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30pm
동덕아트갤러리 DONGDUK ART GALLERY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68(관훈동 151-8번지) 동덕빌딩 B1 Tel. +82.2.732.6458 www.gallerydongduk.com
직선. 평면. 다층/없음-한경자의 그림과 공간 표현 ● "회화는 (...) 무엇보다 보는 사람을 끌어당겨야 했고, 그 다음 그 앞에 멈춰 서게 하고, 마치 마법에 걸려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붙들어 놓아야 했다." - Michael Fried, Absorption and Theatricality, 1980 네모반듯한 큐브들이 상하좌우로 X자를 그리며 정렬한 그림이다. 그림 속 큐브들은 가시적으로 나타난 형태로 볼 때 분명 입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거나 깜빡 눈이 속을 것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된 입체감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큐브들 자체도 눈속임 회화(trompe l'oeil) 기법으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 위에 겹쳐 그려진 계단 또는 문 모양의 이차원 도상이 매우 평면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물을 그린 선 드로잉이 화면에서 환영의(illusionary) 깊이를 무효화해서다. 그런 이유로 그림을 보는 감상자는 마치 하늘을 나는 새처럼 공중에 떠서 사각형 빌딩들이 숲을 이룬 도시를 보는 것 같은 착시와, 그 앞에 그래픽 문양이 찍힌 투명한 비닐 막이 겹쳐져 있어 어떤 공간의 밀도나 깊이도 느낄 수 없는 각성된 지각 상태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그 경험은 입체적이지도 않지만 표피적이지도 않으며, 역동적이지도 않지만 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서로 상반되는 그 두 속성들은 앞으로 우리가 논할 어떤 작가의 그림 속에 중복되거나, 섞이거나, 상호작용하는 식으로 흡수돼 있다. 그림을 보는 감상자의 입장이 돼 말하자면, 우리는 그 그림 앞에서 마법에 걸리지도 않지만 미적 경험에 실패하지도 않는다.
벌써 옛날 영화가 됐음에도 여전히 SF 무비의 전설적인 명작으로 꼽히는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영화 전체가 당연히 훌륭하지만 사람들이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렬하고 가장 신선하게 받아들인 것은 다름 아니라 오프닝 시퀀스다. 어둡고 짙은 스모그에 둘러싸였지만 창백한 인공 빛을 내뿜는 초고층 건축물과 허공에 뜬 광고판 조명으로 검푸르게 반짝이는 미래도시. 원근법의 소실점을 향해 뻗어나가는 직선처럼, 높고 빽빽하게 솟은 마천루들을 헤치고 저 멀리 한 점을 향해 수평으로 나아가는 카메라의 시선. 관객들은 그 미래도시 미장센과 카메라의 움직임 덕분에 마치 자신이 우주처럼 무한하고 사막처럼 막막한 공간을 온몸으로 유영하는 것 같은 영화적 경험을 했다. 아니, 어쩌면 정반대로 아무리 소실점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도 전혀 공간의 깊이에 가닿을 수 없는 막막하고 닫힌 지각의 세계를 스크린을 통해 간접 체험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중력은 모호하게 작용하고, 시간과 공간의 차원은 뒤죽박죽 섞이며, 평면과 입체의 경계가 상호 넘나드는 그런 지각의 세계를 말이다.
