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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5:00pm / 월,공휴일 휴관
진화랑 JEAN ART GALLERY 서울 종로구 효자로 25(통의동 7-35번지) Tel. +82.2.738.7570 www.jeanart.net
To be continued. ● 전달과 소통은 미술이 이루어내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다. 그것이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담론이든, 객관적인 정보이든, 개인의 감정과 내면의 상태이든, 미술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달한다. 그것이 작품으로 제시되는 한 어떤 이미지나 오브제(object)도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물질로서의 색채와 마티에르(matière)만을 보여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층으로 포장된 의미의 집합소인 미술은 단 한 순간도 순수한 물질이나 사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술이 전달하고 나누는 것은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조화와 균형에서 나오는 이상적인 미(美), 교의(敎義)적 메시지, 감정과 상상력, 순수한 예술로서 미술이 가진 위상, 사회의 편견과 규범에 대한 저항,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 등, 그 답은 무한하다. 만약 의사소통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미술이 무언가를 전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미술은 기호이자 상징이다. 작품은 끝나지 않는 전달과 공감, 이해와 소통, 비공감과 오해의 순환 속에 놓인다. 그리고 이 순환은 창조의 지속으로 이어진다. '예외 상태-우아한 예술가'는 기호이자 상징으로서 미술이 전달할 수 있는 무언가에 최대한의 자유와 가능성을 부여하는 전시이다. 전시의 시작은 이러했다. 루나 이정은과 Paul Zuerker, MR36의 모즈(김동형)와 료니, 네 명의 작가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였다. 어떤 명확한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것이 불가능한 작가들, 구체적인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불분명하고 모호한 상징들, 한정되어서는 안 되는 기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두 개의 주제어나 개념으로 의미가 좁혀져서는 안 된다. 그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면서도 누군가에 의해 매번 새로운 의미가 창조되는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들만이 넘쳐나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특별한 방향성을 갖는 유형 혹은 무형의 지향은 불필요하다. 작가들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그들의 기호들을 운반해왔다. 상징들을 만들어냈다. 갤러리는 그들의 작업실이 되었다. 창작의 실험실이 되었다. 기표와 기의가 넘실거리는 머릿속이 되었다. '유동적이고 혼란스러운 생성 중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예술의 세계는 기호들의 궁극적인 세계이다. 마치 비(非)물질화된(dematerialized) 것 같은 이 기호들은 그들의 의미를 관념적 본질(ideal essence) 안에서 찾는다. 예술에 의해 드러난 그 세계는 모든 다른 세계들, 그리고 특히 감각적인 기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는 감각적인 기호들을 통합시키고, 감각적인 기호들을 미학적 의미로 색칠하고, 그것들에 여전히 존재하는 불투명함에 스며든다. (중략)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기호들은 예술로 수렴된다. (중략) 가장 깊은 단계에서, 근본적인 것은 예술의 기호들 안에 존재한다. (Gilles Deleuze, Proust and Signs: The Complete Text, Richard Howard(tran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0, pp. 13-14.)
미술이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신념은 오늘날에도 지속된다. 그러나 미술이 서로 다른 시공간적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른 가치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변화 역시 유효하다. 사실 과거에서 지금까지 미술은 시공간적 맥락에 따라 유동적인 혹은 불안정한 의미를 전달해왔다. 미술은 단순한 물질이 아닌 기호이자 상징이기 때문에 언제나 특별한 조직망 안에서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미술은 물질로 이루어졌지만 물질의 차원을 넘어선 상징으로 존재하고 가치를 부여받는다. 과거의 작품이 오늘날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에 전달되던 의미 그대로 읽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언제 어디에서 읽혀지는 가에 따라, 어떤 감상의 주체에게 읽혀지는 가에 따라 매번 다르게 해석된다. 이처럼 미술은 맥락에 근거한다. 그리고 맥락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은 미술은 역으로 자신이 놓였던 맥락에 영향을 끼친다.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미술이라 명명되는 순간 작품 속 이미지와 작품을 이루는 물질들은 모두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의미체계에 따라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기호가 된다. 그것이 일상에서 그대로 가져온 이미지나 오브제라 할지라도 그것은 물질의 영역을 뛰어넘는 상징이 된다. 그 유형이나 종류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아내는 기표(signifiant)인지 해석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술은 기호이다. 미술은 상징이다. 기호와 상징은 의미를 형성한다. 형성된 의미는 끝없이 부서진다. 기의(signifié)는 만들어지고, 만들어지고, 만들어진다. 변화하고, 변화하고, 변화한다. 의미의 구조화와 탈구조화가 이루어지는 이 요동치는 변화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통일이 이루어진다. 본질이 드러난다. 본질은 다시 변화하고 새로운 본질이 창조된다. 반복되고 반복된다.
