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6_0623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권용주_김웅현_안경수_오용석_옥인 콜렉티브 임유리_장파_전소정_정덕현
기획 / 안소현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풀 ART SPACE POOL 서울 종로구 세검정로9길 91-5 Tel. +82.2.396.4805 www.altpool.org
퇴폐미술전과 퇴폐미술전 ● 예술을 둘러싼 말들에 부쩍 수동태가 많아졌다. 검열을 당했고, 예산이 삭감되었고, 공간을 빼앗겼고, 장(長)이 경질되었다. 그런데 이 문장들은 대개 대칭이 아니었다. 행위의 주체들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 나서지도 대답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잘 확인되지도 않았다. 비대칭적 수동태로 묘사된 예술은 사회가 붙여준 규정에 반박하고 대안을 찾느라 허둥대고 있었다. 사회가 예술을 이러저러하게 규정해버리고 나면 예술가들 스스로 그 문제를 떠안아 전전긍긍하고 토론하고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그 기준에 작업을 맞추어 가는 이런 상황은 바람직한 것인가? 예술이 이 지겨운 수동성을 벗어나 먼저 사회의 경직성과 편견을 드러냄으로써 사회를 규정할 수는 없을까? 이 전시는 이런 무모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 1937년 독일의 나치 정당은『퇴폐미술전』에서, 인종, 종교, 정치적 내용을 담은 작품들뿐만 아니라 형식적 파격을 시도한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해 노골적인 비난의 문구를 내걸고 전시하고, 작품의 일부는 해외로 반출하거나 소각하였다. 물론 이 전시의 목적은 유태인 예술가와 정치적 반대세력을 솎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결과로 보면 나치 정권은 절대악으로 규정되었고, '퇴폐' 예술가들의 명예는 복권되었다. 그래서 이 전시는 역으로 나치의 문화적 편협함과 무지를 드러내는 선명한 징후로 기록되었다.
나치 치하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열린 전시를 지금 굳이 다시 언급하는 것은 그것이 몇 가지 점에서 여전히, 의미심장하게 우리를 놀라게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당시 '퇴폐미술'로 규정된 작품들이 의외로 예술의 오랜 고민들을 붙들고 있는, 우리 눈에는 그리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는 작품들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작품들을 비난하는 나치의 논거들이 꽤 치밀해서 현재 우리가 속한 외견상 훨씬 합리적으로 보이는 사회에서 흔히 접하는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는 작품을 비하하기 위해 선택한 전시방식들, 즉 비난하는 텍스트의 배치, 많은 작품을 협소한 공간에 낯설게 거는 방법 등이 오늘날에는 권위와 모더니스트의 관습을 벗어나기 위해 사용하는 의도적 디스플레이 방식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시에는 '나치'라는 이름이 가진 절대악의 이미지를 고려할 때 좀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시감 또는 익숙함이 있는 것이다.
2016년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열리는『퇴폐미술전』에서는 9명/팀의 작가들을 통해 위의 세 가지 의외성을 다시 끄집어내보려 하였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권용주, 김웅현, 안경수, 오용석, 옥인 콜렉티브, 임유리, 장파, 전소정, 정덕현은 각자가 다루는 매체의 본성에 대한 고민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작가들이다. 그것은 이 작가들이 특정 매체만을 고집한다거나 매체 특수성을 염두에 두고 형식에만 매달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회화, 조각, 영상, 퍼포먼스 등은 그 효과를 말로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경험에 의지한다. 즉 그들은 (의도하든 하지 않든) 자신의 작품이 위치하게 되는 강한 사회적 맥락들을 인식하고 있지만, 여전히 낯선 색, 흘러내리거나 번진 물감, 야릇한 촉감, 픽셀이 드러난 영상, 신경을 두드리는 소리, 심지어 행위의 허무함 등을 의미가 발생하는 지점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 간단히 말해 이들의 작품은 통상적인 의미의 "개념적"이라는 말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여전히 내용과 형식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애쓰는 예술가의 고전적인 고민들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는 1937년 나치 전시를 패러디하여 이 '고전적'인 예술가들을 과격하고 신랄하게 비난하는 설명들을 붙여 보았다. 이 비난의 근거와 어조들은 실제로 예술에 대한 규제의 강화를 주장하는 여러 글과 언론보도를 참조해서 썼다. 만일 이 패러디가 성공적이라면 비난의 기준들은 이 사회의 경직된 통념들을 드러내는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비난들이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스스로의 입장을 가늠하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이들의 작품을 꼼꼼히 독해하는 길을 내주기를 바랬다. 이 분열증적 패러디의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어떤 예술을 '효과적으로' 비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째는 예술가들이 어떤 것을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는 의심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도덕은 막다른 골목처럼 절대적인 것이라 그 판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시공간 구성에 있어서는 이들 작품을 한줄 걸기, 정면성, 독립된 공간의 확보 등 작품의 독자성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의 관습들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전시공간이라는 매체 그 자체가 생산하는 의미들에 대해 함께 고민할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 이 전시의 의도는 단순히 우리 사회의 통념들이 실은 "나치와 다를 바 없다"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비판의 방식은 여전히 도덕적 절대성(나치라는 절대악)을 기준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예술을 규제하는 전략과 차별화되지 않는다. 이 전시를 통해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과연 우리는 경직된 사회가 어떤 종류의 예술을 규제하고 검열하기 위해 세운 전략들만큼 치밀하게 예술을 지키는 전략을 갖기 위해 노력했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의 예술이 금기를 건드려야 내일의 예술을 기대할 수 있다는 그 자명한 사실을,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설득할 만한 신중한 논거들을 갖고 있는 것일까? 예술에 대한 설명이 늘 비대칭적 수동형이었던 이유를 우리 안에서도 찾아야 할 시점인 것 같다. ■ 안소현
Vol.20160623g | 퇴폐미술전 Degenerate Art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