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6_0512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효정_조기주_차명임_김정효_김미옥_이경희 전영희_김홍식_남여주_박상숙_송은주 천동욱_윤경미_제유성_김현희_김영지 박형주_손인선_오경아_김효선_장수임 노승복_유지연_이주은_허정원_안세은 정선주_주영신_정승희_김현수_이고운
주최 / 채림회 기획 / 김홍식
관람시간 / 10:00am~06:00pm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KEPCO ARTCENTER GALLERY 서울 서초구 효령로72길 60 제1관 Tel. +82.2.2105.8190~2 www.kepco.co.kr/artcenter
彩林-프네우마(pneuma)의 숲에서 발원한 탈구축(deconstruct)의 강 ● 비벼 놓은 물감으로 가득한 빠레트의 양가성을 경험하고 싶다. 꿈처럼 비결정적으로 현전된 작가의 빠레트 만큼 거울처럼 진정성 반영된 예술의 뜰은 없을 터이다. 이는 표현에 경계가 없으나 향방은 반영된 작가의 실천적 주소요 물증이기도하기 때문이다. ● 남해 외도 보타니아(Botania, Botanik Utopia의합성어)에 머무는 동안 원고를 탈고하노라니 1980년 창립 이후 정진하는 채림전의 행보 또한 회화의 숲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린버그의 틀과 로젠버그의 창을 맹신하지 않는 필자의 머물지 않은 관점으로 채림의 품성을 드려다 보는 것은, 호기심 가득한 즐거움이며 설레임 섞인 두려움이기도하다. 관찰자 시점이 아닌 창작자의 다원 이동시점에서 허심탄회한 말씀을 드리는 이 부끄러움을 감수하면서 속마음 나누는 문턱 없는 담화의 장이 되고자한다. ● 현대미술의 현장은 다채롭다 못해 다원적이다. 아서 단토(Arthur Danto)가 워홀(Andy Warhol)의 브릴로(Brillo)상자로부터 깨달은 미술에서의 재현적 퍼스펙티브(Perspective)의 종결 즉, 비예술의 실현으로 예술의 본질을 되묻게 하는 이른바 경계 넘기의 경연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화가를 꿈꾸면서 실천해 온 끼와 발상, 상상력 속에서 경험하고자 하던 그 다양한 가능성의 열망들이 아니었던가? ● 예술의 발원과 번성은 주체적이면서 상호적이다. 비주체적 모방이 독자적 예술로 자리하지 못하고 교류와 습합 없이 진보하지 않았음은 인상주의 전후 격변하는 예술현상에서 발견된다. 한국현대미술의 개화는 한국의 근대화가 늦은 것만큼이나 그 발동이 늦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굴곡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역사의 흐름과 회화의 변화 속에 채림의 흔적과 현재의 진면목을 돌아보는 것은 흥미롭다. 채림이 창립하고 현재에 이르는 동안 채림의 행보는 회화의 강줄기를 지나 예술의 바다 그 다원적 지평에 접한다. 이 땅 예술적 토양이 척박하고 예술적 동맹이 허술하기 그지없는 현실을 지나며 줄기찬 맥을 이어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동시대에 발원한 여타 유수한 그룹들이 초기의 강령을 져버리고 멈추거나 사라지고 있는바 여전히 생동하는 채림의 숲은 여전한 예술의 호흡으로 멈추지 않는 불특정의 조형생태로 진보한다.
차용을 통한 간접성의 차연(Differance) ● 예술에서의 차용은 듀샹의 레디메이드와 다다의 반 예술의 혁명적 태도에서 입체파의 콜라주를 거치면서 회화의 몸에 대한 물음과 독자성 혹은 자율성의 방법론이 되었다. 이 시대에도 오브제는 여전히 예술의 대척점에서 사용되기도 하고 알레고리의 매체로 물감을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다원적 용처의 매체가 되었다. 주로 판화의 방법에서 범용되는 간접성은 드로잉의 즉흥과 직접적 표현과는 달리, 매체나 재료의 물리적 효용을 수렴하면서 표현의 영역 특히 실험적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여왔다. 간접성은 필요에 따라 복수성을 수반하면서 예술의 대중성을 촉진하고 탈 개성의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차용의 간접성은 한국현대회화에서 실험적인 태도의 한 축으로 자리하여왔다. 1980년대 많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판화전공을 개설하였고 채림전에서도 오브제작업과 캐스팅 그리고 다양한 판화적 실험, 그리고 간접성을 접목한 회화작업이 선보여졌다. 이와 같은 실험정신의 지속적 실천과 개인적 탈주는 다양성과 다원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불특정의 차연으로 미정지를 개척한다.
회화의 자율성 ● 회화가 미술에서 자신의 영역에서 주체성을 갖게 된 것은 광학혁명으로 회화의 존립이 위태로워지기 시작한 시점임은 아이러니이다. 이제 회화가 미메시스의 시녀에서 스스로 인격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동안 족쇄처럼 따라다니던 퍼스펙티브를 내다버린 결과일 것이다. 이제 현대회화는 과학과 이성을 빌어 혹은 무의식의 잠재태를 끄집어 내서 스스로 존재일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한다.
인식을 넘어 프네우마(pneuma)로 ● 채림의 숲을 가로지르며 역동적 프네우마를 경험한다. 자율적 회화의 강을 이루고 이제 다원적 예술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초인을 꿈꾼다. 이제 채림의 바다는 역동하고 세상을 품고 미정지로 달려갈 것을 소망한다. ■ 조명식
Vol.20160512h | 프네우마(pneuma)의 숲-2016 채림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