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6_0506_금요일_06: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몸미술관 제1전시장 SPACEMOM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흥덕구 풍년로 162(가경동 1411번지) Tel. +82.43.236.6622 www.spacemom.org
스페이스몸미술관 제2,3전시장 SPACEMOM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흥덕구 서부로1205번길 183(가경동 633-2번지) Tel. +82.43.236.6622 www.spacemom.org
"각각의 닫힌 집합에 내재하는 밖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차이가 무한히 확장된다 하더라도 그 집합은 여전히 닫힌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닫힌 중심을 분산시키고, 복수적이고 이질적인 우주들의 내부에 과정의 변증법을 만들어야 한다. (중략) 우리가 의미작용(signifiance)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한계 없고, 구속되지 않는 생성의 과정이다. 그것은 언어를 향하고, 언어 안에서, 그리고 언어를 가로지르는 충동(drive)의 작용이다." (Julia Kristeva,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 trans. Margaret Wall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4, p. 14, p. 17.) ●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눈이 붙잡은 세계를 지(知)적으로 체계화시키려 노력해왔다. 진리를 추구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이성적 사유라 불리는 합리주의가 자리 잡았고 정의(定義)의 안과 밖은 명확하게 구별되었다. 이성적 사유의 결과물이 쌓일수록 분별(分別)과 배제(排除)의 이원론은 절대적 권력을 부여받았고, 질서가 만들어질수록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들은 고립되고 단절되었다. 스스로가 관계 속에서만 그 자신일 수 있음을 망각하게 되었다. ● 존재의 고립이 최고조에 달하자 인간은 그 동안 당연시되었던 범주와 규칙들을 회의(懷疑)하고 존재의 진리를 관계 속에서 찾아내기 위해 서로 반대되어 보이는 것들이 서로를 향하게 했다. 절대성과 합리성의 추구에서 상대성과 불확정성을 추구하는 태도의 변화, 진리를 정의내리고 분별하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인정은 그러한 변화를 대표한다. 객관적인 진리도 종국에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객관적인 진리는 한 시대가 지향하는 주관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하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한다. 지극히 영예로운 것은 영예로움이 아니다.' 있음과 없음, 높고 낮음, 어려움과 쉬움, 움직임과 정지함,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대립항은 항상 서로에게 의지한다. 모든 존재에 대한 인간의 사유는 하나의 상황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일 뿐이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절대적으로 독립된 실체나 본질은 없다.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인 조건과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서로의 존재 의미는 서로가 만들어내는 관계에 의해 생성되고 유동한다.
"반대편으로 향하는 것이 도의 운동 경향이고 유약한 것이 도가 작용하는 모습이다. 만물은 유에서 살고 유는 무에서 산다.(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老子『道德經』40장 -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소나무, 2002, p. 323.) ● 인간을 포함한 세계 속 모든 존재-만물-는 근원적으로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반대쪽을 향해 열려 있다.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이어진다. 서로에게 반응하고 서로를 생성한다. '달인은 사물 밖에 있는 사물을 보며 자신의 배후에 있는 자기를 생각한다.' 분별이라는 단편적이고 인위(人爲)적인 배제의 이원론을 벗어나는 불이의 사유는 인간에게 차원이 다른 세계의 인식을 선사한다. ● 이종목은 작위(作爲)함도 없고 작위하지 않음도 없는 예술을 보여준다. '군자는 세상에 숙달되어 능란하기보다는 질박하고 우둔한 편이 나으며, 지나치게 조심하기보다는 소탈하고 꾸밈이 없는 편이 낫다.' 분별하지 않음이 틀린 것은 아니다. 분별함이 틀린 것도 아니다. 당연히 둘(二)이라 여겨지는 것은 언제부터 둘이었는가? 그것은 둘이 아니다. 둘 사이의 경계는 한정적이고 일시적이다. 이것은 언제나 이것일 수 없다. 저것은 언제나 저것일 수 없다. 완벽한 자기동일성과 배타성은 불가능하다. 하나를 정의내리는 행위는 그저 하나의 정의 속에 전체를 가두는 것일 뿐이다. 형상은 빈 공간에서 나타나 빈 공간으로 사라진다. 소리는 정적에서 시작해 정적으로 사라진다. 