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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영展 / LEEJEYOUNG / 李濟英 / painting   2016_0315 ▶ 2016_0327 / 월요일 휴관

이제영_Fauna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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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315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가비 GALLERY GABI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69(화동 127-3번지) 2층 Tel. +82.2.735.1036 www.gallerygabi.com

세상을 보는 방식, 선택 가능한 발견 ● 사람은 눈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눈은 색채를 구분하고 음영을 감별할 수 있다. 따라서 빛과 어두움 사이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한 변화를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경험과 감정과 사고가 켜켜이 쌓이고 혼재되어 고유한 시각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각자의 시각은 마치 각기 다른 모양으로 굴곡진 창(窓)에 비추어 보듯이 실재의 측량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와 같지도 않다. 고로 한 사람이 보는 것은 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심상이다. ● 이제영은 자신만의 창으로 현실에 있는 무언가를 본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그 이미지들을 왜곡하고 변형하는 과정을 거친 후 스케치를 한다.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우연적인 효과로 생명을 얻게 되는 작품은, 살아오면서 체득한 화가로서의 기교와 다양한 시‧지각적인 경험으로 형성된 개인적인 미감에 기대어 있다. 거기에는 특정한 취향과 기호가 반영되고, 지나온 과거의 시간과 내밀한 기억이 포함된다. 그러나 캔버스 위에 형상들이 쌓아올려질 때에 비로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처음의 존재도 아니고, 작가와 관련된 사연도 아닌, 전혀 알 수 없는 무언가다. 비유하자면 마치 서로 다른 생물체들을 어그러뜨리거나 조각낸 후 합체시키는 도중에 화학적 변이를 일으켜 세상에 없던 형질로 재탄생한 돌연변이와도 같다.

이제영_Fauna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16
이제영_Fauna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6
이제영_Fauna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6

완성된 형체의 각 부위에서는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으며, 전체적인 모습에서 현실에 있는 어느 무언가와 닮은 점을 파악하기도 어렵다. 실제로는 작품의 모델이 되는 사물과 이미지가 존재했으나, 특정한 대상을 지시하거나 환기하는 표현을 지양하면서 본연의 양식이나 속성은 지워진다. 더구나 작가는 제작 과정의 전반을 지휘하는 매우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창작자로서의 주관에 관해서도 철저히 함구함으로써 일말의 단서조차 차단한다. 이제 보이는 것이란 외부의 정보로부터 배제되어 순수하게 추상적인 형체들의 향연일 따름이다. 분명 보고 있으면서도 그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고,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탐사는 미궁에 빠질 뿐이다. 이렇게 해서 명징하지 않은 대상,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오롯이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진다. ● 그림을 마주한 감상자는 대상의 정체를 밝혀내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에 휩싸이게 된다. 이는 낯선 상대를 만났을 때 발동되는 자연스러운 의지의 일종일 것이다. 따라서 보이는 모든 것에서 실마리를 찾아 샅샅이 탐색하고자 할 것이다. 대체로는 붙여진 이름이나 정해진 설명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공인된 역할을 가늠하며 상대방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 수순이다. 하지만 어떠한 표지도 남지 않은 무정형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미 주어진 지식을 활용하는 일반적인 인식의 방법론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때는 몰라도 이제영의 작품에서 대상을 규정하는 의미 작용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건네진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와 왜 그렇게 보았는가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은 창작자가 아니라 그림 앞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달려 있다. 작품을 마주한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의견 전부가 정답이 되고, 그림의 정체는 모두에게 열린 결말로 남는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제시되는 바는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주체적으로 확립하게 하는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이제영_Fauna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6
이제영_Suffocated Village A,B,C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3_2014
이제영_Fauna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6

'실체 없음'을 표현하는 이제영의 추상 작업은 단순히 다채로운 색채의 변주나 형태와 선의 조화로운 구성을 통해서 탐미적인 시각 효과를 추구한 것과는 다르다. 또한 회화만이 가질 수 있는 물질성을 부각시켜서 다른 장르와의 차별성을 꾀했던 부류와도 같지 않다. 그는 자신이 접해온 세계를 녹여내어 이 특수한 존재들을 탄생케 한 창조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후에는 그 방향을 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물러서 있다. 추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감상자에게 보이는 모든 것에 관한 가치 창출의 권리를 넘겨주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그림을 보는 행위에 있어서 주체적인 관점을 확보하는 경험을 통해서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고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무렵이나 창문 틈으로 빛이 스며드는 새벽 즈음에 문득 잠에서 깬 적이 있을 것이다. 어른거리는 시야를 확보하려고 침침한 눈을 깜빡이다가 생경한 무언가를 본 듯한 느낌을 받은 적도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보이는 것이란 어젯밤 악몽에서 시달렸던 괴물이나 음험한 기운을 품고 있는 이승의 존재일 수도 있으며, 영원히 상실해버린 그리운 이의 얼굴 혹은 간절히 소원하는 미래의 한 자락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실체는 외부에서 비롯된 초현실적인 현상이나 외계의 존재라기보다는 어쩌면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한 심상이나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염원이다. 왜냐하면 보는 행위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온전한 자신만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명징하지 않은 모습을 가진 정체 모를 대상에게 이름을 붙이고 쓸모를 정해주고 생동을 부여하는 자격은 오로지 이를 본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는 착시나 환영으로 인해 시각적 혼란을 겪게 되는 일화에서뿐만 아니라, 예측불가의 세상을 마주한 모든 순간에서 동일하게 해당된다. 이 단순하고도 놀라운 진리에 의하면 살아가는 동안 접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는 받아들이는 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제영이 그려서 건네준 미스터리함 그 자체인 세상의 축소판은 직접 무엇을 볼지 결정할 것을, 더하여 발견해낸 대로 삶을 선택해갈 것을 요구한다. 그림은 나에게 말한다.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내가 변화하는 대로 달리 보일 것이다. 그림은 말한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듣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로 그 말을. ■ 허효빈

Vol.20160315a | 이제영展 / LEEJEYOUNG / 李濟英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