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을 묻는다

Questioning Substantiality展   2016_0517 ▶ 2016_0724 / 월,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6_0517_화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춘수_박진영_이완_이인현_이정민_정직성 조혜진_토마스 스트루트 Thomas Struth

관람료 / 일반_3,000원 / 어린이,청소년,20인 이상 단체_2,000원 * 관악구,동작구 청소년 단체 무료 * 10주년 기념 무료입장 주간 / 2016_0517 ▶ 2016_0522 * 개관기념일 무료입장 / 2016_0608_수요일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서울대학교미술관 모아(MoA) MoA Museum of Art Seoul National University 서울 관악구 관악로 1 Tel. +82.2.880.9504 www.snumoa.org

사회가 스스로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9.11 테러, ISIS의 급부상, 3.11 동일본대지진에 이은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소 노심융해(爐心融解), 일본의 우경화와 중국의 군사재정비, UN 파리협정, 메르스와 지카, 잇단 대지진까지 평상시 믿고 의심치 않던 대전제들이 소리 없이, 때로는 잡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과정은 이미 친숙한 풍경이 되려고 한다. 국가와 국경, 원칙과 제도는 곧 자본주의 정착이래 최고 히트상품으로 거래 될 전망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벤야민은 막을 수 없는 '진보'의 폭풍을 예측하며 계몽주의사업의 폐해를 안고서라도 미래로 떠밀려가는 '새로움의 천사 angelus novus'를 목격하고 있었다. 새로움의 천사는 천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개를 맡긴 채, 대재앙의 그림자를 뒤로 하고 앞으로 진행해야만 했다. 난색(暖色)으로 물들여진 클레(Paul Klee)의 천사의 모습에서는 다가올 내일 또 그 다음날에 대한 우려보다는 희망이 엿보인다. 그로부터 채 100년이 안된 오늘날 사회가 경험하는 것은 천사도 폭풍도 없이 정체하는 초미세먼지의 자욱한 안개이다. ● 지속가능사회란 "미래 세대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능력의 손상 없이 현재 세대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1987)라고 한다. 그러나 최소한 서구적 자본주의 체제를 실현해온 국가들에 있어서는 이런 유토피아니즘에는 얼굴이 붉어질 뿐이다. 수요의 만족스러운 충족은 대물림 될 수 없을 듯하다. 한도 없는 신용카드 긁듯 '미래 세대'에게 빚져온 우리의 풍요와 사치는 고작 20-30년의 환경보전 노력으로 갚아질 리없다. 100년여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결과 봉건왕조를 과거의 것으로 만든 19세기 파리에 브르조아지 계층이 등장했을 때 그리스 신들이 떠난 초원에 앉은 마네나 모네의 화면 속 인물들은 근시안적인 유토피아를 실현한 듯 보이기도 했다. 왕족이나 교회의 수장이 아니더라도 '자유'와 '평등'을 누릴 기회가 주어진 첫 번째 세대인 이들이 주말을 도심 속 공원에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주중에 일할 직장과 가족을 부양할 임금이 보장되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와 '평등'의 이면에는 노동력 착취와 굴욕적인 계급사회가 도사리고 있어서, 이윤-이자(capital-profit), 지대(land-ground-rent), 노동-임금(labour-wages)의 삼위일체는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경제적 효율성을 섬기는 새로운 신앙으로 군림한다. 작품의 제작, 전시, 소장의 전 과정에 있어서 자본주의 사회의 중산계급인 브르조아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미술계의 구조를 생각할 때 미래세대를 위해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문화적 타당성 (C.C.: Culturally Correct)을 타협하지 않는 제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불신 incredulity' 이라는 형태로 이미 1970년대의 서구에서 표출되어 왔다. 더 이상 단일화한, 또는 최소한 주류계급이 수긍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파편화한 시점과 거시적 전통, 관습, 역사간의 연결방식에 대한 고민은 "후기- post-"를 앞에 단 각종 불가능성의 시대를 제안한다. 저자는 이미 죽었고 내뱉는 말 한마디, 자판을 통해 입력된 단어 하나에도 믿음을 실을 수 없는 시대의 도래는 데리다적 '차이'만으로 납득하기에는 너무나도 불안정적이다. 계급, 종교, 인종, 역사적 다름을 조정할 수 없는 현재는 결국에는 과거의 가치관인 인간 이성의 믿음에 대한 도전으로 치닫는다. 이구동성으로 제기되어온 시대의 전환에 대한 우려들, 계몽주의를 탓하거나 자본주의를 탓하거나 또는 역사 자체를 자책하는 목소리들은 아마도 같은 종류의 불안정성,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정적이라 믿었던 기준들에 대한 의심의 결과인 듯 하다. ● 서울대학교 정문에 들어서서 첫 번째 건물인 서울대학교 미술관은 2016년 6월 개관 10주년을 맞는다. 예술품을 전시하고 연구하여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미술관이라는 기관에게 있어서 10년이란 아주 작은 한걸음일 뿐이다. 하지만 이를 기회 삼아 시대적 지속가능성에 의심을 던지면서, 자연스레 미술관 자체의 미래와 그 방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미술관을 믿고 의미 있는 문화예술을 경험하려 들어서는 관객들과 스스로를 정의하는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을 맡겨준 작가와 기증자를 생각할 때 미술관의 초석인 문화적 타당성에 대한 양심은 마지막 성역으로 지켜져야만 할 것이다. 특히 대학 미술관으로서 예술을 통해 다음 세대의 지적 성장을 유도한다는 기나 긴 목표를 생각할 때 기관의 갈 길은 바쁘고도 험난한 여정이다. 이 같은 기관의 공식 입장에 덧붙이자면, 내부의 사정도 녹록하지 않다. 넉넉한 재정과 인력으로 운영되는 비영리기관이란 좀처럼 있을 수 없지만, 가족규모의 인원으로 운영되는 이 기관에서 지속가능을 묻는 미술관의 지속가능성을 타진해야 하는 시점도 분명 있었다. 지속가능에 대한 물음은 세계나 국가, 사회의 문제임과 동시에 우리의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고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10주년 특별전인 '지속가능을 묻는다'는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일상과 환경, 예술과 사회, 정치와 자본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공유와 능동적 대처를 고민하고 있다. 다행히도 7명의 참여작가들은 우리가 궁금해하면서 묻고자 하는 것, 또는 그 이상의 제안을 통해 시대적인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있다. 예술가의 역할은 동시대를 기록하는 증인인 동시에 시대에 한발 앞서 우리를 이끌어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토마스 스트루트_Paradise 24_Sao Francisco de Xzvier_2001

