식이 특수한 것으로만 남게 되었을 때, 즉 노동계급이 적에 대한 구별 능력이나 의지가 결여될 때, 그들은 정치적인 존재이기를 멈춘 것과 마찬가지다. 김상돈의 작품 「허블-멈블(Hubble-mumble)」에서는 이러한 부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천착한 사회적 풍경으로서의 얼굴, 그리고 양복바지의 하반신만 남은 신체는 인민의 양가성에 대한 화답이다. 이 뒤틀린 모습은 풍자이자 어떤 의미에서 희화화이기도 하다. 입이 없는 큰 얼굴과 눈을 관통하는 세속적인 오브제의 결합은 성스러운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속된 얼굴을 담아낸다. 서로를 짓누름으로써만 그 민낯을 드러내고야 마는 해골 또한 파국을 자처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이 얼굴들과 함께 설치된 하반신의 신체는 작가가 2013년 제작했던 「수 노인」이다. 복과 수명의 신으로 알려진 수 노인이 우리 시대에 어떤 화(火)를 초래하고 있는가를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 속된 얼굴과 하반신의 신체를 배치하면서 작가가 붙인 제목은 「허블-멈블」이다. 자본과 과학이 우주마저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 인류는 위대한 탐험을 한다고 자부하는 시대에, 인간 개인은 초라하다. 현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웅얼웅얼 댄다. 개구리울음처럼 시끄럽지만 쓸데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가 바라보는 우리 시대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고 공포스럽다. 온전할 수 없는 얼굴, 잘려나간 신체, 웅얼거림이 만들어낸 풍경은 우리가 마주한 사회이자 어쩌면 우리가 같이 만들어가는 사회의 일면일지 모른다.
김상돈이 사회적 얼굴들을 공포로 재현한 것과 달리 권용주는 생존 앞에서 어떤 힘으로든 버텨내는 인민의 상태를 구축한다. 물론 여기서 조직된 인민의 정치적 상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자본주의와 국가로부터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낱낱이 분리되어 각자의 생존을 책임져야만 하는 불안정한 인민의 상황을 마주하게 한다. 「별다른 방법은 없어요」는 쓰임을 다한 물건의 더미를 구축하여 생존에 대한 양가적인 에너지를 끌어냈던 「부표」 작업을 계승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인민이 직면한 현실에 대한 구축물로 자리한다. 폐기물을 오브제로 이용했던 과거의 작업과 달리 종이, 나무, 시멘트 등으로 제작된(재현된) 폐기물들은 서로를 지탱하고 부축하며 임시적인 기념비가 된다. 권용주의 설치작업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쌓아 올린 폐기물 더미나 임시방편으로라도 그럴싸한 생존의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흔적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형식을 통해 그들의 삶의 조건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인민의 상태가 국가의 체제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국가는 언제나 한 계급을 착취함으로써만 다른 계급에 시혜를 베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별다른 방법은 없다'고 작가는 체념하듯 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가 쌓은 임시적 구축물은 인민이 버티고 있는 삶에 대한 견고한 반영이란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그의 기념비는 체제의 안정된 삶으로부터 밀려 나간 사람들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는 삶에 대한 긍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김상돈이 현실을 바라보면서 부조리한 사회를 풍자적으로 드러냈다면, 권용주는 자신이 마주했던 사람들의 삶의 형식을 반영하면서도 그들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기념비를 구축한다. 두 작가의 작품에서 계급적대가 적극적으로 표명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관찰한 사회가 결코 안온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 결코 은폐될 수 없는 적대가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함을 시사한다.
