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6_0608_수요일_05:00pm
기획 / 천미림(우주는 대체로 텅 비어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175 Gallery 175 서울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B1 Tel. +82.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나는 말하는 너를 바라본다. 말하는 너는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너를 알아달라고 온 힘을 다해 새빨간 등을 켠다. 깜빡이는 등은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고 마침내 나는 그 열에 휩싸여 순식간에 꽥 하고 죽어버렸다. ● 죽어가는 신체는 열을 낸다. 시들어가는 삶은 괴로운 모습을 한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종류의 염증은 항상 특정한 신호를 동반한다. 이 중 열, 표정, 행동은 고통 받는 인간의 감각과 감정을 보여주는 신호다. 그러나 이 신호들은 타자에게 온전하게 공감될 수 없다.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너의 감정을 똑같이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가 나의 감정을 모두 알아주길 원한다. 네가 나의 신호를 읽고 염증에 공감하며 위로와 구원을 주길 바란다. 그래서 여기, 나는 나의 새로운 신이 될 너를 위해 등에 불을 붙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렴풋한 신호, 불명열(不明熱)이다.
예술가는 왜 자신의 개인감정을 작업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가- 영웅적인 작가정신으로 사회적 십자가를 지지는 못할지언정 사사로운 이야기는 삼가야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공연한 이야기로부터 우리의 질문은 출발했다. 작업은 인간으로서의 예술가가 관객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다. 이번 전시는 작가들이 그들의 개인감정을 작업이라는 신호를 통해 끊임없이 드러내고자 하는 이유에 관하여 말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보편감정인 고통을 다루는 매개 혹은 방식으로서의 예술에 대하여 고찰한다. 고통은 그들의 생활에 뿌리내린 특정한 형태의 염증이다. 이곳의 작업들은 작가의 개인적이고 모호한 신호에 대한 관객들의 완전한 공감불가능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온전한 몰이해 속에서도 작가와 관객은 인간이라는 동류이기에 갖는 유사경험과 보편감정을 통해 스스로를 보듬을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염증에 대해서, 우리는 언제든지 예술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다.
어렴풋하고 부정확한 신호는 그 빈 공간에 자의적 해석과 자기 공감의 여지를 담는다. ● 박광수는 새의 초상을 통해 개인감정이 타자에게 어떻게 설득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의 초상에는 표정이 없다. 새들은 표정을 짓지 않는다. 누군가의 얼굴은 불특정을 외면하고 있다. 바라볼 수 없는 얼굴은 대상의 감정적 신호를 읽어낼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대상은 분명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순간에 존재한다. 표정 없는 새들 또한 시시각각 무언가를 느끼고 경험한다. 표정의 부재는 감각과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모든 감각과 감정의 총체일 수 있다. 그는 불명의 신호로서의 표정을 다룬다. 표정의 부재는 바라보는 관객의 모든 감정을 담는다. 언젠가 입이 없는 캐릭터가 사랑받는 이유는 사람의 모든 감정의 순간이 무표정에 이입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무표정한 새의 드로잉들은 관객의 고통에 거리를 두고 조용히 응시하면서도, 동시에 바라보는 이의 감정을 담을 무한의 공간을 비워둔다.
심래정은 개인감정과 감각들이 타자에게 전달되기 위한 시각적 신호로서의 행위에 대하여 고찰한다. 그가 다루는 대상은 선으로 구성된 온 몸을 화면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목적이나 원인이 불분명한 기이한 신체 행위는 관찰자에게 특정한 신호가 된다. 무의미해 보이는 신호는 움직이는 대상의 삶에 피어난 염증에 대하여 유추하게 한다. 특정한 경향성이 없는 행위는 그 모호함이 주는 인식적 부재를 바탕으로, 바라보는 이의 감정에 따라 기쁨의 춤이 되기도 하고 일종의 제의도, 고통의 몸부림으로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관객은 그의 작업적 신호로부터 마치 몸부림과도 같은 행위의 의미를 자기경험적으로 해석하고 자의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예술이란 부정확한 신호라고 생각한다. 기쁠 때의 파랑은 청량하고 슬플 때의 파랑은 멜랑콜리하다. 개인의 삶에 자리한 각자의 염증은 불명의 신호를 통해 타자의 염증으로 치환되기도 하고 감정투영의 범주를 넓혀 더 많은 공감과 미적경험의 지평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것이 예술가가 개인감정을 작업으로 드러내고 관객이 그들의 작업을 사랑하는 이유다. 문득 미술에 대하여 말로 벌어먹고 사는 누군가가 자전적인 작업을 다이어리라고 비난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때 나는 예술위에 드러누운 타인의 인생에 침을 뱉을 다소 오만한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남에게 아주 관심이 많다.
어느 시인은 '시집의 헌사에 불火에게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不에게라고 썼다'고 했다. ● 엄마가 병을 얻은 후 나의 말은 전부 미래형이었다. 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이렇게 해야지. 한 번도 진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내뱉은 적이 없었다. 현실감이 없어서 나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끝에 물음을 붙였다. 그렇지, 엄마? 대답은 늘 힘이 없었다. ■ Lim Cheon(우주는 대체로 텅 비어있다)
Vol.20160608f | 불명열-박광수_심래정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