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조은 GALLERY JOEUN 서울 용산구 한남동 271-7번지 Tel. +82.2.790.5889 www.galleryjoeun.com
아시아의 블루칩 윤상윤작가의 작품세계 – 현실 속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린 명화 "감상의 자유, 요동치는 감정 자체도 이미 작품이다" ● 그의 작품에 늘 등장하는 반쯤 잠긴 물의 공간에 익명의 집단이 무엇인가의 행위를 하고 있는, 초현실적 장면들은 사회 집단의 울타리에 편입되기 위해 욕망을 억압하고 자아를 은폐하는 현대인의 군상을 드러낸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물은 자아 이전의 단계이자 무의식의 공간을 나타내고,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ego) 그 무엇, 그리고 외로이 존재하는 슈퍼에고를 의미한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초자아는 고립 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독한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색감을 밝게 사용했다. ● 윤상윤작가는 추계예술대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 Chelsea College of Art & Design에서 'Fine Art'를 전공했으며, 난지 창작스튜디오(서울시립미술관운영)에 입주작가로 활동했으며 2012년'종근당 예술지상'에 선정되어 수상한 바 있다. 영국 런던에서 전시를 시작한 윤상윤은 올해 상하이아트페어와 뉴욕 등 외국의 유수한 갤러리들로부터 초대를 받는 등 국내 외 콜렉터들의 주목과 관심을 받으며 아시아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젊은 작가이다.
이은채작가의 작품세계 – 이중그림 속 영원한 '빛'을 통한 Deep Peace "작품에 등장하는 촛불처럼 스스로의 생명이 다할 때 까지 주위를 밝게 하는 화가가 되고 싶다" ● 그동안 작가는 조르지오 드 라투르의 내면의 빛, 베르메르의 투명한 아침 공기와도 같은 빛, 위인들에게 바치는 오마주를 경유해, 마침내 살아 있는 전설들을 빛의 한가운데로 불러들였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빛은 어둠의 또 다른 얼굴이 되었다. 빛이 어둠이고 어둠이 빛인 것이다. 근작의 주제를 Deep Peace 곧 깊은 평화라고 부르는 것도 이때문은 아닐까? 아마도 작가에게 촛불은 자기내면과의 흩어지고 흔들리는 때로는 번민하고 안쓰러운 자신과의 내적 화해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게 작가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시적인 빛의 공간'에 이중그림(그림 속에 또 다른 그림이 들어있는) 그리고 부재의 미학을 통해서 자신만의 오롯한 가상현실이며 상상공간을 펼쳐놓는다. ● 이은채 작가는 세종대학교 회화과 및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고 그동안 홍콩, 싱가포르 및 아트페어와 개인전을 통해 많은 국내 외 콜렉터들에게 알려진 작가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한국산업은행, 이탈리아 주 밀라노, 미국의 시카고 대한민국 총영사관 등 공공기관과 주요기업에 소장되어 있다. ● 갤러리조은의 조은주 큐레이터는 "자아와 기억 세부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태도가 닮은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하나의 완성도 높은 연주곡을 듣는 느낌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전시라며, 새로운 미술문화 중심지 한남동에서 '한여름 밤의 꿈'같은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라고 말했다. ■ 갤러리 조은
이미지의 기원 또는 우상이 파괴되는 곳 ● 각계각층의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이 일상의 평범(平凡)이 가득 찬 곳에 있다. 무언가 가득 찼다는 느낌이 드는 곳에서 회합을 갖고 있다. 불안하게도 극단적인 투쟁과 결기가 벌어지는 어떤 사건의 현장일지도 모르는 곳임에도 평온하고 평온한 풍경이다. 이곳은 존재하지만 존재한다고 말 할 수도 없는 공간이다. 한 시인이 최근에 발견한 사실 또는 단어를 발표하거나, 풀리지 않던 우주의 비밀을 연산하는 수학자가 등장하는 곳이다. 꿈속의 이상적인 화실이 등장하고 멋진 예술가와 그의 모델이 있다. 아이들은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 모인 것처럼 보인다. 나룻배는 강 위를 거슬러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 이들은 무언가에 홀려있거나 홀려있음 그 자체로 등장한다. 실체가 불분명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 그러나 그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장면들의 세계다. 이상한 빛이 비치고 푸른 하늘에 물고기들이 떨어져 내리는 날 집밖으로 나선 여행자들의 회합일지도 모른다. 우연과 필연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살던 곳에서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같은 문제로 당황하고 있는 낮선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된. 사람들은 배우고 경험하고 성장한다. 만남과 대화는 개인의 진화(進化)를 상기시킨다. 개인의 성장은 일개 개인의 성장이 아닌 그 개인이 속한 전체 종의 성장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더디더라도. 익숙한 듯 기이한 풍경. 모호하고 복잡한 경우 잠시 머물게 되는 사람의 의식 속의 어느 공간. 그곳에서 다른 존재로 변신한다. 이곳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모여 있는 곳으로 메마른 공기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액체로 가득 찬다. 물속에서 유영하던 아주 작은 존재에서 점차 스스로 호흡하고 자의식을 갖고 자신과 이들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다.
