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0429e | 송수연展으로 갑니다.
송수연 페이스북_www.facebook.com/swansonglake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24시간 관람가능
스페이스 이끼 SPACE IKKI 서울 성북구 성북로23길 164 www.spaceikki.com
어머니, 오래지 않아 이렇게 부를 수도 생각할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요즈음 자주 보는 물고기 떼가 여기저기서 나를 건드리면서 지나간다. 물고기 떼의 한 부분은 내 눈 속을 빠져나간다. 아마 그들에게는 기차굴 놀이 같은 동작일 테지.(...) 어머니. 그래서 부릅니다. 이 백골은 오래지 않아 이 말을 부를 래야 부를 수 없는 것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 더 살아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지도 못한 이 백골을 대신해서 사람들은 할 일을 해주겠지요. 어머니 이렇게 불러도 이 목소리는 결코 어머니에게 들리지 않겠기에 이렇게 부릅니다. 부를 수 있는 동안에 부릅니다. 바다 밑에서 중얼거리는 이 자식의 무서운 중얼거림을 어머님은 결코 듣지 못하겠기에 제가 부를 수 있는 이 시간에 어머니를 불러봅니다. 이 꼴을 어머님은 보실 수 없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어머님의 슬픔에 대하여 적어도 여기 벌어진 이 끔찍한 광경만은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지요. 정작 이렇게 되고 보니 어머니, 저는 더 이상 저를 위해서 슬프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일은 끝났습니다. (최인훈,「바다의 편지」中 ) ● 우리는 어쨌든 내일을 위해서 산다. 그 누구도 어제를 위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일은 우리의 죽음에서 한 발 가까운 또 다른 어제가 될 뿐이다. 죽음에 한 발 다가선 내일, 내일은 헛된 오늘의 희망이고, 혹은 참된 오늘의 대가 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쩌서 내일을 위해 사는가? 죽음은 정해져 있고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우리는 전혀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송수연 작가의 'Death Room' 들어가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온전히 세워진 그 공간에서 우리가 마주할 감정은 무엇일까? 눈물이 날까? 두려움으로 바로 뛰쳐나오고 싶을까? 어제의 나를 느끼며 스스로를 토닥여 주고 싶을까? 이런 의문 앞에서 우리는 선뜻 그 방에 들어가기를 주저할지도 모른다. 무언가와 마주할 것 같은 두려움. 그것이 단순히 무서움, 두려움이 아닌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에 두려운 것이다. 죽음에 한 발 가까운 내일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 'Death room for the living'. 살기 위해 들어가는 죽음의 방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 『죽어야 사는 여자 Death Becomes Her』라는 코미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죽어야만 영원히 늙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영원은 또다른 죽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관건은 죽음이다. 죽음은 다시금 죽음을 부르지 않는다. 자살을 부추기는 말이 아니다. 죽음에는 내일이 없다. 죽음에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는 말이다.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죽음이 살기위한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윤회를 이어가는 것은 생전 자신의 업보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업의 씨앗이 다시금 탄생으로 이어지고 죽음에 이르며, 윤회한다. 윤회의 고리를 끊고 평온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열반이라고 하는데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죽음인 것 같다.
우리는 무엇으로 윤회할 것인가. 다음 생에 나의 어떤 업의 씨앗이 탄생의 텃밭에 뿌려질 것인가. 그 방에 들어가 가만히 나를 대면해 보자. 나의 어제와 나의 내일. 누군가에게는 없을 내일. 바닷속 깊은 곳에서 어쩌면 최인훈의 소설에서처럼 이미 바다가 되었을 지도 모를 그 아이들, 혹은 빛이 되어 버렸을 지도 모를 그 아이들. 오늘도 어제처럼 살아버린, 살아낸 우리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혹은 오늘 같은 내일을 꿈꾸며 죽음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우리들. ● 사상이 다소 불온한 엄마인 나는 5살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누구나 죽는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죽어 봤으나 죽음이 기억나지 않아 죽은 후의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모르겠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 죽었을 때는 꽤나 슬프더라. 그러나 그 슬픔이 영원한 것 또한 아니더라. 결국 죽은 사람의 빈자리는 없어지게 된다. 아무것도 없어지게 된다.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된다고. 청개구리 동화를 읽고 청개구리 엄마의 죽음에 슬퍼하며 자신의 엄마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아버린 아이는 내 품에 안겨 한 참을 울었다. 마치 내가 지금 죽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이내 어느 순간부터 할머니의 "네 엄마, 잘 도와줘. 그러다 엄마 힘들어서 죽는다" 라는 말에, 태연하게 "할머니, 죽으면 없어.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야. 못 봐."라고 답한다. 물론 할머니는 당돌한 손자의 말에 당황했겠지만, 나는 아이가 마치 나처럼 우리엄마가 죽는다면, 우리엄마도 죽는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것이 이내 대견하기만 하다. ● 죽음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살기위해 죽음의 방에 들어가는 이유일 것이다. '보람찬 내일'을 위해서, 두려움을 이겨낸 내일을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용감해 질 필요가 있다. ● 다가오는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2주기이다. 내일이 없는 그들을 위해, 더 이상의 죽음이 없는 그들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두개골 사이를 지나드는' 물고기 떼들과 함께 바다가 된, 고운 모래알이 된, 밝은 태양빛이 된 그들을 위해 나의 오늘을 주저함 없이 그들을 위해 바친다. ■ 피서라
Space for Individual 시리즈의 하나로 상여의 형태를 차용한 'Death Room for the living'은 우리 사회 속 부조리한 구조적 모순의 죽음과 인간성 회복을 희망하는 작업으로 나무골조에 22개의 흙벽을 세우고 내부를 벽화로 장식한다. 상여는 공동체가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의식이다. 돌아가신 분을 그리워하는 산 사람들의 마음들이 모인 무겁고 아름다운 꽃상여 행렬은 여러 가지 의례를 통해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 본 작업의 시작은 차가운 바닷속으로 우리의 미래가 사그라드는 장면을 목격하고 '우리는 과연 함께 슬픔과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흙벽화에는 보살과 나한의 도상이 현대인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보살 도상은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가져야 할 이타심과 희생을 상징하고, 나한 도상은 현실의 번뇌와 업에 얽매여있으나 더 나은 우리 세상을 위해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개인의 실천의지를 표상한다. 나한의 인물들은 SNS를 통해 이 프로젝트와 함께 하고자 하는 알림에 화답한 일반인들의 신청을 받아 진행되었다. 스페이스 이끼에 전시되는 벽면은 설치물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화면으로 윗열에는 가운데에 관세음보살, 좌우로 허공장, 제개장 보살이 우리 시대의 모습으로 그려져있고 아랫열 가운데에는 참여자의 요청으로 그려진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아이들과 좌우로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상징적으로 그려져있다. ● 이 프로젝트는 오늘날의 나한 및 보살과 같은 실천의지를 가진 개인들이 한데 모여, 우리 사회의 인간성과 지성의 회복을 소망하는 나와 프로젝트 참여자 모두의 공동작업으로 이는 우리 시대 지성(知性)들이 뜻을 한데 모아 사회의 각성을 위해 함께 실천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 강정욱, 김정경, 김정선, 김지윤, 김진환, 문은정, 박미정, 박우진, 박인정, 박정식, 설정미, 송금호, 정이도, 이소은, 이재찬, 이지나, 이진호, 장대성, 전성연, 전희영, 하재민, 한세열, 한정아, 한지수 (2016. 3) ■ 송수연
Vol.20160404d | 송수연展 / SWAN SONG / 宋受娟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