우아한 예술가, 우아한 척 하는 예술가. 루나 이정은의의 작품은 화려하다. 밝고 즐겁다. 아름답다. 우아한 작품이다. 루나 이정은의 작품은 어둡다. 잔혹하고 슬프다. 추하다. 우아하지 않은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이 보여주는 찬란함은 위장색이다. 개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춘다. 허세를 부리며 가식적으로 일상을 치장한다. 자기합리화를 위해 온갖 술수를 이용한다. 거짓을 전달하기에 쉬운 세상이다. 거짓은 진실이 되고 진실은 허황된 꿈이 된다. 사회는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거짓된 풍요와 호화찬란함으로 자신을 위장한다. 반복적으로 복제되는 이미지들은 무엇이 원본이었는지 구별할 수 없는 허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씨앗 없이 꽃이 피고 뿌리 없는 줄기에서 열매가 맺힌다.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구 사이를 부유하는 이미지들의 과잉은 우리에게 과도한 의미 부여를 강요한다. 자극시킨다. 우리는 중독된다. 대중들은 감동적이고 행복한 이미지에 열광한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원한다. 그러나 잔혹하며 폭력적인 이미지에도 열광한다. 끔찍한 이미지를 원한다. 이러한 세계의 본모습을 신랄하게 보여주기 위해 루나 이정은은 세계의 창과도 같은 인터넷을 떠다니는 이미지들을 검색하고 선택하여 재조합한다.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스크린 프린트(screen print)와 붓질을 이용해 층층이 쌓아올려진다. 그려진 이미지들은 평화를 가장한 폭력, 미를 가장한 추, 일상을 가장한 범죄, 부유함을 가장한 빈곤이다. 위장된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사회의 위장색에 현혹당하듯 루나 이정은의 작품에 미혹 당한다.
여러 층이 겹쳐짐에도 평평한 2차원적 평면처럼 보이도록 재현하는 것은 디지털 이미지들이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이미지로 전환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우리-혹은 인터넷-의 세계가 극도의 얇음과 무시무시한 깊음을 모두 갖고 있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는 평평하다. 그러나 그 바닥을 짚을 수 없을 정도로 깊다. 회화의 바탕이 되는 검정색 아크릴판 역시 얕음과 깊음을 은유하기에 적절하다. 루나 이정은의 작품은 물질과 비물질 사이를 떠다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잡종이다. 환영이다. 부유하는 기호들의 세계이다. 어떤 것이 이 기호의 명확한 기의인지 알 수 없다. 루나 이정은의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Paul과의 협업으로 제작된 미디어 설치 작품에서 영상과 그림자로 바뀌어 벽과 거울에 투사되고, 더욱 모호한 기호가 된다. 거울 속의 이미지들은 끝없이 반사되고 유령처럼 가짜 공간을 떠돈다. 그 근원과 고유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모든 통로가 봉쇄된 이미지들은 기형적인 변이를 만들어갈 뿐이다.
이즈음 궁금해진다. 작가는 아름답지 않은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아름다운 척 하는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세계는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름답지 않은 척 하는 것일까? 이 세상은 파편화된 허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실존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 신랄한 비판인가? 자기 위안을 위해 위장된 위악적 행위인가? 꼬리를 무는 질문들은 답을 찾지 못한 채 또 하나의 기표가 되어 떠다닌다. 결국 우리는 의미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 한 번에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루나 이정은의 작품들은 물리적인 노동력이 집약된 판화와 회화의 결합물이다. 전통적인 실크 스크린의 방식을 따라 이미지들을 아크릴판에 인쇄하는 과정은 육체적 노동을 필요로 한다. 인터넷에서 끝없이 이미지를 찾고, 복사하고, 저장하는 것, 판화 제작을 위한 장비들을 작동시키는 것, 붓을 들고 촘촘하게 이미지를 그려나가는 것은 '우아한'이라는 단어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난한 물리적 노동의 시간을 담보로 한다. 우리의 고정 관념을 배반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판화는 원판(原版) 하나로 여러 장을 복제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루나 이정은의 작품들은 단 한 점밖에 찍어내지 못하는 판화 아닌 판화이다. 작가는 일부러 수분 함량이 높지 않은 안료를 사용하여 물리적으로 여러 점을 찍어낼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인쇄된 이미지 위에 붓을 들고 회화적 이미지를 채워 넣음으로써 전통적 회화-미술-의 원본성과 유일성을 고수한다.
