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312g | 이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6_0512_목요일_06:00pm
주최 / 아트스페이스 풀 기획 / 김미정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풀 ART SPACE POOL 서울 종로구 세검정로9길 91-5 Tel. +82.2.396.4805 www.altpool.org
그림자 사이를 관찰하기 ●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이 그 풍경을 어떻게 묘사할지 궁금해진다. 마른 식물의 창백함, 옷장과 장식장 안에 담긴 인공 정원,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희귀한 생물의 형태까지. 마치 정체 모를 자연사 박물관 혹은 기이한 동식물을 수집하는 괴짜의 응접실 같이 보이진 않을까. ● 이솝은 그 동안 '작은 것'들을 관찰하여 그 안에 이야기를 담아 시각화해 왔다. 작은 동물들을 위한 집에 대한 전시『하늘을 향하는 집』(갤러리 미끌, 2006), 구슬, 생선 등을 유리병에 담아 쌓아올려 욕망, 죽음, 자본, 도시에 대한 기억을 표현한 조각 「메갈로폴리스의 진열장」(2010), 자연을 인간 생존의 대상으로 파악한 연구들을 바탕으로, 개미, 알껍질, 조개껍질과 같은 작은 사물들을 엮어 만든 작품들을 선보인『돌을 깨는 방법』(합정지구, 2015) 등에서 그러한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작품을 통해 산업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등 거대담론을 표방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것들에서 소외된 연약한, 즉 '소리 내지 못하는' 것들에 주목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2015년 합정지구에서의 개인전과 연결하여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관계들을 이야기한다. 계란껍질, 죽은 나무, 조류 장난감 등을 모아 자신만의 박물관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16세기 이래로 유럽 귀족들이 각종 수집품을 모아 두었던 방인 분더캄머(Wunderkammer)와 유사하다. 하지만 수집의 목적이 소장이었던 분더캄머와는 달리, 작가에게 있어 수집은 관찰에서 시작하여 서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포함한다. 이 과정을 거친 작가의 '수집품'들에는 때로 추상적이고 모호한 언어들이 덮여 수수께끼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관찰 1: 개입의 방식을 지켜보기 ● 너를 두려워하고 너를 무서워하는 마음이 땅 위의 모든 짐승, 하늘을 나는 모든 새,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 바다에 사는 모든 물고기들에 깃들리라. 모두가 너의 품에 들어오게 되리라.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인해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잃게 되지만 하느님이 홍수 후에 노아에게 이렇게 말함으로써 확고하게 회복되었다. 수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 대목을 근거로 인간이 신성하며 나머지는 이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한다.1)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동물실험, 공장축산 등 인간은 자연에 개입하여 생태구조를 교란하고 인간중심적 생산구조를 만들어 왔다. 데리다는 (인간 아닌)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행위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 "이 불평등은 언젠가는 역전될 수 있겠지요. 그것은 한편으로 동물의 삶뿐 아니라 동정의 감정까지 침해하는 자들과 다른 한편으로 이 연민에 대한 외면할 수 없는 증언을 들어달라고 호소하는 자들 사이의 전쟁입니다."라고 지적한다.이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착취가 자본주의 육식산업을 포함해 다수자의 폭력에 의한 사회적 지배체제 전체의 문제임을 강조하는 것이다.2) ● 이솝 역시 동물 같은 연약한 존재들이 실험의 대상이 되거나 인간의 간섭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는 현상들을 인식하고, 이를 작품의 시작점으로 설정한다. 그러나 이솝이 주목하는 것은 데리다가 언급한 착취의 행위 자체보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결과들을 관찰하는 데 있다. 작가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동물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방식, 사냥을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탄생한 사물의 형태와 사용 방식들을 조사한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 낮과 밤을 인공적으로 조절하여 산란을 자극하는 실험, 수백가지 형태의 트롤(어망) 형태에 관한 연구들이 철저하게 인간중심적인 관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솝은 그 이성적 결과물에 작가 특유의 감성을 덧댄다.
