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malisa / Bittersweet Fantasy

조나라_지영 2인展   2016_0601 ▶ 2016_0625 / 일,월,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6_0604_토요일_06:00pm

조나라 『Anomalisa』展 지영 『Bittersweet Fantasy』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아쉬 서래 GALLERY AHSH SEORAE 서울 서초구 방배동 동광로27길 3 B1 Tel. +82.2.596.6659 www.galleryahsh.com

작가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ひと(■)はひと、われ(□)はわれ" 오늘은 그동안 우리가 나눴던 대화에서 반복되거나 누락되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펼쳐 보내려고 합니다. 고백하자면 여전히 나(□)는 예술이 인간의 진정성과 윤리적 관념을 향해 어떤 결론을 담보하고 있다거나, 그것의 오류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지 아직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언제나 답은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을 찾기 위한 무한한 과정을 반복하고 더 많은 문제제기와 제기된 문제들을 다시금 의심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에 가까울 것 입니다.) 어쩌면 제가 예술이나 예술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혹은 예술 그 자체에 대해 철저히 미시적으로 또는 통시적으로 관찰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이 직관적인 개인(□)으로써가 아니라 더욱 객관적인 작가의 수행(■)으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가 이 문제를 화두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눈 이야기처럼 예술의 문제와 예술가의 문제, 혹은 예술가와 당신이라는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사적인 경험을 앞에 두고 듣는 귀가 되었던 저의 경우에도, 경험을 다시 되새기며 들려주는 당신의 입장에서도 결국 사건은 공적인 '작업'으로 고민되어야하는 것을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태어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가지는 동시에 누군가의 아들, 딸로 시작되는 사회적인 신체를 부여받는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자란 나의 편지를 받아 주어 고맙습니다.

조나라_Anomalisa_천에 실_162.2×130.3cm_2016

사회적 신체와 피부, 경계의 확장에 대하여-조나라의 최근작 「그날들: 오늘이 기억하는 그날」 ● 작가(■)는 최근 색실을 가지고 회화적 표현의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작업은 천의 앞뒤를 종횡하는 바느질로 어떤 인물들과 형상을 그려내기도 하고 뭉개기도 하면서 다시 앞과 뒤를 수 없이 교차한다. 모세 혈관, 근육 세포와 같이 켜켜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실들은 주로 끊어내어 정리되기 보다는 흘러내리는 물감처럼 천 위를 벗어나 화면 아래로 어지러이 늘어뜨려진다. 새, 꽃, 개 등, 그 소재가 전통적인 화조화(花鳥畵)의 공예 형식에 가깝게 진행된 전작들은 '실'이라는 매체의 도구적인 실험, 훈련으로 보인다. 이 도구적인 실험이 그리 매력적이지만은 않아 보였던 것은 매체의 기술적인 발견에 앞서 제기 되어야 할 현대미술에 대한 물음이 그다지 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최근 발표한 「그날들: 오늘이 기억하는 그날」의 시리즈는 본격적으로 스스로의 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선택된 이야기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 새로운 시리즈를 빌어 조나라(□)는 본인의 예술적 도구의 현상적인 외연보다는 실을 선택하게 된 본질적인 당위 (어릴 적 부모의 직업적 환경으로부터 작가에게 남은 잔상)를 찾는 과정, 그리고 실로 풀어내는 현재의 경험, 내부와 외부의 사회를 인식하는 기제로써 작업의 가능성, 작업을 마주하는 본인의 태도에 한걸음 다가가는 것으로 보인다.

조나라_Anomalisa_천에 실_162.2×130.3cm_2016_부분

"군중들", "그날" 이미지의 일부는 그 원본이 가족의 결혼식 사진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결국 작가(■)는 어떤 사건과 갈등으로부터 기생된 자조적 순종에 대한 자기 분노와 윤리적인 기대에 대한 배신을 이야기 한다. 사건의 파국은 나(□), 혹은 나의 가족이라는 경계 안팎에서 빚어지는 갈등이므로 '나'라는 정체성이 어느 경계에서 정의되었는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족과 본인의 돌고 도는(그렇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순종적) 역사 그리고 허공에 걸려 무명천을 지지대 삼아 정리되지 않은 채 늘어져 있는 실타래, 조나라(□)의 「그 날들」이 표상하는 작업의 신체는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 던져져 있다. 정체성의 경계는 자신의 안에서도 항상 다른 곳에 그어진다. 아들, 딸, 며느리, 남편과 아내, 부모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저항 없이 획득한 사회적인 신체이기에 쉽게 거스르기 힘들다.

