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휴머니티 Return to Humanity

이진경展 / LEEJINGYUNG / 李眞京 / painting.installation   2016_0521 ▶ 2016_0712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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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521_토요일_03:00pm

후원 / 남양주시_경기도

관람료 / 2,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서호미술관 SEOHO MUSEUM OF ART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북한강로 1344 1층 Tel. +82.31.592.1865 www.seohoart.com

1. '인간다움'을 묻는 세 지점들 ● 서호미술관이 기획한 올해의 주제는 "또 다시, 휴머니티"다. 인간, 인간성, 인간적인 것, 인간다움, 인간의 존엄, 인간적 가치 등을 화두로 삼는다. 세속화와 탈신화화를 통하여 신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구축한 인간. 그 근대의 '인간'은 단순히 먹고 자는 동물의 삶, 그리고 통일된 자아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못한 식물의 삶과는 다른 식으로 스스로를 자유와 권리의 의식 주체로서 세우고 합리적 이성의 힘으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중심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물질/기계 + 정보/생명 + 인지/마음의 융합 체계를 세우는데 주력하고 있는 탈근대시대의 '인간'은 근대의 인간과 달리 이념과 정념, 물질과 비물질, 이성과 감성, 몸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고 상보적인 관계로 연결시키고자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심이다. 변화를 겪으면서도 안정적으로 자신을 보존해야 하는 우리 시대 정동적 인간이 성찰해야 하는 지점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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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바둑경기를 계기로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인공지능'이 인류 미래를 예고하는 일반 개념어가 되어 한국 사회에 빠르게 자리 잡았다. 머지 않아 인간의 자연 지능과 대등한 또는 그것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이 pc수준에서 가능해질 것이라는 예측, 인공지능 시스템이 인간 전문가의 판단을 대체하리라는 예상, 인간 형상을 닮은 지적 인공체인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임을 주장하게 되리라는 전망 등은 인공지능 연구 성과에 대한 과잉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에 의해서 심화되고 있다. 전 세계 수많은 산업 시스템에서 작동하고 있는 인공지능의 수준이 아직 인간의 지성과 상식을 벗어난 형태의 높은 지능과 사고처리, 판단력을 가진 초인공지능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우리는 근대 이후 인간이 구축한 세계가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사회적, 철학적, 윤리적 질문들을 담고 있는 수많은 이슈들과 대면해 있음을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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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뿐만 아니라 2005년 생명윤리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던 '줄기세포' 연구(과학조작 스캔들이었던 '황우석사건')를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은 피상적인 수준에서나마 '정상적인 인간 신체'가 더 이상 '주어진 것'으로만 간주되지 않는 인간 조건의 변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와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에 의해 개발된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이론'은 생명의 특징이 '자기생성적'임을 보여줌으로써 기계론적 생명관은 그 수명을 다한 듯하다. 생명의 과정이 에너지와 물질의 흐름인 '신진대사(metabolism)'를 통해 신체 세포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수선되고, 재생되며, 재활용되는 자기생산과정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인간 신체 조직과 장기의 재생, 난치성 질병 치료 등에 대한 기대는 극적으로 높아졌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복제된 동물로부터 치료제를 공급받거나 인간에게 이식할 수 있는 장기를 생산하는 등 생명 복제 기술은 재생의학의 가치를 수직 상승시켰다. 반면에 사람의 조직이나 세포를 대상으로 행해지는 각종 검사와 연구들은 인간 존엄성과 관련된 논쟁을 피해 갈 수 없게 되었다. 