토마스 스트루트(Thomas Struth)가 제시한 「파라다이스 24, 상프랑시스코 자비에」(2001)를 상징적 이상향으로, 작가들에 의해 시각화된 '위기' 또는 '지속'의 모습은 서울대학교 미술관앞 광장과 전관 그리고 건물 뒤편의 야외 카페로까지 확장된다. 조혜진의 건축물 「704-13호」(2014-2016)는 재현적이면서 사회비판적이고 동시에 상징적일 뿐 아니라 장소특수성을 갖춘 관객 참여형 복합구조 (socially activated symbolic representation with site-specificity) 이다. 이 작품은 사회계급갈등과 이주, 이민자 문제 그리고 향수를 다루고 있다. 어머니가 서울로 상경하여 처음 거주하던 동네를 찾아간 경험은 작가에게 지도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도시 속에 존재하는 지역구분과 거주자의 사회계층과의 연관성을 느끼게 한다. 지역뿐 아니라 단독이 아닌 다세대, 층별로 개인당 면적이 축소된 실내구조 등 주거의 형태 역시 민감하게 자본주의적 계급구조를 반영한다. 서울시내를 다니며 발견한 철거건축의 폐기물을 주된 작업 재료로 삼는 작가는 '뉴타운' 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도시 재개발 현상의 물리적 잔재들을 모으고 합친 후 또 다시 해체한다. 작가는 '봐 둔' 철거지역에서 2층집을 지을 만큼 되는 만만치 않은 양의 폐자재와 유리창틀을 아무일 아닌 듯 수거해온다. 그 후 나무 쪽을 판 위에 끼우고 사이사이 창틀을 맞춰 이 폐기물들을 건축적 구조로 임시 소생시킨다. 현실사회에서는 기능을 잃은 폐기된 자재들의 짓누르는 듯한 무게와 제작과정에 있어서의 육체적 노동의 도수는 지역, 계층, 구조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서 혼자 답을 마련하려고 하는 그녀의 실질적 노동의 가혹한 막막함에 비하면 수월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조혜진_704-13호_철골조에 수집한 창문과 문_2014~6