그렇기에 경계는 일시적인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 이종목은 숙고하고 숙고한다. '무엇이 진정한 예술적 행위인가? 무엇이 진정한 사유인가? 질문에 대한 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진정으로 답하기 위해 이종목은 의식적인 숙고를 중단한다. ● 유심(有心)은 무심(無心)으로 이어지고 고요하지만 역동적인 하나(一)를 낳는다. 서예(書藝)는 언어를 바탕으로 한 예술이다. 사의적인 문자 예술인 서예이기에 읽을 수 있다. 읽어야 한다. 그 의미를 판독하고 뜻을 새기는 감상의 과정은 권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언어는 사회적 기호이기에 아무리 자유로운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규범과 질서를 따라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상징계(the Symbolic)의 전형적 산물이다. 그러나 불이展에 전시된 이종목의 서예 작품들은 읽을 수만은 없는 서예이다. 그의 작품들은 언어인 동시에 이미지(image)로서 존재한다. 그저 시각적 형상만으로도 사유의 충만함을 경험시킨다. 그의 작업에서 한자의 의미를 알아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서예라는 정의의 안과 밖은 모호하다. 분명 언어 안에 있으며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와 상징계의 울타리를 깨뜨리고, 넘나들며, 관통하는 서예이다.
의식적이면서도 의식적이지 않는 행위, 미(美)를 추구하면서도 미를 지워내는 행위, 읽어야 하지만 읽지 않아도 감동이 전해지는 이종목의 작품들은 언어만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전달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를 일깨운다. ● 따라서 이종목의 서예는 '시적 언어(poetic language)'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따르면 '시적 언어'는 단순히 시(詩)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정된 문법과 규범을 넘어서는, 새롭고 자유로운 의미작용을 만들어내는 언어이다. 그것은 언어의 밖에 있는 언어이자 상징계적 질서가 고수하는 동일성과 일관성의 경직, 억압을 벗어나는 언어이다. '시적 언어'는 당연시되는 문법과 형식을 따르지 않아 차이와 분절을 발생시켜 상징계적 세계에 유동과 변화를 가져온다. 상징계 안에 있으면서도 상징계를 위반하고, 상징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도 완전히 허물지는 않는 '시적 언어'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리듬이나 에너지, 혹은 그 무언가를 담아냄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고 변조한다. 언어를 이용하면서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담아냄으로써 언어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종목이 써내려가는 문자는 그저 기표와 기의의 구조로 이루어진 의미 전달체가 아니다. 이종목의 서예는 궁극적으로 창조적인 무법(無法)을 생산하는 언어이다. 그것은 미분화된 총체적 언어로서 언어의 한계를 가로지르고 상징계의 끝을 열어놓는다. 함께 전시된, 철로 만든 「신들의 땅」 시리즈(2011-2015), 회화 작품 「Holly Paradox-신들의 땅」(2015) 역시 획과 형상이 만들어내는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며 이종목의 작업이 담아내는 '시적 언어'의 긴 호흡을 전달해 우리가 숨고르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시작과 끝도 없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만나는 이종목의 획(劃)과 여백(餘白)은 서로를 구축하는 동시에 서로를 침범한다. 경계는 지워지고 지워지지만 동시에 만들어지고 만들어진다. 하나의 획은 하나인 동시에 전체이다. 획은 한 글자의 일부인 동시에 전부이다. 그것은 만물의 근본이자 모든 형상의 근원이다. 획을 담은 한 순간은 모든 생명의 기운을 담아내는 것이다. 한편 획이 그어지지 않은 여백은 침묵의 공간이자 울림의 공간이다. 비어있음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이종목의 작품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허무와 부재를 의미하는 허공이 아니다. 무엇이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차지할 공간이 필요하다. 무엇이 생동하기 위해서는 움직이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비움으로써 존재가 가능하다. 비움으로써 채워나갈 수 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사물을 존재하게 이끌고 유동(流動)하게 돕는다. 바다가 잠잠해보여도, 땅이 고요해보여도 그 안에는 수많은 움직임이 있고 수많은 존재가 머무른다. 수많은 생명과 소멸이 존재한다. 비어있음은 모든 것을 공명시킨다. 이종목의 예술은 바로 이러한 비어있음에서 일어나는 충만함이다. 고요함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 적요(寂寥)에서 일어나는 생기(生氣)이다.