조나라_Anomalisa_천에 실_91×116.8cm_2016

천에 새겨진 남녀의 뒤엉킨 신체를 모티브로 수놓은 작업은 가족 이후의 다른 친밀한 관계가 에로스의 반대편에 놓인 타나토스의 잠복된 파국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그(■)가 만지고 사용하는 촉감적인 소재의 관능성은 비로서 차이를 가지기 시작한다. 이 작업은 다시 영원 속에 놓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지만 결코 완전히 대면하고 싶지는 않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이중적인 심리를 자수의 '뒷'면으로 드러낸다. 가는 실이 동반해야만 하는 엄청난 양의 연속적이고 무작위적인 육체노동은 그것을 수행하는 동안, 눈 앞의 이미지를 무력하게 휘발시켜 버리지 않았을까. 웨딩 드레스는 어떠한가. 피부로써의 의복이 가지는 의미는 또 한편의 강력한 사회적 신체 부여의 다름 아니다. 욕망하면서도 동시에 갈취된 신부의 정체성에 대해 작가는 뚫고(꿰매고) 또 뚫어, 또 꿰맨다. ● "나(□)는 교육이라는 제도 안에서 너무나도 옳고 그름과 같은 정답을 배우며 관념적인 인간(■)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입니다" 라는 작가(■)의 진술은 실상 그것들 너머로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학적 고백의 흔적으로 읽힌다. 작가들 대부분이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작업의 동기를 찾고, 그러한 배경은 진정성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아쉽게도 자기 반영의 특이성에 도달할 만큼 사적인 경험에 몰입하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일상적인 소재가 가지는 소통의 용이함만 남아 표면으로 부유하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문제로 작가(■)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개인과 작가의 경계에서 사적인 경험을 발언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 오고가는 서로의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나라_Anomalisa_천에 실_45.5×53cm_2015

자아 밖의 타인에 대한 윤리와 도덕적 괴리에 대한 인식을 작업으로 풀어내는 일은 사건과는 별개로 작가의 설정된 성찰의 공간 안에서, 하지만 감금된 자폐인에서 벗어나 공적이고 역사적인, 집합적인 문제를 사유하는 일이다. 다만 작업은 현재의 경험을 여러 부분으로 단편화 시키고 경계를 설정하는 시간의 유보 과정이 된다. 노동하는 작가(■)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외부 세계로부터 (심지어는 개인(□)으로의 본인과 작가로써의 자신(■)으로부터) 어떻게 끊임없이 탈주할 수 있는지, 삶과 삶이 서로 투쟁하도록 분열을 만든다. 물리적으로 나(□)와 인간(■)을 구분하는 경계가 간단히 피부의 안과 밖의 이야기라면 끊임없이 경계를 뚫어 생채기를 내야하는 바느질은 수행으로써의 카타르시스가 되지 않았을까? ● '그 날'에 대해 작가는 '오늘이 기억(해야)하는'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역사학자인 앨론 콘피노(Alon Confino)도 지적했듯이, 기억이란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의식을 구축하는 방식"이며, 따라서 지나간 과거를 발굴하고 이에 대한 의식을 재구성해내는 방식과 이를 위한 노력은 생물학적 시간, 물리적 시간의 비가역성(非可逆性)에 맞서려는 인간(■)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스 브루주아(■)나 트레이시 에민(■)과 같은 여성작가들이 그들의 개인사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세계에 대한 시선을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기억은 현재의 매 순간 매 순간이 과거가 되어버리는 끝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기에,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저항의 행위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 이단지