이번 전시를 위해 미술관 앞마당 광장에 제작된 구조는 다세대 주택 중에서도 2층의 일부를 공중을 향해 증축하여 유효면적을 넓히는 일부 불법 행태들을 재현하고 있다. 땅이 받쳐주지 않는 허공에 뜬 증축면적에서 사람들은 불안감보다도 임시 방편의 만족감을 느끼는가 보다. 작가는 거주지역에서 눈에 띠는 중국인 근로자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도시로 유입된 이민노동자들은 한 사회의 성숙을 알려줌과 동시에 섣부른 세계화가 야기하는 동질화(homogenization), 포섭정책 등 처리해야 할 문제들의 등장을 시사한다. 한국인들이 일거리를 찾아 대거 해외로 이주한 것은 불과 수십년 전의 일이다. 언어, 문화, 사회, 경제적 차이와 이로 인한 공공연한 차별대우는 이들의 송금과 귀국을 기다리는 가족의 존재로 인내된다. 일가 친척 중 누구 하나 해외에 체재하지 않는 가족이 드문데, 국내 외국인 근로자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기란 어렵지 않다.

박진영_WINDOW for my mother 中_M 25N #01_사진_150×560cm_2016

박진영이 다룬 2011년 3월 11일 오후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은 복합적 재난의 형태를 제시함으로써 과거 그 어떤 대지진보다도 일본의 정치적 현실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야기하였다. 이례적으로 긴 시간 동안 계속된 매그니튜드 9.0의 초강진은 일본 동해안에 면한 3개의 도시들과 그 해안뿐 아니라 분출될 기회를 찾고 있던 일본의 문제적 구조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20년의 경기침체와 엔화 평가절하, 재군비와 원자력발전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꼴이 된 이번 지진과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가깝게는 일본 본주(本州) 일부 지역의 영구적인 철수를 의미했고, 멀게는 전세계적 탈핵(脫核)이라는 과제를 새삼스럽게 하였다. ● 사건발생지에 뛰어들어 사진을 찍고 상황을 알리는 사진저널리즘은 신속함과 정확함이 관건이라면 장면으로서의 재난을 담는 박진영의 3.11 이후 사진들에는 사건을 이미지화하는 순발력과 함께 극적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낭만주의적 감수성이 특징이다. 19세기의 사회변화를 실감하며 시대의 사건들을 눈과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제리코(Theodore Gericault)처럼 박진영의 화면에는 단순한 사실도 또는 꾸며진 비현실도 아닌 새로운 낭만주의적 사실주의 경향이 보인다. 우리의 일상이 그 기능을 잃으면서 악몽으로 변질되듯 「2pm in Fukushima_원자력간판」(2014)은 지독한 방사선 오염으로 인해 거주금지구역으로 지정 된 후쿠시마현(福島県) 후타바(双葉)마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저층 건물로 에워싸인 마을 입구의 2차선 도로 위에는 "원자력 밝은 미래의 에너지"라는 이제는 블랙죠크로 밖에 들리지 않는 표어가 놓인다. 뒤로 후퇴하는 도로는 관객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유도하지만, 밝은 대낮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후타바의 길거리는 최후의 심판 이후의 현재진행형인 지옥도나 다름없다. ●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WINDOW」 연작은 작가의 개인적인 재앙과 관련이 있다. 어머니에게 창을 선물하기 위해 촬영한 풍경을 담은 두 개의 작품은 눈앞에 펼쳐진 장관보다 오히려 액자라는 박막(薄膜)을 매개로 세상과 맞닿아있는 작가 개인의 상황을 엿보게 한다. 「WINDOW_M 25'N」(2016)은 멕시코의 몬테레이 (Monterrey)산의 전경과 산 아래 마을을 세폭의 사진에 나눠 담고 있다. 아는 사람이 있지 않는 한 들어가지 말라는 악명 높은 우범지역을 품듯 솟아오른 산의 위엄은 뒤끓는듯한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보여주려 하지만 정작 작가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사건이며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온전히 자신만의 충격이다. 사진은 모두의 것이 되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미지가 손쉽게 공유되는 이 시대에 드문 특정 개인을 향한 이미지는 공적 공간에 거대한 화면으로 놓인 후에도 관객에게 관음적 시선을 강요한다.