이종목의 작품들은 재료적인 측면에서 이미 불이를 경험시킨다. 서예의 주된 매체인 수묵(水墨)에는 서로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반대되는 속성이 공존한다. 먹(墨)을 만들기 위해서는 송진을 태우거나 그을음을 얻기 위해 사용되는 불(火)이 필요하다. 또한 불에 의해 탄 것과도 같은 상태인 먹은 죽음과 종말을 상징한다. 그러나 순환의 세계관에서 소멸은 새로운 생으로 이어지기에 먹은 죽음에서 탄생으로 이어지는 생성화육(生成化育)의 원리를 함축한다. 그것은 비어 있는 공색(空色)이자 모든 것을 담아내는 진색(眞色)이다. 한편 먹을 만들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물(水)이 필요하다. 물은 그 자체로 만물 창조, 생명의 상징이다. 그러나 죽음이기도 하다. 물은 모든 생명을 소멸시키고 형태를 분해한다. 모든 것을 삼켜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종말 후에는 새로운 시작이 도래하기에 물은 치유와 정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실 그 자체로 고정된 형태가 없고 액체, 고체, 기체를 넘나드는 물에게 분리와 배제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그저 우주의 이치를 따른 순환을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수묵이 한지에 스며들고 또 하나의 존재와 하나가 된다.
거칠고 무심한 것 같지만 정제의 세련미를 느끼게 하는 '스페이스 몸'의 공간은 이종목의 작품과 하나인 듯, 하나가 아닌 듯 평안과 긴장의 심리적 체험을 동시에 제공한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과 공기의 기운, 대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작품들은 인공과 자연, 인위와 무위(無爲)가 오묘하게 결합된 시적 공간을 체험시킨다. 평범한 것은 고양(高揚)되고 일상은 신비로워지며 위엄을 부여받는다. 물질은 정신이 되고 유한은 무한이 된다. 상승과 하강은 교차된다. 존재의 방식을 체험하며 우리는 명상하듯 자연스럽고 무작위적인 사유에 빠진다. ● 불이展에는 우리를 이러한 사유의 단계로 이끌어주는 또 한명의 작가인 이승희가 있다. 막역한 친구이자 예술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행(同行)인 두 사람-이종목과 이승희-의 관계는 서로 상극인 동시에 하나로 이어지는, 서로를 긴장시키는 동시에 서로가 존재할 수 있도록 작용하는 물과 불 같다. 특히 두 작가가 함께 만들어낸 '스페이스 몸' 2관은 도자와 서예-회화-가 어우러지고, 전통과 현대가 뒤섞이며, 두 작가의 인생이 공명하는 시공간을 선사한다.
흙을 구워 푸르른 대나무 숲을 만들어낸 이승희는 미술 장르의 한정적인 경계를 넘나드는 데에 열중한다. 일반적으로 도예는 흙과 물과 불이 만나 그릇을 만들어내는 장르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승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방식을 뛰어넘는다. 도예와 회화가 한 몸을 이룬 작업을 선보인 것이다. 그의 작품은 평평하게 펼쳐진 회화와도 같은 도예이다.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듦으로써 우리가 도자예술에 대해 갖고 있던 고정된 미학을 유연하게 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시도는 감탄을 자아낸다. ● 이승희는 작업 방법에서도 한국의 전통 도예를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무명(無銘)의 순박함을 벗어난다. 이승희의 세밀한 표현 방법은 작가가 가감 없이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고 뽐내는 서양의 회화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흙과 물, 그리고 불이 만난 그의 작업은 분명 도예이다. 그에게 한정된 경계가 무의미해진지 오래이다.
