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6_0304_금요일_06:00pm
주최 / 대구광역시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대구예술발전소 DAEGU ART FACTORY 대구시 중구 달성로22길 31-12 (수창동 58-2번지) 제2전시실 Tel. +82.53.803.6251~7 www.daeguartfactory.kr
내가 만든 네 전시 겸 포트폴리오 / 내가 직접 만든 내 전시 겸 내 유서. / 위대한 아트스트 박식식박 1982-2016를 진행하면서 / 인간을 최소한의 방식으로 존중하는 자와 존중하지 않는 자. / 작업과 예술을 최소한의 이해로 다가서는 자와 이해하지 않은 자. // 결국에 그러한 인간성의 맨 얼굴을 보게 되는 잔인한 시간들이 / 현재며 태도의 속살을 알게 된 느낌은 그리 놀랍지는 않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무엇을 만들기로 한다. / 애물 단지와 같이. 단지 ■ 박준식
인간다움과 소외, 그 철학적 자문에 대해 ● 표상에 관한 하나의 원천으로써 지각하는 사물과 그것에 응답하는 감각의 구동은 교차되어 드러나거나 차이자체로 발현되기 일쑤다. 한정성이 곧 이미지가 되거나 탈구축을 전제로 하되, 주체와 타자 간 양극을 오가는 관계에서 어떤 피존재성을 표출시켜야 할 상황, 또한 그것을 사실적이거나 추상적 이미지로 묶어내는 작업들에선 더욱 그러하다. 이 경우 타자의 입장에선 시각적 혼란스러움이 강해지고 마음도 복잡해진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상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혼돈의 상태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각잔상을 배제한 사유로써 가능하다. 그나마 그 가능성 역시 표면적이거나 일면적인 감정 인식을 결정짓는 궁극의 층위를 통해 감각인식과 이성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를 스스로 제공해야만 된다. 그래야 감각적 재료를 종합(합), 정리, 가공하는 것에 따라 사물의 전체, 본질, 내적 연관을 파악하고 그렇게 획득한 시지각이 그것 외, 불현 외적인 의미작용의 연쇄 속에서 하나의 대체 가능한 해석으로부터 다른 해석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는 불가분한 시각화의 연장이다. 실천론자들의 관점에선 인식과정의 단계, 그 자체로써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의 끝없는 상호 교환에 머문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여전히 선택이 곤란하고 난해하며 해석은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 (아직도, 늘 그랬듯)불편하다. ● 작가 박준식의 작품도 편찮기는 매한가지다. 위에 기술한 이유로도 그렇지만 무형 정신의 물질화인 시각 조형적 측면에서의 거북함은 쉽게 상쇄되지 않는다. 그러나 차라리 그 불편함에 초점을 맞춘다면 의외의 세계가 열린다. 그건 바로 그의 삶과 연계된, 혹은 언제나 의미와 현전의 근원에서 시각규정의 이탈로써의 예술이자, 본질적으론 본래의 의미를 파쇄 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려는 시도의 집요함이다.
실제로 박준식의 작업은 그의 삶과 깊게 연결된다. 구체적으론 아픔과 죽음, 고독과 소외 등, 유쾌하지 못한 가정사와 맞물린다. 현실세계에서의 경제적, 심리적 궁핍함과 생존에 대한 두려움, 관계에 대한 고민도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알고리즘이다. 오랜 시간 홀로 원룸에서 살았던 경험이 창살 두꺼운 케이지(Cage)에서 먹고 사는 동물들을 연상했고, 그런 동물들을 통해 비루한 인생을 훑는 작업들을 만들었다.(매춘, 박카스 아줌마, 성 등등의 명사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극한 감정을 고요 속에 침잠시킨 채 드러내는 방법이었으며, 삶에 관한 절제된 나열이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존립 불가능한 터전에선 단지 불완전한 개체로서의 실체만이 그 자체로 제시될 수 있는 환경, 그것에 관한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그렇기에 그의 작품들은 모든 것을 배척한 채 특정한 무언가를 지배하는 인식 대비 무의식적인 기초 체계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만이 존립 가능해 왔다. 가라앉은 듯 역동하듯 그렇게 살아있음/ 살아 있게 하는 지시로써 존재되어 왔다는 것이다.
작가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모티프로 궁극의 독자적인 실체에 대한 의미부여에 반발한 분쇄의 연속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은 기억의 수 또는 경험의 숫자만큼 산발적일 수밖에 없다. 개인사와 사회를 포괄하다보니 명징함이 희미해져 다분히 관념적이라는 평가도 그래서 나온다. 이를 그의 여러 연작들과 견줘 형식의 시각에서 분석하자면, 사적 내레이션과 접목된 감각의 공존으로써의 예술적 군락, 이성적 공존의 관점을 지향하는 오브제와 회화성, 반면 그 이후 쌓여가는 퇴적의 그리드로 바라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작가에 의해 행해지고 이때 사물과 도상은 본질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명제가 붙는다. 그렇기에 독해는 여전히 어렵다. ● 일례로 「위대한 아티스트 박식식박」이라는 이번 전시 제목부터 직접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 저기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너부러져 있는 작품들(불 작업 회화, 드로잉, 호박으로 구성된 A 전시관과 사진으로 만든 유언장 형식의 작업을 들여 놓은 B 전시관)은 그저 알 듯 모르 듯 한 의미, 사회 속 하나의 개체로써 옹립되는 또 하나의 실체, 인식의 무의식적인 기초 체계 또는 자신만의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만이 부유한다.