강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는 유비(analogy)처럼 유동하는 세계는 무수한 차원으로 분해되기도 하고 하나의 몸으로 뭉쳐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과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불려와 있는 곳은 마치 미드의 한 시즌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른 시즌이 되면 이 드라마는 같은 듯 다른 흐름으로 유동하는 또 다른 드라마가 될 것이다. 각각의 차원으로 무한히 분해되어 가는 과정을 그려나가는 것은 장신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것이 부재하게 되는 공간에서 불굴의 헤파이토스가 마술을 부리는 곳이다. 이미지는 마술처럼 한 방울의 액체와 약간의 무기물을 재료로 화려한 광채를 뿜는 운명으로 변화한다. 밤하늘의 성좌처럼 불가능한 시간과 공간을 격해서 감지되는 이미지는 본래 신비인 것이다.
윤상윤의 그림은 정보의 바다에서 섬처럼 격리된 이미지들이 한 장소에 모인 마술적인 혼융의 풍경이다. 이미지는 미지의 수상도시에 모인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가 생각함으로 해서 그것은 존재하게 되었다. 존재의 부재에서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불안의 숙명을 가로지르는 노동이다. 아름다우면서도 불길한 풍경이 화가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기원을 알 수 없고 그 최종 국면도 알 수 없는 무한히 반복되는 변형하고 증식하는 이미지들은 일견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신의 창조와 생명력의 분출에 휘말려 낯선 곳에 모여 공간을 만들어내는 윤상윤의 이미지는 프랑스의 거장 뫼비우스(장 지로Jean Giraud)가 창조한 세계와 거울상처럼 닮았다. 이곳은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가 창조한 이미지의 또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안과 밖, 위와 아래, 과거 현재 미래의 경계가 없는 일상을 비틀어 놓은 세계. 그곳의 풍경은 뫼비우스의 띠(Möbius strip)처럼 세계를 비틀어 구조와 인식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재현한다. 실재와 허구가 동일한 존재의 무게를 가지고 우주의 법칙이 동일하게 작동하는 세계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고 동시에 부재하기도 한다. 동양과 서양이 혼융되는 곳이기도 하다. 개인의 경험이 개인의 영역에 갇혀있지 않은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이 될 수 도 있는 세계의 풍경은 이렇지 않을까. ● 윤상윤의 경험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한 것이다. 절대적인 평범과 한 재료와 한 사건에 깊이 내려가는 장인의 태도 단지 그것이다. 여기에 이미지를 둘러싼 모든 신비가 있다. 그것은 화가의 운명이자 이미지의 운명이다. 우리는 그 기원을 알 수 없다. 화가의 이미지는 망각의 강을 건넌 운명인 것이다. 베니스를 닮은 장소는 바로 그 닮음으로 인해 불안을 예감하게 한다. 그곳은 망각의 강 어딘가에 자리한 미지의 장소가 아닐까. 사람들은 운명에 붙들려 망각의 강을 건너고 있으나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작가의 재능, 노력, 열정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설득하고 있으나 서로는 사실 결코 공감할 수 없는 다른 시간과 장소의 존재들이니 교감을 이루기는 난감한 것이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세상을 창조하고 밤을 분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또 사람들에게는 물의 운명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유동하는 이미지의 공허한 운명으로 미완성된 꿈의 공허한 운명이 아닌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변화하고 유동하며 정착하지 못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의 비극성에 사람들은 공감한다. 