흙물을 최소 20-30회, 많게는 70회까지도 반복적으로 쌓아올리는, 전통 채색화의 작업 방식을 떠오르게 하는 그의 공필화(工筆畵)는 예술과 삶의 경계도 모호하게 만든다. 흙물을 한 층, 한 층 쌓아올리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지난한 과정을 견디는 것은 -작가 스스로 밝혔듯이-3000배, 108배를 하며 기도하고 수행(修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조급함을 부려 조금이라도 덜 말랐을 때에 덧칠하거나 한 번에 두껍게 바르면 균열이 생겨 처음부터 새로 그려야 하는, 인내를 필요로 하는 작업의 과정에서 이승희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주변을 되돌아보며, 세상을 생각한다. 생각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덧 작품이 완성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를 마주하는 그의 작품은 정지된 하나의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이미지이지만 그의 작업은 시간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이와 관련해 작가는 작업이란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행위인 동시에 깨달음과 단련의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과정을 중요시하는 작가의 태도는 이승희가 자신의 삶, 삶 속의 시간을 작품에 담아냄을 의미하며 예술이 삶의 시간으로 확장되어 들어옴을 의미한다.
한편 이승희가 보여주는 반복의 행위는 마치 우리의 하루하루가 반복되듯이, 4계절이 반복되고 자연의 섭리가 반복되듯이 세계의 진리를 체험하고 담아내기 위한 반복이다. 그것은 무미건조한 현대 도시 문명의 기계적 반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리고 이 반복 속에서 작가는 자신과 세계가 하나 됨을 경험한다. 그의 작품이 편안하면서도 경건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 그 형식적인 면뿐만 아니라 소재적인 면에 있어서도 이승희는 경계를 넘나들고 고정된 사유를 뛰어넘는다. 압정과 꽃, 소파, 호랑이는 모두 양가성을 가지며, 서로 다른 무언가를 연결시켜주는 대상이다. 그 중 작가의 근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호피(虎皮) 문양이다. 전통 사회에서 호랑이는 선과 악을 모두 상징하는 양가적 존재로 공포스러우면서도 성스러운 존재였다. 그것은 의인화되어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신격화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서민을 괴롭히는 타락한 지배층의 상징이었지만 인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도 같았다. 이런 이유로 호랑이의 대체물인 호피는 강력한 벽사(辟邪)의 힘을 담아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작가는 하나의 대상이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동시에 가지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세계의 모든 질서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승희가 호피에 주목한 데에는 또 한 가지 숨겨진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호피를 가장 자주 만날 수 있는 전통 민화가 가진 미학적 특수성이다. 민화는 비전문화가 혹은 이름 없는 떠돌이 화가들이 많이 그렸기에 전문 화원들의 그림과 달리 규범과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민화의 자유분방한 화풍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민화는 그 자체로 구상과 추상, 사실과 상상,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미와 추의 경계를 넘나든다. 민화를 보면 공식화된 미와 추의 전형이나 규범을 찾을 수 없어 그 구별이 모호하다. 규범화되지 않는 화가들, 사회적 질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서민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미적 위계를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다양한 존재와 생각, 다양한 시공간을 포용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모두를 자연스러운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러한 공존이 불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유명한 미학 이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에서 미와 추가 엄격히 구별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추는 미의 반명제, 조화와 균형을 침범하는 부조화, 결핍, 심지어 선(善)의 반대항으로 여겨졌고 그 구별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희는 그러한 미의 위계질서를 거부한다. 장르의 경계가 그렇듯 미와 추, 그 밖의 다른 위계적 구별이 무의미하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에 작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꽃과 민화 속 호피 문양을 결합시킨 자기만의 상징을 그려낸 것이다. 대립과 모순, 공존과 조화는 늘 함께 한다. 절대적인 것이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현실 속 우리의 삶은 이성적 합리주의의 영향 하에 있으며, 여전히 분리와 배제를 실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별의 태도는 항상 대립과 유한함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에게 불이展은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려운 깨달음-모든 것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깨달음-을 전해준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러한 깨달음마저 초월하게 되는, 우리가 온전히 상상할 수 없는 불이의 경지를 선사한다. ● 어느 한 쪽에 머무르는 것도, 중간 지점에 정지한 것도 아닌, 유유히 흐르는 경지를 체험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 이문정
Vol.20160509f | 불이不二 - 물과 불-이종목_이승희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