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선-VEILED LINES

조동균展 / CHODONGKYUN / 趙東均 / mixed media   2016_0601 ▶ 2016_0606

조동균_시간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16-2)_혼합재료_162×130.3cm_2016

초대일시 / 2016_060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가려진 선-있음과 없음 ● 형상의 세계에서 '있음'이 형(形)을 가리킨다면, '없음'이란 역설적이게도 이 형(形)의 존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형(形)은 그 본질 안에 '있음'과 '없음'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말 그대로의 '없음'만을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무엇인가가 있던지 또는 없던지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있음'과 '없음'이 동전의 양면같이 서로 대척점에 놓여 있어서 어느 한쪽만이 현상하는 것은 아니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맞닿아 있으며, 어는 쪽으로 의미가 부여 되느냐에 따라서 둘 중의 어느 하나가 현상으로 읽혀진다고 생각한다. ● 세상에서의 대부분은 '있음'으로 선택되어진 것들에 의해서 작동한다고 여긴다. 세상은 진화하면서 무수한 선택을 하지만, 선택 되었을 때의 세상은 역시 선택되지 않은 것들에 의해서 유지된다. ● 무수한 선택이 반복되어진다. 모든 선택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선택은 시간성이다. 시간 차이를 두고 선택된 것들 사이에의 조응은 당연하다. 지금 무엇이 선택되었다면 과거에 선택되었던 것은 지금 선택되지 않은 것이다. 세상은 항상 선택된 것들에 초점을 맞추어 조명하지만 결국 세상의 대부분은 지금 선택되지 않은 것들 다시 말하면 '없음'으로 채워져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실재이다.

조동균_시간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15-1)_혼합재료_162×130.3cm_2015
조동균_시간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15-2)_혼합재료_162×130.3cm_2015
조동균_시간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15-7)_혼합재료_162×130.3cm_2015

회화에서 지지체인 캔버스는 작품으로 구현될 가능태로서의 물리적 실재를 가지고 있다. 그 특성으로 인하여 한정되기도 하지만, 흔히 말하는 무한한 변화와 확장성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가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가끔 캔버스의 물리적 양태를 작업에서 중요한 변수로 의식하고 활용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캔버스의 물리적 제한은 회화에서는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 그림을 그리는 지지체인 캔버스를 '있음'로 보느냐 '없음'으로 보느냐는 작업에 대한 개념을 풀어가는데 중요한 시작점이다. '있음'으로 본다면 캔버스는 그 크기나 모양으로 작업의 방향과 결과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반면 '없음'으로 본다면 캔버스는 작업이라는 창조가 이루어지는 배경으로 규정되어 실제가 아닌 단지 공간, 시간적 상태와도 같은 의미로 간주 될 것이다. 이 작업에서는 캔버스는 '없음'으로 취급된다. 캔버스의 물질적 실재가 작업의 내용이나 진행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단지 하나의 작품이 시작되는 시간, 공간의 출발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캔버스가 내포했던 처음의 시간과 공간은 팽창한다. 드디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캔버스의 시간, 공간도 멈춘다. 하나의 자연, 또는 하나의 우주가 탄생된 것이다.

조동균_시간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16-1/f150)_혼합재료_227.3×181.8cm_2016
조동균_시간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16-2/f150)_혼합재료_227.3×181.8cm_2016