이제 작가는 또 한 번의 위장술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루나 이정은은 작품을 둘러싼 벽과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테이핑을 시도했다. 그림이 걸리는 공간으로까지 작업을 확장시킨 것이다. 그로 인해 프레임 안의 작품들은 관객이 서 있는 일상의 공간으로 들어오고 장소특정성을 갖게 된다. 시공간을 초월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니는 전통적 회화의 아우라(aura)가 완전히 깨지는 'Between Place'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간으로 확장된 선과 이미지들은 작품과 현실 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일까? 분리시키는 것일까? 모호하다. 노란색과 검정색이 만들어내는 무늬는 '넘어와도 좋아요.'가 아니라 '넘어오지 마세요.'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에 보다 가깝게 다가오길 바라는 것일까? 바라지 않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정답을 찾아낼 수 없는 혼란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래서 결국 루나 이정은의 작품은 우아한 예술인가? 우아한 예술을 깨뜨리는 예술인가? 루나 이정은은 해석되고, 오해되고, 다시 읽히기를 기다린다. 예술가와 예술가의 작품은 모두 의미를 부여받기를 원하는 기호이다. 생성되기를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이 기호이기에 우리는 계속 해석해야 한다. 고정불변의 의미는 불가능하다. 무언가를 완결시키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이다. 기호는 부유한다. 그것을 채우는 의미는 계속 유동한다. 미끄러진다. 전이된다. 세계와 세계 속 모든 존재들은 매 순간 창조되고 변화한다.
발칙한 예술가, 발칙한 척 하는 예술가. MR36의 작품은 반항적이다. 논리적이다. 날카롭고 삐딱하다. 한계선을 넘는다. 발칙한 작품이다. MR36의 작품은 덤덤하다. 자기모순적이다. 부드럽고 따뜻하다. 한계선을 넘지 않는다. 발칙한 척 하는 작품이다. MR36의 작품에는 언제나 기발함이 담겨있다. 치기 어려 보일 정도로 직설적이고 날 것의 느낌이 강한 것 역시 그들의 특징이다. 자신들의 이름인 'MR36'이 인쇄된 발판을 전시장 입구에 놓아 관람객들이 예술가를 밟아야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꾸민 상황은 우아한 예술가의 아우라와 성역이 깨지기를 바라는 그들의 직설 화법이다. 그러나 동시에 밟히고 밟혀도 예술가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다짐을 공개하는 것이기도 하다. MR36은 예술가의 현실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예술가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버티는 의자처럼 불안하다. 예술가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고뇌에 차있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현실 속의 예술가는 자신이 마주하는 미술계-미술관과 갤러리, 평론가-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한다. 불안한 힘겨루기를 계속하는 예술가의 삶은 길고 긴 경주와 같다. 자본주의 논리를 생각할 때에도 예술가의 모습은 불안하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는 돈의 논리를 초월하며 가난을 개의치 않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역시 편견 섞인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일 뿐이다. 우아한 예술가도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는 자조 섞인 통찰을 보여주듯 MR36은 자신들의 통장번호를 보여주는 부서진 네온사인(neon sign)을 설치했다. 네온사인 아래에는 모자가 놓여 있고 그 주변으로 동전과 지폐들이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다. MR36이 생각하는 현실 속의 예술가, 그리고 그들이 지향하는 예술가는 우아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예술가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을 보다 풍자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MR36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그랬던 것처럼 모나리자(Mona Lisa)를 희롱한다. MR36은 자신들의 이름이 적힌 전광판으로 모나리자의 전면을 덮어버렸다. 그들이 개인전 때마다 전시장에 붙여놓는 MR36의 포스터가 있는데,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이미지에 자신들의 이미지를 뒤섞은 것이다.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퍼포먼스를 떠오르게도 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MR36이 지닌 풍자적 감각을 대변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예술이 가진 성스러운 아우라를 깨뜨리기 위한 것인가? 자신들이 그에 못지않은 예술가가 될 것임을 선포하는 것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신적 아우라를 풍자하는 것인가, 뒤샹을 풍자하는 것인가? 아니면 언젠가는 꺼질 네온사인처럼 예술의 절대적 가치도 꺼지고 희미해질 것이라는 암시인가? 예술가에 대한 그들의 고민은 이제 미술 작품과 전시에 대한 숙고로 이어진다. 특히 MR36은 작품 자체를 느끼고 감상하기보다 그것을 보았다는 인증과 허세, 과시에 집중하는 현 세태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그들이 찍은 사진은 어떤 의미도 담지 못하는 이미지의 과잉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떠돈다. 미술이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인 만큼 관객과 작품이 직접적으로 만나 공유하는 순간이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촬영을 위해 들이댄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작품을 본다. MR36은 예술가에게 발칙할 정도로 앞서나가는 무언가를 보여주길, 담론을 생산하길 원하면서도 정작 작품에서 그러한 것들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서운함을 토로한다. 