화가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 또한 그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윤상윤의 이미지는 바슐라르의 한 방울의 물과 동일한 메타포이다. 이곳은 물위의 알렉산드리아처럼 세계의 지식과 정보와 존재가 모여 있는 도서관의 도시이자 역설적이게도 신이 부재하는 곳이기에 인간이 신의 역할을 부여받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를 창조하는 노동과 이미지의 기원이 되는 장소 말이다. 모든 가치와 결별하는. 끔찍한 환각과 망각이 모여드는 곳. 세상의 모든 관습과 언어, 관념과 우상이 파괴되는 그리하여 신마저 해체되어 새롭게 출현해야하는 풍경은 이럴 것이다. 이미지의 기원 또는 이미지의 운명은 존재가 쉼 없이 유동하는 곳에 있다. ■ 김노암
알레고리,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인간 하이데거는 예술을 세계의 개시에다가 비유했다. 예술이란 전에 없던 세계,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세계, 가능적인 세계며 잠재적인 세계, 예술이 매개가 돼 불러내지 않았다면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세계를 여는 행위이다.
이은채는 빛을 다루는데, 그 빛의 주요 광원이 촛불이고 램프다. 촛불과 램프는 어둠을 (일)깨운다. 촛불과 램프를 켜면, 잠자던 어둠이 부스스 깨어난다. 전깃불 아래서 라면 결코 그렇게 서서히 깨진 않는데, 전깃불은 어둠을 갑자기 깨우고 폭력적으로 깨운다. 더욱이 촛불과 램프는 그것이 켜진 주변에 마치 소박한 무대와도 같은 어둠과 대비되는 공간을 만드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이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 같고, 어둠이 저 속에 품고 있다가 뱉어낸 현실 같고, 그렇게 어둠이 잉태한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는 친근하면서 낯 설은 느낌을 준다. 마치 주변의 어둠이 감싸 안으면서 보호해주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우호적이면서 설레는 감정에 빠지게 만든다. 여기서 친근하고 우호적인 느낌은 아마도 존재가 유래했을 원형이며 자궁(원형적 자궁? 모태?)에서의 기억을 어둠이 떠올려주기 때문이고, 그러면서도 그 감정이 낯설고 설레는 것은 어둠이 열어 보이는 신비를 목격하고 있다는, 그 비의의 현장(순간)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의 자각에 연유할 것이다.
다시 전깃불과 비교해 보면, 전깃불은 결코 이런 공간을 만들지도 이런 감정을 자아내지도 않는다. 그건 어둠을 화들짝 깨우고, 미처 어둠이 자기를 열어 보일 새도 없이 어둠을 빛의 변방으로 몰아낸다(어둠을 추방한다). 촛불과 램프가 불 밝히는 빛은 이처럼 정작 빛이 아닌 어둠을 위해서라는 점이며, 빛 자체가 아닌 어둠을 열어놓기 위한 구실이며 매개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어둠이 열어 보이는 세계, 촛불과 램프가 매개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열리지 않았을 세계, 그 신비와 비의에 동참하고 있다는 어떤 의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은채는 빛(엄밀하게는 빛의 공간)을 그리는데, 특히 촛불과 램프를 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게 촛불과 램프는 말하자면 빛을 매개로 어둠을 열어 보이고,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로 건너가게 해주는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작가가 왜 촛불과 램프를 그리는지, 그리고 촛불과 램프가 열어 보이는 세계며 어둠이 잉태한 세계, 그 또 다른 현실이란 어떤 현실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 되겠다.