지영_My Rody_알루미늄에 혼합재료_40×50cm_2016

달콤쌉싸름한 판타지 Bittersweet Fantasy - 소통의 부재- 온갖 슬픔에 관하여 ●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가지의 상황과 마주한다. 그 이유도 결과도 잘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단지 지구의 표면에서 오늘을 사는 사람일 뿐이기에 슬프다.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 어디에서 왔는지, 왜 왔는지, 앞으로 우리는 모두 사라질 것이란 사실만 알 뿐이다. 왜 너와 나는 다른가. 우리는 왜 진정으로 소통할 수 없는가. 어째서 이토록 다른 생각들로 외로운가. 사실 우리는 누구나 뭔가 하나쯤 결핍된 존재이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허무하고 슬프다.

지영_Bedtime stories 3_리넨에 아크릴채색_162×103cm_2013

천성이 예민한 작가는 모순 안에 놓인 사람들 안의 상처와 결핍을 감지한다. 그것은 고장 난 인형을 볼 때처럼 서글픈 풍경이다. 하지만 작가는 슬퍼도 울지 않는다. 캔디처럼 씩씩하게, 단단하지만 차갑지 않은 가면을 골라 쓰고는 말한다. 내가 너를 기억할게. 내가 그것을 간직할게. 그러니까 괜찮아. 적어도 나는, 너를 사랑해 줄 거야. 작가는 최대한 담담하고 야무지게 속으로 말한다. 그녀는 부서진 인형을 들고 우는 대신 그녀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꿈속으로 데려간다. 겁내지마. 이건 단지 꿈일 뿐이니까. 아마도 행복한 꿈 일거야. 다 잘 될 거야. 혹시 잘못된다 하더라도 그때는 그냥 꿈에서 깨어나면 돼. 그녀는 그렇게 꿈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지영_Bedtime stories 4_리넨에 아크릴채색_162×103cm_2013

달콤하고도 씁쓸한 것의 매력 ● 그녀는 알루미늄 판을 부식시켜 스케치를 입히고 착색한다. 인형들과 예쁜 드레스들, 식기들과 소품들의 실루엣이 금속 표면에 새겨져 있다. 여성적이고 장식적인 이미지들은 언뜻 어리고 연약한 느낌이지만 몸체인 금속의 성질 때문에 차갑고 단단하다. 어딘지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주는 바탕의 드로잉은 화사한 색채로 가장하고 있기에 달콤하고 유혹적이다. 가까이서 보면 터져나갈 듯 가득 찬 오브제들은 딱딱하고 규격화 된 사각 프레임 안에 어김없이 정리되어 멀리서 보면 정갈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양면적이고 이중적인 느낌들은 보는 이의 감각과 기억을 효과적으로 자극하여 작가가 비밀스럽게 숨겨놓은 이야기 속으로 이끈다. 그래서 심심하지 않다. 마치 매일 다른 수수께끼를 내는 마법 책처럼 흥미롭다.

지영_The mere flower_알루미늄에 혼합재료_40×40cm_2015

유치함과 신중함 사이 균형 잡기 ● 세상의 소외된 모든 존재들을 소중하게 기념해주고 싶은 작가의 마음은 결연하다. 그것은 소리 높여 외치는 구호가 아니라 조용한 결심이다. 산뜻하고 똑 부러진 작가의 표정은 감춰진 섬세한 내면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가 덮어쓴 가면이다. 질 좋은 가죽처럼, 상처받기 쉬운 존재와 존재 사이를 조심스레 구분하는 보호막인 셈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너도 보호하는. 그것은 지치지 않고 오래오래 이 모든 소중함들을 기록하고 아름답게 기념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돼 있어서 사랑스럽다. 그녀는 한참 성장중인 작가다. 따라서 아직 완성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의 미래를 점칠 때 그녀의 세상을 향한 애정이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무거움과 가벼움, 농담과 진담 등등의 이중성 사이로 다채롭게 반짝이는 것을 보면, 그녀의 재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 박보미

Vol.20160606j | Anomalisa / Bittersweet Fantasy-조나라_지영 2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