「불면과 심의 상관성」(2016)은 양계장에서의 인공점등과 그 결과물로 탄생한 알을 표현한 작품이다. 창고형 철제 선반과 백열등으로 낮과 밤이 사라진 양계장을 재현하고, 피로 속에서 탄생한 생명들에게 작가는 숙면을 유도한다는 문양들을 알 표면에 그려 넣어 그들을 위로한다. 조개껍질과 공작새의 깃털, 그리고 인간을 상징하는 통조림 캔까지 어망에 촘촘히 걸린 모습의 「조개와 새를 잡은 어부」(2015)는 어패류를 포획하는 트롤이라기보다 아름다운 모빌 혹은 장식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작품들을 보면 이솝이 적극적으로 자연에 개입하는 인간을 비판하거나 그를 심각하게 고찰하는 메시지를 던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고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뿐 아니라 서로에 대해 인식하는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 작가는 자신은 물론 우리 모두가 '개입'하는 집단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비판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각종 연구 사례들을 활용해 자연을 관찰하고 접근하는 방식들을 재해석하고 인간에 의해 희생되거나 채집된 개체들을 소환해 일종의 위령비를 만든다. 이를 통해 소극적 관찰자의 위치를 거부하며 서로의 생존 방식에 질문을 던진다.
관찰 2: 인식, 그리고 이름 붙이기 ● 그는 그들을 사람에게 데려오셨다. 그가 그들을 어떻게 부르는지 보기 위해서.3) 앞서 언급한 작품들이 생존을 위해 자연 속 대상들을 사냥하고 간섭하는 인간의 인간의 태도와 함께 관련된 도구들을 형상화했다면 관련된 도구들을 형상화했다면, 「산책」(2016), 「구제의 정원 Ⅰ」(2016)은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전자의 대상들이 인간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희생된다면, 후자는 인간과의 감정적인 교류(반려동물)를 위해 공존한다. 반려동물은 인간이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 소유한 대상이다. 인간은 반려동물에게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이름을 붙이고, 의인화하며, 물건을 사주고, 한 공간에서 함께 자리한다. ● 앵무새를 키우는 작가는 인터넷에서 앵무새를 위한 놀이터를 만드는 사례들을 접하게 되는데, 자신이 사용하던 가구를 개조해 그 안에 인조 식물, 놀이기구 등을 담아 장식하는 것이다. 작가는 인간이 자신의 물건을 동물에게 내어주고 그 내부를 자연 풍경으로 꾸미는 과정들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인간이 사적인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소장한 가구의 내부가 공개되면서 반려동물이 점유하는 사적 공간이자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이 특징을 살려 작가는 「구제의 정원 Ⅰ」의 내부에 동물의 눈 이미지를 기하학적으로 배열하는데, 그 눈빛은 그 안에 머무를 반려동물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관객을 바라보는 역할을 한다. 다시 데리다를 인용하면, 데리다는 고양이가 발가벗은 자신을 바라보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전적인 타자"인 "한 동물이 발가벗은 나를 바라보는" 것을 통해 데카르트적 주체를 부정하고 인간적인 것의 깊은 한계를 보게 된다고 언급한다.4) 「구제의 정원 Ⅰ」에서 놀이터는 단순히 인간이 반려동물을 바라보고 즐기기 위한 도구가 아닌, 인간과 동물이 서로를 관찰하고 관찰 당하는 역설적 관계가 실행되는 공간이 된다.