3. 희생 혹은 구원의 이미지 ● 계급적대로서 적과 동지를 명확히 구별한다는 것, 이러한 주체적 사고는 자기 상황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연결된다. 적을 향한 인민의 투쟁이나 혁명과 같은 구체적 상황에서 인민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인민은 대표될 수 있는가. 바리스 고크투르크와 강태훈의 작품에서 드러난 인민은 단수 혹은 복수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러나 단수와 복수는 수의 이미지를 넘어선 어떠한 주체로서의 인민을 상상할 수 있을까와 연결된다. ● 바리스 고크투르크(Baris Gokturk)는 상징적인 인물과 도상을 이용하여 인민의 희생 혹은 구원의 이미지를 끌어낸다. 화염 앞에 두 팔을 뻗은 한 사람의 모습을 담은 걸개 작업 「Untitled (Baltimore)」은 모든 체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지만, 오히려 공적인 억압 혹은 부당함에 맞서 자신을 내던지는 희생의 이미지를 제안한다. 대의와 연결된 희생은 한 인물의 내적 갈등을 넘어서는 하나의 좌표로서 의미를 생성해내는데, 그것은 현실을 바꾸려 하는 용기이자 다른 세계에 대한 소망을 담아낸다. ● 그가 「Untitled(Robespierre)」에서 제시한 또 다른 한 사람은 1789년 프랑스혁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이다. 그의 눈감은 얼굴은 단두대에서 처형된 이후의 데스마스크라고 알려진 것으로, 작가는 이 이미지를 이용하여 7개의 얼굴을 만들고 쌓는다. 잘려나간 얼굴은 하나였지만 소환된 여러 개의 얼굴은 기묘한 모습을 드러낸다. 구원자 혹은 희생자로서 프랑스혁명의 기념비-얼굴은 그 자신의 실패를 넘어선 어떤 의미를 던져준다. 인민은 혁명을 통해 절대왕정을 무너뜨렸지만, 역사적 한계로 인해 그들의 세상을 즉시 성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역사 안에서 그 유예된 혁명은 여전히 인민의 몫이었다. 지금 우리 앞에 스러져 있는 그 얼굴은 강력한 지도자를 넘어선 복수로서 인민의 얼굴을 상상하도록 한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인민의 집단적 힘을 곧바로 상상하기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인민은 「Untitled(Eagture 20-21)」에서 한 몸으로 뭉친 독수리처럼 썩어 있는 사회를 뜯어내고 있을지 모른다.
강태훈의 작품 「잔여의 공간」은 시위와 투쟁의 현장을 담은 영상과 사진을 변용한 것이다. 작가는 당시의 상황을 직접 유추할 수 있는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그 상황에 놓여 있는 인민의 움직임을 느리게 포착한다. 시위와 투쟁의 격렬함 대신 과거는 유보된 흔적으로 제시되지만, 그것이 과거를 추억하거나 기억하는 것일 수만은 없다. 그가 천착한 인민의 에너지는 여전히 현재화할 수 있고/있어야 할 주체적인 정신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인민은 운동의 수많은 실패를 통해 모순을 경험했고, 문제를 풀어내는 것도 인민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영상과 사진이 투사된 복수의 시점, 즉 천장에 매달린 여러 유리-스크린은 역사적 사건의 차이를 담아내면서도, 그럼에도 그것들을 보유한 인민의 경험을 하나의 통일체로 엮어낸다. 인민은 결코 단수 혹은 다수의 문제는 아니다. 계급적인 자각이 없다면, 인민은 단지 대중 혹은 개인에 귀속될 뿐이다. 그가 구원하고자 했던 역사, 사건은 단순하게 인민의 힘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민의 존재를 개념화하고, 이를 현재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4. 적대의 기념비 ● 『Antagonistic Monument』는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급속히 기만되었던 '계급'을 중심에 주고, 우리 사회에 '계급적대'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어떤 식으로든 계급적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미술 언어로 풀어내고자 기획된 전시이다. 90년 이후 한국사회가 변했을 때, 사람들도 변해갔다. 계급의식을 삭제함으로써 대중이 되어갔고, 개인의 정체성이 자리를 확보하는 동안 계급은 부지불식간에 폐기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적과 동지를 식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쉬이 타협함으로써 자신의 계급을 방기해 버렸다. 사회주의의 스러짐 앞에서 지식인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비록 자본주의가 절대적이라고 옹호하지는 않더라도 근본적으로 세상은 변했다고 믿었다. 사회나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삶을 절대화하는 쪽으로 자신의 몸과 신념을 그리고 이론을 바꾸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자본과 지배계급은 일관되게 자신들의 본능적인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들의 편에 선 사람들은 계급은 지나간 것, 낡은 것,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떠들어 댔다. 그런데 계급은 그들의 생각처럼 머릿속에서 간단히 정리한다고 초월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계급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가 어떤 사회적 관계를 이루고 있고, 그 사회적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 전시에서 드러난 소재는 달랐지만, 작가들은 인민의 상태나 상황, 부정성 혹은 긍정성, 운동과 생성의 에너지 등을 끌어냈다. 즉 어떤 식으로든 지배계급에 적대하는 인민의 모습을 그려냈다. 우리 사회에 계급적대가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유포하고 밝혀내고 그것을 넘어서고 싶은 사람은 인민이지 결코 지배계급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그러한 일을 자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이 전시의 목적이었다. ■ 신양희
Vol.20160627a | Antagonistic Monument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