생명 복제 기술을 통해 새롭게 열린 가능성-예컨대 생명 연장-은 과연 인간적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지켜야 할 인간적 가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인간적 가치의 주요한 쟁점들과 직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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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1997년 개봉된 영화 『콘택트』, 2013년에 개봉한 우주재난 영화 『그래비티』, 2014년에 개봉한 우주탐험 영화 『인터스텔라』, 2015년 개봉한 우주재난 영화 『마션』 등의 우주영화들은 엄청난 관람객을 끌어들이고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아울러 우주 속에 포함된 '우리'는 과연 우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거대한 우주 속에 '나'와 '우리'가 과연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탐색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정서적이고 상황적인 방법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우주 영화들의 뒤에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역사를 넘어 우주 전체의 역사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고자 하는 새로운 노력, 인류나 문명의 기원이 아니라 138억 년 전 우리의 우주가 만들어지는 시점에서 시작하는 지구 내 인간들의 이야기, 즉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이어주는 좀 더 보편적인 방식의 거대 서사가 자리잡고 있다. '거대사'가 펼쳐 보이는 새로운 세계사에서는 역사뿐 아니라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지질학, 고고학, 인류학 등의 여러 다른 학문들이 모두 동원되어 '인류의 역사가 더 큰 지구 역사의 한 부분이며, 그보다 한층 큰 우주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통일된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 놓는다. 우주에 대한 일종의 지도 그리기인 셈이다. 인류와 지구를 넘어선 범위의 확장, 그리고 인류와 지구의 '상호관계'에 주목하는 관점의 전환을 통해 21세기 인류가 마주친 전 지구적 문제들(에너지, 환경, 기후 변화, 빈곤 등)이 여러 분야의 협력과 인류 공통의 노력에 기반해서야 해결에 접근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런 문제들은 결코 개별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우주시대가 약탈할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이 항성에서 저 항성으로 활보하는 자연의 정복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환상을 키우고, 우주에서 물질과 에너지의 공급이 인간의 편익을 위해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가정하면서 우리가 현재 소진하고 있는 에너지 자원만큼이나 싸고 풍부한 어떤 다른 농축 에너지원이 저쪽 우주에 있어야 한다거나, 우주가 인간의 소망, 기대 또는 권리 감각을 따를 것으로 기대하면서, 인간 종을 위한 실행 가능한 선택지로서 우주 여행을 이야기하고, 인간 문명의 쇠퇴와 하강 국면을 피해 항성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오도된 인간중심주의적 망상을 키울 수도 있다. 인류가 지구적 삶에서 성취한 많은 것들을 살리지 못하고 인간이 초래한 전 지구적 문제들을 덮어버린 채, 우주에서 인간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이까?은 인간에 대한 과대평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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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살아있음의 자기-느낌, 비의식적 지향성을 드러내다 ● '또 다시, 휴머니티' 기획전 시리즈의 첫 번째를 여는 이진경의 작업들은 생명, 또는 삶, 살아있음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담고 있다. 작가와 일상적 사물들은 독립적인 개별 영역으로 분리되지 않고 작업과정에서 자기생성적 연결망을 형성한다. 여기에서 자기생성적이라 함은 그저 자극에 반응하기보다 입력 자극에는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조건화에 의해 학습하면서 이차적으로만 변조되는 진행 중인 활동을 출력한다는 말이다. 작가와 사물들이 작업과정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는 셈이다. 그녀의 작업은 형태의 생성에 있어서는 무작위적인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그 이후 디스플레이(배치. 이진경의 작업과정에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까지의 과정은 대단히 질서정연하고 복잡하다. 그리고 예외가 있기는 하더라도 전시마다 복잡함과 다양성이 증가되는 형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작업의 흐름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것 같아도 매 전시마다 참신성의 접근에 집중하게 된다. 그림, 사진, 오브제, 드로잉, 글씨, 낙서 등 각 작품들이 시공간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방대한 망을 이루면서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돕게 되면 작품들 하나하나 생기가 돌고 활력이 생긴다. ● 이진경 작업에서 주요한 초점이 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과 아는 방식을 우리가 느끼는 방식과 우리가 행동할 방식에 관련시키는 창발성이다. 이 창발성은 마이클 마더(Michael Marder)의 최근의 책 『식물 생각(Plant-Thinking)』에서 언급한 '비의식적 지향성'과 같은 의미다. 인지적 성취 너머에서 또는 아래에서 드러나는 비지향적 감각성 같은 것. 지향성 아래에 존재하는 또는 사유가 무언가에 관한 것이기 이전에 존재하는 대상 없는 비추이적인 사고 과정, 다시 말해 그것이 생각할 때, 그것은 무언가를 느끼는데,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모습에 대한 어떤 개념이나 표상도 갖고 있지 않는 것. 이것이 이진경 작업에서 드러나는 창발성의 원천 아닐까? 마더가 지적하듯이 통일된 자아 또는 중앙집중화된 자아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식물처럼, 어떤 '나'도, 어떤 주체도 주장하지 않고, 지향적 대상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연결되고 관계맺고 상호작용하고 상호의존적인 생명 또는 삶의 기운.

