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6_0614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_10:00am~12:00pm / 일요일_01:00pm~07:00pm
사이아트 스페이스 CYART SPACE 서울 종로구 안국동 63-1번지 Tel. +82.2.3141.8842 www.cyartgallery.com
욕망을 관조하여 카르마에서 벗어나기 ● 이경희의 작업은 그동안 줄곧 작은 나무판에 매우 예리하고 정교하게 이미지를 새기고 검은 잉크로 찍어내는 인그레이빙 기법을 고집해왔다. 마치 뒤러의 동판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세밀하게 제작된 그의 목판화는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형상들로 태고적 신비와 상징주의적인 환상을 보여주었다. 20cm 미만의 작은 크기에 집요함이 느껴질 정도로 정교하게 응축된 작품들은 마치 손안에 우주를 담듯이 엄청난 밀도로 제작되었다.
이경희의 근작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보다 큰 화면에 콜라주 기법으로 재결합시켜며 판화의 개념을 회화적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질적인 대상을 결합하는 방식은 슈비터스의 콜라주나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 기법을 연상시키지만, 그 결합이 유기적이고 매우 자연스러워 마치 필연적 운명처럼 느껴진다. 다다의 콜라주나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이 이성적 질서를 해체시키고 우연을 통해 무의식에 도달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면, 이경희의 콜라주는 불교적 개념의 인연과 '연기(緣起)'의 법칙을 구현하는 듯하다. 여기에서는 우연과 필연의 인위적인 이분법은 내파되고, 수증기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수증기로 변하는 순환적인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듯이,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카르마(업)'라고 한다. 굳이 전생까지는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어제의 생각이 오늘의 나를 만들고, 오늘의 행동이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은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 인해 저것이 없어지는 '연기(緣起)'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이러한 우주관에 의하면, 우주의 삼라만상은 스스로의 특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만남과 인연 속에서 연속적으로 변해가는 일루전에 불과한 것이다.
이경희의 '작업'은 카르마와 '연기'의 법을 따라 "업(카르마)을 짓는 행위"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에서 이미지들은 모두 알아볼만한 구상적인 형태들이지만, 그것들이 어떤 일관된 서사나 특정한 대상을 재현하는데 봉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중량감 없이 허공을 부유하면서 일시적으로 만나 인연을 만들고, 머지않아 구름처럼 흩어질 운명처럼 보인다. 화면은 우연과 필연의 연쇄 속에서 파편적 이미지들이 운명적 인연으로 만나 조직화되며 소멸되어 가는 장소일 뿐이다. 이것은 일상의 물건들을 뒤죽박죽 섞어 '이미지의 고물상'처럼 만든 라우젠버그의 콤바인페인팅처럼 외부세계의 오브제를 그대로 가져와 삶과 일상의 경계를 와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이경희의 작업은 오히려 견고해 보이는 외부세계도 결국 사라져야 하는 일루전에 불과한 것임을 암시하게 한다. 이것은 해체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비관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변화하며 생멸의 과정 중에 있다는 '무상(無常)'의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경희의 초기 작업이 목판화의 작은 우주 속에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하나로 조직화되는 카르마의 생성작용에 주목했다면, 근작들은 그것들이 흩어지는 소멸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한 변화는 카르마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자유로운 해방의 상태에 이를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카르마의 작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을 주시해야 한다. 우리의 욕망이 결국 카르마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혼의 자유로운 선택을 방해하고 주체를 오직 카르마의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맛보고자 한다면 우선 사사로운 에고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의사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발견해야 하듯이 말이다.
작가로서 이경희의 기질과 관심사는 항상 사회적이기보다는 내향적인 면에 경도된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을 끊임없이 사색하고 분석하며 이해하려고 하며, 이 과정에서 욕망의 억압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경희의 과거 작업은 자신의 무의식의 심층에서 이미지를 끌어왔기 때문에 무의식의 표층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다룰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심리적 고통 없이 유희를 즐기는 방법이지만, 현실과 관련 속에서 일어나는 억압된 욕망이 여전히 잔존하기 때문에 카르마의 지배에서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이경희의 근작들은 작품의 주제를 무의식의 심층에서 표층의 문제로 전환시켜 자신의 욕망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고 들추어내고 있다. 이것은 용기 있는 변화이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대개 내면에 쌓아 올린 자신만의 굳건한 성이 무너질 것 같은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근작들에서 새롭게 등장한 돈 이미지나 핸드백, 하이힐, 안경, 햄버거 같은 일상 이미지의 등장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기호들이다. 여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젖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물질적 욕망과 잔상이 담겨 있다. 또한 얼마 전 백두산을 다녀오면서 접한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이미지도 등장한다. 과거에도 신화적인 이미지에 관심이 많았지만, 「사신도」는 보편적 무의식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한국적인 전통이라는 점에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처럼 전통과 현대, 사물과 인간, 동물과 식물 등 삼라만상의 다양한 이미지들은 작품에서 평등하게 시공을 초월한 무중력 상태에서 잠시 낯선 인연을 맺으며 생기(生起)하고 소멸한다.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선보이는 설치작품들인 「카르마」 연작들은 그동안 화면에서 이루어지던 것을 입체 조형물로 확장한 것이다. 여기에 이용된 철망, 전선, 병뚜껑, 옷걸이, 목걸이, 시계, 열쇄, 기념품, 인형, 가면, 상표, 티백, 구슬, 주어온 나무와 돌까지 각종 오브제들은 일상에서 누구에게 선물을 받거나 우연한 인연으로 얻은 소소한 것들이다.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여 버리지 못하고 모아 놓은 온갖 오브제들은 서로의 관계망을 만들며 어떤 유기체로 변신한다. 이러한 유기체를 구조 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다양한 색채의 전선이다. 전기신호를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전선은 이경희의 작품에서 마치 생명체의 혈관 같은 역할을 대신하거나 나무나 옷걸이 같은 오브제를 감싸주는 임무를 맡기도 한다. 그것들은 때로 자유롭게 삐져나와 진동하는 듯한 율동감으로 경직된 오브제에 기와 생명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체물들은 한결 같이 견고하고 육중한 중량감 없이 가늘고 부서지기 쉬운 형태로 머지않아 구름처럼 사라질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평면이든 입체든 이경희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관조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자가 됨으로써 카르마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성, 우연과 필연, 자연과 인공이라는 이분법은 우열을 다투지 않고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카르마의 질서 속에 순환된다. 그의 작업은 이러한 우주의 오묘한 섭리를 접함으로써 에고의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점에서 수행적 성격이 있다. ■ 최광진
Vol.20160614a | 이경희展 / LEEKYUNGHEE / 李京姬 / pr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