정직성

사회, 나, 그리고 예술의 삼각고리는 정직성이 이끌어내는 얼핏 보기에 형식주의적 화면에 내재하는 기본구조이다. 매혹적인 색상과 숙련된 붓질이 만들어내는 환영 너머로, 지속되어야 하는 작가의 일상과 확장적 사회기능은 일방적인 강요와 희생이 아닌 균형과 타협으로 이끌어 내야 할 것이다.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인 화면의 구축과 마찬가지로 집단구성원으로서의 작가의 행보는 개인과 공공의 영역을 넘나드는 정치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초기에 선보였던 붉은 연립주택이 화면 전면에 수직으로 들어서는 작업들은 경제, 사회적 상황에 의해 과거 수 십 차례에 걸쳐 주거와 작업실을 이사 다녀야만 했던 작가의 회화와 삶을 묶어내는 기본구조가 되었다. 독해 가능한 아이콘들과 강렬한 명암, 몽환적 색채의 사용은 20세기 초엽 구상이미지를 화면에 등장시킴으로써 현실과 예술의 연결고리를 재구축해낸 초현실주의자들을 연상시킨다. 도시공간 속에서의 건축물의 해체와 구축을 거쳐 최근작 「녹색풀」시리즈를 통해 작가가 관심을 갖는 것은 4대강 사업의 후유증으로 의심되는 지류강들의 녹조 현상(pool)과 이주를 마친 작가 작업실 주변의 잡초 풀(grass)들이다. 작가의 화면 속 형광색에 가까운 초록 빛의 표면막을 갖게 된 강들은 보도매체 등을 통해 우리시대 새로운 사건의 풍경으로 자리잡으려 한다. 인상파가 그리는 세느강과 개구리연못에는 혁명, 해방, 휴식과 향유라는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쟁취된 가치들이 담겨 있는가 하면, 그 결과로서의 산업혁명과 공장, 오염과 퇴폐, 굴뚝이나 연기, 윤락녀의 이미지들 역시 덤덤하게 재현되어 있다. 정직성의 경우 이상향으로서의 초록의 평지는 살롱 풍 액자를 통해 암시되어 있지만, 굵은 필치와 충돌하는 색면은 현실의 날카로운 비판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다. 회화적 형식과 내용, 작가의 존재라는 위태로운 균형은 쉽지만은 않은, 하지만 신중하고 성공적인 선택에 의해 구축되어 간다.

이정민

「이성의 기능」(2008)을 묻는 이정민의 회화들은 이성을 갖춘, 또는 갖추고 있다고 가정하는 인간의 제어 가능성(controllability)이나 그 필요성을 타진하는 듯 하다. 작가가 간직하는 몇 개의 키워드들 – 산책, (헛)기술, 최저의 선 – 등은 효율성의 사회에서 배척당할 만한 잉여적 시간이나 기술, 조건들을 가리키고 있다. 화면 속 머리를 양손으로 버틴 인물의 진지함은 이성의 기능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를 감싸는 무채색의 상징화된 공백과 그 앞에 놓인 접시의 우스꽝스러운 대조는 기대치 이하의 결과를 접할 때 마다 진지한 반성보다는 이성을 들먹이며 공공연히 실망하는 우리의 태도를 그려낸다. 문제는 항상 개인에 귀속된다. '나'의 선택이 모여 '우리'가 되고 '사회', 시대', '역사'를 형성한다. 필요한 것은 개인의 계몽일 뿐 계몽주의의 재발견이 아니다. 구상이기도 추상이기도 한 작가의 회화기법에는 절제와 생략의 갈림길에 선 캐리커쳐적 준법의 현대성이 두드러진다. 물감의 감각을 '아는' 화가의 전형적 예라 할 이정민의 화면에서는 라우셴버그에서 이강소를 잇는 물감의 감미로운 자태가 그리 크지 않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시각적 유희를 넘은 회화 기법에 있어서도 그녀의 고민은 일관되어 있다. 우리의 과거는 현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동양화를 전공한 그녀가 현대미술에 대항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지속가능은 이정민의 화면에서 동시에 내재적이며 외재적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작품들은 우리에게 자연을, 감각을, 잉여를 즐기라고 알려주며 그 행간과 획간에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이완_수동성의 풍경_혼합재료, 미디어_가변설치_2008~16