또한 이솝은 사람들이 최대한 자연의 형태에 가깝게 가구의 내부를 구성하는 것에 주목한다. 왜 하필 자연 풍경이 그 공간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왜 굳이 자연의 이미지를 만들어 반려동물과 병치하는 것일까? 동물이 자연 풍경 속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하에, 인공적으로라도 그 풍경을 만들어서 함께 놓는 것일 테다. 자연에 있어야 할 동물을 정성스러운 모방 자연의 이미지 안에 두는 것은 인간중심적 발상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솝은 작품에서 이 인공자연을 더 부각시킨다. 「암흑의 수수께끼」(2016) 내부에는 창백한 형광등과 흔히 우리가 '자연적'이라고 말하는 풍경이 인쇄된 싸구려 시트지, (죽은) 나무, 식물 등을 최대한 자연과 유사하게 배치한다. 그 내부를 보고 있으면 이 공간이 과연 반려동물을 위한 것인지, 자연의 '형태'를 욕망하는 인간을 위한 것인지 반문하게 된다. 또한 우리 스스로가 이름 붙인 '자연' 의 이미지는 과연 무엇인지 상기시키는데, 그 이미지의 장치들로 동물을 유인하고 인간의 목적 아래 둔다는 점에서 놀이터 역시 일종의 '덫'으로 기능하며 때문에 교류의 도구와 사냥의 도구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디아블레로」(2016), 「구제의 정원 Ⅱ」(2016)을 통해 작가는 다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전환한다. 이 작품들은 멕시코 원주민 야키족(Yaqui)의 주술을 배웠던 카를로 카스타네다(Carlos Castaneda)의 저서에서 비롯된 것이다. 야키족은 사물을 정의하는 단어를 따로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연 속에서 인간과 인간이 아닌 생물이 서로를 옮겨 다니며 변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솝은 이를 참고하여 레진으로 만든 가재의 껍질, 새의 깃털과 말린 옥수수, 씨앗, 나무 기둥 등이 한데 섞인, 우리의 논리로는 쉽게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형상을 만들어 낸다. 조류 혹은 갑각류와 유사해 보이는 덩어리들이 마치 머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나무기둥과 가지가 형상의 몸체와 다리가 되어 반인반수 혹은 괴물의 형상을 떠올리게 된다. ● 이 작품들까지 보게 되면 결국 전시는 자연과 인간의 세계 안에서 설정된 다양한 관계들과 그를 인식하는 방식들-생존이 목적이거나 교감을 목적으로, 혹은 서로 하나될 수 있다는 이상적 관점-을 보여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내 서랍 속의 양귀비꽃」(2016)에 그대로 나타나는데, 전시장 입구에 놓인 협탁과 그 위에 놓인 인조 화분, 층층이 쌓인 계란, 화석들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그 사물들이 겹쳐졌던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자연을 모방한 인공물, 한때 생명을 품었을 자연의 흔적, 반사된 인간이 동시에 보이는 장면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를 압축한다.
작가는 인간에 의해 변해 가는 자연과 그 관계를 인식하는 과정을 낮과 밤, 그 사이 황혼의 순간으로 비유한다. 대상이 선명하게 보이는 낮과 달리, 해가 질수록 그 형체가 무너지고 사라지게 되는 순간 말이다. 이는 지금까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생존을 위해 서로를 탐색하고, 인식하고 정의하는 과정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문장이다. 이솝은 그 순간을 포착하여 가려진 대상에 자신만의 독특한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계속할 것이다. ■ 김미정
* 각주 1) 제레미 리프킨, 『생명권 정치학』, 이정배 역, 대화출판사, 1996, p.72 2) Jaques Derrida,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More follow)," Critical Inquiry, vol. 28, no. 2. (Winter, 2002), p.397; 이동연, 「동물과 인간 사이, 그 철학적 질문들과 문화적 실천」, 『문화/과학』 2013년 겨울호 (통권76호), 2013.12, p. 51에서 재인용 3) 데리다는 히브리어 창세기전의 슈라키(Chouraqui) 번역판과 도르메(Dhormes) 번역판이 어떻게 동물을 이야기하는지 비교한다. 본문에 인용된 문구는 도르메판으로, 신이 인간에게 동물의 이름을 부를 권한을 부여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데리다는 도르메판의 '보기 위해서'라는 표현에 주목하고, 이 문장이 인간에게 시선의 권리의 무한성을 부여하면서 그로 인해 자연과 인간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신의 유한성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Jaques Derrida,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More follow)," Critical Inquiry, Vol. 28, No. 2. (Winter, 2002), p.386; 자크 데리다,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계속)」, 최성희, 문성원 역, 『문화/과학』 2013년 겨울호 (통권76호), 2013, p.326. 4) 이동연, 위의 글, p. 44.
Vol.20160513h | 이솝展 / AESOP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