서두에 설명한 그림은 작가 한경자의 최근작 중 하나다. 그리고 이미 밝혔다시피 바로 위에 서술한 내용은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중 시작 부분이다. 나는 겉으로 보기에 전혀 상관없고, 장르 및 매체도 다르며, 제작 메커니즘이나 표현법도 완전히 다른 맥락에 속하는 두 작품을 억지로 연관시켜 이것저것 따져 볼 생각은 없다. 전자인 그림과 후자인 영화는 매체와 기술의 상이함만큼이나 구현된 이미지의 내용 및 효과가 판이하기 때문이다. 그 둘은 사실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것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한경자의 2015년에서 2016년 사이 그림들을 비평하기 위해 『블레이드 러너』의 첫 장면을 끌어들인 이유가 있다. 요컨대 한경자의 그 작품들에서 '공간이 어떻게 표현됐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후자는 꽤 그럴듯한 예시가 되는 것이다. 첫째, 앞서 이미 논했듯이 삼차원 입체공간을 기본 바탕에 깔고 있지만 그 위에 부가되는 다른 형상들이 평면적 혹은 그래픽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이다. 둘째, 시선의 대상이 명확하고 단일한 지점이나 차원을 유지하지 않기 때문에 보는 이 입장에서는 공간 지각이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를 우리는 한경자 그림의 공간 표현법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한경자의 그림에서 공간 표현은 오로지 작가의 수작업을 통해 이뤄진다. 먼저 캔버스 위에 X자 형태로 직선들을 교차시켜서 사각형 큐브들이 90도 측면 각도로 도열한 기본 패턴/풍경을 만들어낸다. 다음, 그 위에 마치 테이프로 오려 붙인 것처럼 측면에서 본 계단 도상이라든가 문 밖으로 난 계단 형태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겹쳐 그린다. 때로 위에 겹쳐지는 형상은 윤곽선으로 유추하건대 비너스 토르소로 바뀌기도 하고, 어떤 그림에서는 비너스 토르소와 계단이 포함된 문 형상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는 비너스 토르소가 마치 저 건너편을 볼 수 있는 구멍이나 창문이라도 되는 양 그 토르소 형태 내부에 산악 풍경(알프스?)이나 물감 드리핑(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장면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완성되기 때문에 한경자의 작품은 흔히 사람들이 '회화적'이라고 간주하는 그림들보다 훨씬 간결하며 규범적으로 보인다. 통상 쓰는 말로 하면 '디자인처럼 보인다'거나 '그래픽 같다'고 하는 반응이 나올만한 그림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한경자의 그림은 패턴을 응용한 디자인도 아니고 그래픽을 첨가한 회화도 아니다. 디자인이나 그래픽을 낮게 평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애초 작가의 창작 목적 및 의도가 거기에 있지 않다는 문맥에서 그렇다. 한경자가 입체적인 큐브 형상 위에 이차원 평면성이 두드러지는 선 드로잉을 겹쳐 그리는 것은 아마도 그녀가 전공한 회화의 표현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탐구하는 과정일 것이다.
특히, 나는 그 탐구의 방향과 주제가 '평면 공간을 어떻게 색다르면서도 선, 면, 색채, 화면 구성의 차원에서 복합적인 양태가 되도록 해석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걸려 있다고 판단한다. 그것은 20세기 초중반 미국 모더니즘 회화를 이끈 미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와 그의 제자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가 회화의 유일무이한 특성으로 정의한 '평면성(flatness)'을 근간에 두면서도 지금 여기서 어떻게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제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의 창작 실천이다. 즉 이차원 평면회화라는 일반적 미학으로부터 한경자만의 공간 표현법이 구체화되는 과정의 수행 양상인 것이다. 평평한 표면에서 선들이 가로질러 나가고, 면들이 분할돼 가상적인 덩어리로 솟아오르고, 중간색과 보색이 화면의 분위기를 채워나가면서 감상자로 하여금 다층적인 공간 경험에 이르도록 하는 것. 하지만 그 다층성이 작가가 공간을 눈속임 회화처럼 정교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고 평면 위에 평면을 겹치는(그래서 정확히는 '다층 없음'이라 말해야 할) 솔직한 표현법 덕분에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최근 이년 사이 한경자가 그림이라는 범주, 회화라는 예술 장르 속에서 실행하고 있고 성과를 이뤄낸 점이다. ■ 강수미
Vol.20160525e | 한경자展 / HANKYOUNGZA / 韓京慈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