이정민의 작업이 물감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을 보여준다면 이완의 경우 생활과 밀접한 제품들에 대한 때로는 감각적이고 때로는 비판적인 시선이 특징적이다. 기성 제품이나 상품을 좌대에 올려 작품이라 부를 수 있게 하는 전제조건이 우선 그 사용가치(use-value)를 박탈하는 것이라면, 이완은 마치 우리와는 다른 패러렐 월드(parallel world)에서 방금 도착하여 이쪽 세계의 그 어떤 물건의 용도도 전혀 모르는 사나이처럼 새롭고 낯선 시각으로 사물들을 접한다. 발표 당시 상당한 주목을 받았던 「우리가 되는 법」(2011)에서 작가는 서울에서 수집된 사물들을 순수한 물리적 조건인 무게를 기준으로 작품화하고 있다. 빗자루에서 세제에 이르기까지 도시가 한번 생산해낸 공산품과 숨가쁘게 소비한 후 폐기하려는 쓰레기의 종류는 슈퍼나 마트 진열장의 길이만큼 다양하다. 공산품 특유의 짙고 탁한 색안료로 가공된 제품들은 나름의 도시미학을 담고 있는데, 작품화한 기준은 비록 무게이지만 제품들에 따라다니는 지역, 경제, 시대적 스티그마로부터는 완전히 해방될 수 없다. 이 역시 무심한 듯한 작가가 노리는 중요한 효과일 것이다. ● 이완의 또 다른 주요 작업은 대량 유통되는 상품 및 식재료들을 처음부터 손수 만드는 퍼포먼스와 기록 「made in-」연작들이다. 그는 아침식사 한끼를 직접 만들기 위해 캄보디아의 논에서 경작을 하거나 실크 옷을 짜입기 위해 타이에서 누에고치와 씨름하고 설탕을 얻기 위해 대만에서 사탕수수를 으깬다. 그가 동남아를 집중적인 무대로 삼고 있는 이유는 식민역사에 대한 나름의 발언인듯 한데, 현지와 현지인들 사이에 불시착한 것 같은 그가 노동집약적 과정을 겪는 모습은 제품의 생산-유통-소비라는 수요, 공급의 지속가능성 보다도 오히려 이 시대 현대미술가 자신의 지속가능성에 보다 절실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작가가 작가이기 위해 생산해 내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의 어디까지를 현실적인 그리고 수사적인 고민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러한 생산활동은 과연 작가를 무엇으로 정의하고 있는가? 예술에 대해 진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현재진행형 일 수 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이인현_회화의 지층-再生_캔버스에 유채_가변설치_2016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 - 再生」(2016)연작들은, 작가가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하여 판매한다는 미술계의 기본전제를 비꼬는 존재들이다. 남색(Prussian Blue)과 캔버스 바탕색으로 만들어내는 긴장감 있는 화면을 통해 회화의 물성과 구조에 대해 연구해오던 그는 작가에게 새로운 작품을 생산해 내기만을 기대하는 미술계에 더 이상 신작을 제작하지 않는다는 방식을 통해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 2012년 제시한 리퍼브, refurbished, 즉 신제품은 아니나 결함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되파는 전자 상거래상의 개념을 도입하여 구작(舊作)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보인 전시는 온라인 쇼핑을 즐기던 작가 특유의 익살스러움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사태를 지적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완판' 작가는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라는데, 그렇다면 생산되기만 하는 작품들은 모두 어디로 향할 것인가? 상식적 경제구조인 수요와 공급의 곡선이 유독 미술유통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 마르크스는 예술가가 작품을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작품이 판매 되면 판매될 수록 증폭될 수 밖에 없는 작품과 예술가 사이의 괴리를 착취로 보고 있는데, 이인현은 「재생」연작을 통해 고의적으로 생산과 출하를 억제함으로써 유통구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시스템 상의 성공과 실패여부와는 무관하게 개념적인 매니페스트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지하1, 2층, 코어전시장 2, 3층 그리고 미술관 뒤편 야외 데크까지 펼쳐진 이인현의 설치는 모두 과거의 어떤 시점에 제작되었던 작품들을 비관습적인(unconventional) 맥락에 놓음으로써 신작의 '생산'이라는 과정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 같은 개념의 제시를 위해 다른 전시 사이, 다른 작품과 함께, 심지어는 야외 카페에 놓여도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긴장감을 잃지 않는 작가의 회화적 구조들은 고색창연한 미술품의 권위적 위상도 놓치기 싫어하는 듯 하다.