이진경

" 나와 내적 역사가, 공유한 시간이 없는 그런 물건들과 함께 첫날을 보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그림들, 끝내지 못한 여러 그림들, 사라진 오브제들에게 미안하다." (2002년 3월 일기 중에서) ● 2002년 3월 이진경의 포천 작업실이 불에 타면서 모든 그림들, 그리고 "사놓고 읽지 않았던 책과 구석구석 정들었던 모습이 모두 사라졌다." 화재로 전소되어 지붕과 벽들이 사라진 그을린 바닥에 앉아 이진경은 타다 남은 천이나 비닐을 잘라 이어 실 뭉치로 감았다. 이진경은 이 실 뭉치로 화재의 모든 기억을 담고 있는 꽃을 만들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도구들을 저 바깥 환경에 놓여있는 순수한 대상(비닐 실뭉치, 천 실뭉치)으로 축소시키지만, 실제로는 상징성을 통해 사물들을 순간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에 물질의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 이진경의 작업은 사물들을 인간에 의해 제작된 사물, 즉 도구로 변형시키고 실용적 목적을 제거함으로써 작품에 도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진경의 주위에는 늘 사물과 작품의 사이에서 매개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용도없는 도구들이 무작위적으로 널려져 있다. 그녀는 이 매개성에 기대어 물질을 물리적으로 가두지 않고 상징의 형태로 전달하는데, 존재감을 획득하는 이 방식은 거의 무의식적이다. 그녀가 일기에 쓴 것처럼 바깥 환경 속에 놓여있던 한갓된 대상들을 우리에게 속하게 만드는 그녀의 작업과정은 그것이 그림이건, 글씨건, 오브제건, 드로잉이건 간에 생명의 과정 전체―지각, 감정 그리고 행동을 비롯한―를 포함한다(···물건들과 함께 첫날을 보낸다.····그림들, 사라진 오브제 들에게 미안하다./ 정들었던 모습이 모두 사라졌다.). 대상을 소비하지 않고 오히려 삶으로 자라나게 하는 그녀의 작업방식은 고스란히 그녀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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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새로 살면 되겠다." " 생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으니" " 해 밑에서 놀고 자고, 해와 말하고, 세상의 모든 것과 의심없이 얘기할 때" (화재가 난 2002년 3월 일기 중에서) ● 안정성과 변화가 공존하는 작가 이진경의 세계는 정동의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몸과 마음 양자를 동시에 지시하고, 이성과 열정 양자를 포함하면서, 주변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힘과 동시에 주변 세계에 영향을 받는 힘의 관계를 함께 묘사한다. 그녀의 정동은 의식을 넘어선 자동적인 것으로 보인다. 살아있음의 자기-느낌, 활력, 생기, 생생함은 작가가 선택적으로 활성화하거나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항상 열려있고, 새롭게 갱신되는 작가의 존재론적 기저에 신체적 능력으로 잠재되어 있다. 이는 그녀의 유기체로서의 몸이 생명과 비생명, 자연과 문화 사이에 설정한 이분법들 속에 은폐되어 있던 물질의 역동성에 접근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생기있고 긴장감이 있다. 그것이 좋다"는 일기 구절처럼 "위선과 나약을 깨닫"고 "방만함과 가식"을 반성하더라도 그런 의식적 지각의 자기반성성은 몸이 지닌 균형과 항상성을 깨지 않는다. 부유(浮遊)는 삶을 긍정하는 방어로서 작동할 뿐이다.

이진경

" 그림을 그렸는데 이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해서, '밥'이라고 썼어요." (이진경과의 대화 중) ● 이진경은 삶과 분리된 채 정교화의 위계질서에 있는 표현양식들을 흉내내거나 모방하지 않는다. '겨울을 지났네, 버들강아지', '찬바람 앞, 꿋꿋합니다'처럼 팽팽한 긴장을 견뎌야 했던 작가가 쉼을 취해야 한다는, 느림 또는 이완의 삶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 들리는 그림이거나 '자유','자연','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처럼 표제어나 잠언의 형식을 빌어 자연에서의 이완된 삶의 각성을 드러내는 글씨그림, 일상적 공간에서 접혀있거나 구겨져 있거나, 가려져 있거나, 심지어 삭제되어버린 존재들을 드러내는 사진, 덧댄 흔적으로 과정을 떠올리게 하는 메모들, 눈으로 듣고 귀로 맡고 손으로 보게 되는 오브제 작업들은 모두 하나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삶들이다. 저마다의 삶에 대한 작가의 사랑은 섬세하고, 무관심하지 않지만 조심스러운 거리에서 보이는 관심이다. ● 생명으로서의 삶이 쉼과 느림, 경계와 집중을 함께 부르는 것처럼, 숨(호흡)이 들숨과 날숨의 방향을 지닌 것처럼, 이진경의 작품에도 개별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구조적 계기를 유발하는 이중구조, 그리고 기술적이고 상징적인 체계를 통해 내재화와 외재화의 연결망을 형성하는 이중체계가 존재한다. 이진경의 작업들이 소박하고 단순해보여도 무수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성(앞에 언급한 자기생생적 연결망)을 지닌 것도 이 이중구조체계 때문일 것이다. ■ 임정희

Vol.20160522b | 이진경展 / LEEJINGYUNG / 李眞京 / paint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