그래도 힌트를 하나 얻자면 작가의 작업노트인데, 그는 "이번 전시는 또 다시 '누군가 죽었다-이번엔 내가 이번 전시 마지막으로 죽었다'라는 주제로 작업을 진행했다. '위대한 아티스트 박식식박'은 죽음을 앞둔 상태의 작가가 그래도 잘 살았다고 하는 긍정과 잘 못살았다고 하는 부정을 선택하는 기로에서 선택한 단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그 기로의 잣대가 세상의 성공과 명예, 돈과 같은 세속적인 기준이 아니라 타인과 유대를 작업을 통해서 만들어 냈다는 것에 가치를 두었다."고 덧붙였다. ● 이를 해석하자면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우리라는 이름으로 유대를 이끌어 냈고 좀 더 나은 예술의 무엇을 만들고 있다면 그것이 위대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위대한 아티스트 박식식박」라는 제목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외, 외로움, 고독, 아픔, 슬픔, 비극이라는 단어 대신 우리, 함께, 동행이라는 단어를 나열하고자 한 목적이 뚜렷하게 엿보인다. 나아가 작가의 지향점을 대리해 뭔가 이루지 못하는, 못해온 무의미함 뒤에 채워놓고픈 것이 무엇인지 비교적 명료해진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자기에로의 심각한 도전을 맞이하고, 가시적 형상만으론 스토리와 의미, 서술과 구조를 판단, 섭취하지 못한다. 가고자 하는 방향과 나와 다른 내지는 다를 수 있는 길이 더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 다르다는 것은 비현실적 재현이며 '변형'이라는 뜻도 된다. 본다는 건 재현에 시선을 집중하는 것이고 느낀다는 것은 변형에 생각과 마음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느끼는 예술에 대하여 대중은 이해하기 어렵고 궁금한 것이 많다. 특히 사람들의 의식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순차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인 개연성도 없는 온갖 잡다한 의식의 편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편재하는 분열증,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의식만이 올곧이 자리한 채 다른 의식들이 증발하는 편집증, 그 둘 사이에서 고백 혹은 독백하고 있기에 다름은 말하기 쉽지만 내 것으로 만들긴 어렵다. 이것이 인간다움 내지는 사회 속 소외되는 현상을 담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 박준식의 작품 끄트머리에 늘 매달려 있는 '인간다움'이라는 한줌의 가치, 이를 정신분석학으로 편성하면 흡사 인간은 의식적인가, 의식은 정신의 소산인가, 의식은 내 것인가에 맞닿고, 의식은 필연적인 것인가 아니면 주입되는 것인가와 상호 교류하는 순간이 포박되어 있다. 외적으론 사회, 경제, 역사까지 교합된다. 이 사이에서 그가 펼쳐놓은 불 그림, 설치, 유언장과 같은 사물들은 그 주체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실체는 무엇이고 현상은 무엇이며, 이때의 반응에 있어 표상은 어떤 지형을 구축 하는가 등에 교착됨을 알 수 있다.
작가 박준식의 작업은 이처럼 형식적인 탈구축과 구축의 전위전복이라는 철학적 프레임 아래 세상에 기존 경험과 기억의 절대성에 대한 스스로의 자문에서 가치 체계를 재조립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외부와 더불어 존재함으로써 반응하고 반응함으로써 차이를 가져오는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 구조를 사유한다. 그의 작품이 다소나마 변별력, 차연을 지니는 것도 그와 같은 외부와의 반응이 존재함을 인식하기에 가능한 것이고, 자동적으로 그것에 반응함으로써 완성되는 탓이 크다. 그리고 여기엔 작가 철학의 수준과 높낮이에 따라 어설플 수도, 강렬할 수도 있다. ● 따라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나머지 설명, 즉 현재 대한민국의 20대-30대 청년들에 대한 이해도가 어떻고 집이 없는 보통의 청춘들이 아무리 일을 열심히 집을 살 수가 있는지 등에 관한 서술은 부차적인 문제다. 노인들의 성,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대한 직접 겪은 이야기를 담은 '셀프 노예 수드라 프로젝트', 좀비 같은 대학교 졸전의 양상의 문제를 다룬 작품, 정말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도 예술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자문을 옮긴 '아티스트 풀 스토리'도 매한가지다. ● 작가도 관람자도 그 하나하나의 작품마다 배어 있는 철학적 질문 앞에 도달하지 않는 한 나머지 계획들-작품들은 외피만으로 진실인 냥 호도하는 껍데기일 뿐이다. 다만 그 깊은 철학의 문을 열거나 열어주는 것은 작가다. 관람자는 그 이후에 등장하는 손님이다. 단지. ■ 홍경한
20160308i | 박준식展 / PARKJUNESICK / 朴浚植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