김춘수_ULTRA-MARINE 1033_캔버스에 유채_200×200cm_2010

김춘수의 작업은 지난 25년여에 걸쳐 회화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시(既視)적이면서 새롭다. 그는 1980-90년대 미디어아트나 인스톨레이션의 붐을 겪으면서도 평면 캔버스에 울트라마린이라는 동일한 화법만을 통해 화면을 구축해왔다. ● 이러한 그의 제작방식은 이미 '단색'의 미학이나 '제스쳐'의 결과로서의 회화, 또는 시각을 매개한 심리적 효과 등 색면추상의 모더니스트적 이해방식을 넘어서 모던 이후에 던져지는 회화적 양식의 다양화에 대한 촉구나 파편화한 소극적 존재로서의 작가상의 기대에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는 행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지속가능 조건에 양식의 변화가 요구되어온 이유는 샤피로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미술 양식의 차이나 변화에 크게 주목해온 형식주의적 계보가 한 몫을 했을것이다. 미술양식은 사회적 기능에 따라 바뀌어 왔다. 고대왕국에서는 수 백년 단위의 왕조의 의식(儀式)의 변화에 따라, 봉건 왕조에서는 봉건군주의 취향에 따라 미술 양식의 변화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피카소와 같이 작가 개인의 일생 동안에 전 미술사를 아우르는 듯한 잦은 양식의 변화가 대두된 것은 1, 2차 대전을 경험한 현대미술 세대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이번 전시에서는 각각 1990, 1995, 2006, 2010, 2013, 2015년에 제작된 총 10점의 김춘수의 회화를 모았다. 이 공간에서는 진동하는 듯한 푸른 화면을 갖는 작가의 화법을 진지하게 이해할 기회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지표(index)적 선택을 통해 그의 회화 속에서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즉 궁극적 지속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색안료가 갖는 색소(chroma)의 특질이나 겹쳐져 보이는 물감의 층은 분명 관객에게 회화적 기원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영원불변성에 대한 신뢰는 김춘수뿐 아니라 많은 회화작가들에게 유일한 지속가능의 조건으로 공유된다. ● 기원전 3세기에 지어진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영토 내로 들어오는 모든 서적을 압수하여 복사본을 만든 후 원본은 보관하고 복사본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전세계 지식을 소장하고자 했다. 이곳에 그리스 철학, 수학, 의학 등 현재 서양문명의 기초가 되는 서적들이 한데 모아졌으며, 당시 학자들은 이집트 당국의 무조건적 지지를 받고 독서와 연구, 집필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공적 목표의 설정과 달성을 위한 원칙의 제정, 제도의 수립과 원만한 집행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필요조건들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300년이 채 안돼 화재로 불타 소실된 것으로 더 유명하다. 인간 이성과 지식의 가능성을 확장시킴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얻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동시에 당시 이집트 왕조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도서관의 붕괴는 역사적 사건이기보다는 아직도 여러 학설이 엇갈리는 신화적이며 상징적소멸이다. 대학 정문 바로 옆에 솟아오른 초현대적 건축인 서울대학교 미술관은 건설 당시 대학과 지역사회의 연결고리로 기능하도록 기대되었다고 한다. 이 기관이 해를 거듭할수록 개관 당시의 목표, 즉, 지식, 예술과 사회와의 연결과 이를 통한 미래로의 도약을 새롭게 다짐하고 실천하기를 바란다. ■ 정신영

서울대학교 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 『세 개의 축: 건축, 전시, 교육 아카이브』     2016. 05. 17.(화) ~ 07. 24.(일), 서울대학교 미술관 코어갤러리 「MoA서 10⇔10: 플리마켓」     2016. 05. 18.(수) 10:00~17:00, 서울대학교 미술관 「지식과 예술의 지속가능성」 강연 릴레이 프로그램     2016. 05. 20.(금) 13:30 ~ 18:00 「미술관 이라는 건축공간의 지속가능」 미술관 건축 특강     2016. 05. 21.(토) 14:00 ~ 15:30, 서울대학교 미술관 「지속가능을 묻는다」 아티스트 토크     2016. 05. 28.(토) 14:00 ~ 16:00

Vol.20160517e | 지속가능을 묻는다 Questioning Substantiality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