이에 전달과 소통이 일어나지 않고, 심지어 오해조차도 받지 못한 채, 단순히 소비되기만 하는 미술에 대한 저항으로 료니는 자신만을 위한 비(非)공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고민 끝에- 그것을 기록해놓은 사진을 「Basement Exhibition; 나를 위한 전시」(2016)라는 제목으로 공개했다. 카메라의 렌즈로 작품을 감상하는 상황이 일반적인 것이라면 처음부터 사진으로만 작품을 공개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이다. 사진 속 작품들의 제목은 전시할 때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는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작품이 전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하나의 기호로서 존재하는 작품의 의미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 자신만을 위한 개인전을 기록한 사진들,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작품들이 미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각 프레임의 형태를 띠고 있어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지나치게 정직한 액자 안에 갇힌 작품들은 일상의 공간과 긴밀하게 연결된 작업을 해온 MR36의 성향과도 반대된다. 그에 대한 답은 MR36의 작업 노트에 적힌 다음의 문장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물음을 제시하되, 옳고 그름에 대한 결론짓기는 조심하자." -모즈의 작업 노트- "의미는 사물 안에 있지 않다. 그들과 사물 사이에 존재한다." -료니의 작업 노트에 적힌 노먼 O. 브라운(Norman O. Brown)의 글귀-
MR36은 마침표를 피한다. 질문을 던지지만 지정된 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지는 길을 택한다. 유동하는 'minority report'를 제시하기 위해 제일 피해야 할 것은 하나로 정해진 정답이다. 결론은 확정될 수 없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정답 내리기는 끝없이 유보되어야 한다. 스스로 선택한 자기모순은 「밑사람」(2016)에서도 확인된다. 미술계에 들어선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예술가인 MR36에게 하루하루는 윗사람들과의 긴장된 만남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허탈감과 피곤함 속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에서 자신들의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의 뒷모습이었다. 을(乙)로 살아가는 사회 초년병으로서 자신들이 경험하는 긴장과 억눌림에 대한 대리만족으로 눈 맞추기를 선택하지 않고 내려다보기를 선택한 그들의 태도는 불평등에 저항하면서도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모순된 심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강력한 권력에 지배당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은 지배자가 되고 갑(甲)이 되길 원하는 이중성의 폭로인 것이다. 한편 MR36은 자신들이 버려진 물건을 수집해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금전적인 이유 때문인 것처럼 해석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들이 버려진 물건을 영감의 원천이자 주된 재료로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을 환기시키고 재창조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 모즈는 집안 구석에 무심하게 놓여있던 할머니의 틀니를 발견했다. 작가에게 틀니는 무의미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담아내는 기호로 작용한다. 할머니의 상징이다. 지난 2월, 작가는 파리(Paris)로 여행을 떠났고 여행의 동반자로 할머니의 틀니를 선택했다. 할머니의 틀니는 파리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기억의 주인공이 되었다. 잃어버렸던 시간이 되찾아졌다. 여행을 마친 후 작가는 할머니의 상징물인 틀니가 더 많은 곳을 여행하고 더 좋은 곳에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틀니를 복제했고, 위임장과 함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로 결심했다. 수의(壽衣)의 색이었던 노란빛으로 만들어진, 할머니의 나이만큼 복제된 81개의 틀니들은 이제 누군가의 여행 동반자가 되어 더 많은 기억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더 많은 의미를 담아내는 예술적 기호가 될 것이다. 이제 과거의 기억은 더 이상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함께 한다. 미래를 향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공존하는 상징물, 그것이 바로 MR36의 일상적 오브제가 가진 진정한 의미이다. 그것은 따뜻하면서도 애잔한 기억을 창조하는 예술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누구인가?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이 고민들은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할까? 답을 찾을 수는 있을까? 답을 진정으로 원하기는 하는 것일까? ● 미술은 물질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을 초월한다. 예술가에 의해 선택되거나 만들어지는 것은 모두 기호이다. 미술-예술-의 기호들은 우리의 생각을 가장 멀리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것은 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오해되기를 기다리며, 재해석되기를 기다리는 기호이다. 기호는 계속 생성된다. 의미는 계속 생성된다. 그렇기에 기호는 계속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 사실들을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직 기호들만 있을 뿐이다. 진실을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해석들만 있을 뿐이다. (Gilles Deleuze, Richard Howard(trans.), 2000, p. 92.) ■ 이문정
Vol.20160410d | 예외상태 : 우아한 예술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