섣부른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 어둠은 빛 속에서라면 명명백백했을 사물(혹은 사물현상)을 그저 숨겨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빛 속에서라면 명명백백했을 사물(혹은 사물현상)을 낯설게 만들어 전혀 다른 사물(혹은 사물현상)을 되돌려준다. 그건 말하자면 전혀 다른 세계가 개시되는 극적 순간에 비유할 만하고, 그렇게 밤의 신비가 열리고 어둠의 비의가 열린다. 밤의 신비? 어둠의 비의? 바로 밤과 어둠이, 수치와 부끄러움이, 영원과 하루가, 무한과 유한적 존재가, 포옹과 포용이, 죄악과 원죄의식이, 범죄와 속죄가, 의식과 무의식이, 폭력과 성스러움이, 삶과 죽음이, 선과 악이, 지와 무지가 어떤 경계도 구분도 없이(특히 가치론적인 매김 없이)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어떤 경지에 속하는 일이다. 원형적이고 원초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촛불과 램프를 매개로 그린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런 경지며 차원의 현실(겹현실? 현실과 현실의 사이? 현실의 원형? 원형적 현실?)을 열어 보인다.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면서 낯선데, 그림이 친근한 것은 알만한 사물(혹은 사물현상)을 그려서이고, 그럼에도 보면 볼수록 낯선 것은 사물과 사물을, 사물과 공간을, 사물과 현상을 매치시키는 관계가 예사롭지가 않아서이다. 이처럼 예사롭지 않은 관계설정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미술사로 치자면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에 소급되는)과 관련된다. 현대미술에 대한 정의가 여럿 있지만, 그 중 유력한 것으로 치자면 배열과 배치의 기술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배열과 배치가 달라지면 사물과 사물현상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의미는 사물과 사물현상 자체에 속해져 있지 않다. 의미는 사물 고유의 성질이 아니다. 의미는 사물이 실제로 놓이는 문맥, 사물현상이 실제로 일어나는 맥락 속에서 결정된다. 그런 만큼 문맥이 달라지고 맥락이 달라지면 사물과 사물현상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현대미술을 의미론적인 문제로 보는 것이나, 배열과 배치의 기술로 정의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며,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 연동된다.
그리고 영원한 빛(영원 속의 빛)은 촛불이 매개가 돼 열어놓은 가상현실이며 상상공간이 도저한 현실과는 상관없는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아마도 상당한 예술이 이런 믿음 곧 저마다의 가상현실의 창조에 기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예지의 빛 시리즈에서 작가는 클래식과 재즈 뮤지션을 다룬다. 그동안 작가는 조르지오 드 라투르의 내면의 빛을 경유해, 베르메르의 투명한 아침공기와도 같은 빛을 경유해, 위인들에 바치는 오마주(경외감으로서의 빛)를 경유해, 마침내 살아있는 전설들을 빛의 한 가운데로 불러들였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빛은 어둠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빛이 어둠이었고 어둠이 빛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Deep Peace 곧 깊은 평화라고 부른다. 아마도 촛불이 매개가 돼 대면한 자기내면과의, 흩어지고 흔들리는, 때론 번민하고 안쓰러운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의미할 것이다. 촛불 본래의 의미일 수 있는 명상의 계기를 이제는 떠안을 수 있게 되었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는 이중그림(그림 속에 또 다른 그림이 들어있는)을 통해서, 차용과 인용(이미지의 생산학으로부터 이미지의 소비학으로 갈아 탄 현대미술의 변화양상과도 통하는)을 통해서, 부재의 미학(사물과 사물현상으로 사람을 대신하고 정황 특히 심리적 상황을 전달하는)을 통해서 자신만의 오롯한 가상현실이며 상상공간을 열어놓는다. 현대미술과 관련한 주요 형식실험의 지점들이며 성과들을 열어놓는다. 중요한 것은 그 지점이며 성과들이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맞닥트린 자기내면과의 조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기내면을 넘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인간(인성)의 알레고리를 예시해주고 있었다. ■ 고충환
Vol.20160623i | Ensemble at 한남-윤상윤_이은채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