캔바스의 물리적 실재가 갖는 요소들이 무시될 때 캔버스는 '없음'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의 '없음'은 무엇이 상실된 '없음'이 아니라 그냥 '없음'이다. '없음으로 있는' 것이다. '없음'으로 있어야만 그 속에서 우리는 소위 예술이 갖는 무한한 변화와 확장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 이는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의 '없음' 상태와 비견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 '없음' 상태에서 유일한 하나의 '있음'이 창조되었을 때 비로소 그 '있음'의 '없음'이 함께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세상의 형성과 변화를 작업형성에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 ● 이것은 작품을 제작할 때를 연상해 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된다. 빈 캔버스에 어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선을 하나 그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순간 '그어진 선'이라는 '있음'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작가는 처음 탄생한 이 '있음'을 근거로 또 다른 무언가를 그려나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있음'의 중복이 된다. '있음'이 한 장의 그림을 마무리하기 까지 어떤 유형으로도 기여하게 된다. 가끔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이전에 생성된 '있음'이 가려지거나 지워지는 경우는 있겠지만, 결국은 온갖 '있음'으로 점철된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 '없음'은 우리의 세상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 '없음'은 '있음'의 배경과 같이 '있음'의 현신을 위해서만 작동하는 듯 하다. 회화에서 우리는 이 '없음'의 존재를 '여백'이라는 이름으로 존재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여백은 미미하지만 '있음'과 어울려 회화에서 실재적 기능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여백이라는 '없음'도 결코 화면의 주인공은 될 수 없다. 부차적이며 보완적인 존재의 역할만 맡을 뿐이다.

조동균_시간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16-3/f150)_혼합재료_227.3×181.8cm_2016
조동균_시간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15-3/m20)_혼합재료_72.7×50cm_2015

'시간 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 연작에서는 '있음'과 '없음'에 대한 의미가 작품제작 프로세스 뿐만 아니라 작품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그리고 일반적인 회화작품의 제작과정이 '있음'이란 선택에 의해서 구성되고, 세상을 이해하는 인식의 방법에서 '있음'이 세상을 구성하는 주류라는 '있음'과 '없음'에 대한 일반적인 가치규정을 부정한다. ● '시간 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 연작에서는 시간 속에서 지금의 '있음'을 있게 한 본질은 이전의 '있음'이 아니라 '없음'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없음'이 작업의 진행과정에서 실제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존재'는 '있음'만의 것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 자리하거나 '있음'과 '없음'의 협력으로 창조된 다른 양상이라는 것이다. ● '없음'은 '있음'의 도움을 받아야만 현신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없음'은 초현실적인 것이라 현상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 작업에서 사용되는 마스킹테이프는 초현실적인 '없음'의 존재를 의식 안으로 끌어들여 실재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처음 작업과정을 보면 테이프는 캔버스의 원래적 '없음'의 영역을 일정부분 선의 모습으로 가리는데, 이는 캔버스가 원래 가졌던 상태를 바꾸지는 않는다. 단지 일정부분을 가린다. 이 가림으로 가려지지 않은 남은 영역은 '색칠하다'를 통해서 '있음'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마스킹 테이프에 의해서 가려진 '없음'의 영역이 '있음'으로 나타나게 되며, 시각적 결과물로 현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 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연작에서 중요한 작업 포인트이다. ● 캔버스 위의 공간에서 '레이어'와 같이 쌓여진 층에 만들어진 '있음'의 영역들은 층이 쌓이면서 점차 그 영역이 줄어들고, 마지막으로 탄생하는 공간에서는 '없음'으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 전 화면이 마스킹 테이프로 덮인 상태가 된다. 모든 것이 가려져 없어진 것이다.

조동균_시간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14-3)_혼합재료_162×130.3cm_2014
조동균_시간속에서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14-4)_혼합재료_162×130.3cm_2014

작업은 완성되었지만 긴 작업 과정 중에 그저 상상 속으로 남아 있던 결과물을 보기 위해서는 마스킹테이프를 덮으면서 한 겹씩 쌓아올린 테이프를 거꾸로 한 겹씩 벗겨내는 작업이 남아있다. 작업은 끝났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작업이다. ● 시간 속에 겹겹이 쌓인 흔적들을 벗겨내듯이 감추어져 있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기분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 작업이 끝났을 때는 작업의 실체는 테이프 아래에 감추어져 있다. 테이프 아래 감추어져 있는 실체를 드러내는 작업은 오래 전 시간 속에 묻혀 있는 유물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기분이랄까? ● 마스킹 테이프는 화면 위에 시간의 흔적으로 쌓여 있고. 그 시간을 되돌림으로써 작품의 결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시간 이전의 실제가 아니라 시간으로 빚어진 시간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 조동균

Vol.20160602a | 조동균展 / CHODONGKYUN / 趙東均 / mixed media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