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부터

정윤경展 / JUNGYUNKYUNG / 鄭赟卿 / painting   2016_0220 ▶ 2016_0301 / 월요일 휴관

정윤경_기억으로부터_캔버스에 유채_116.8×91cm×4_2015

초대일시 / 2016_0220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팩토리 서울 ART FACTORY Seoul 서울 종로구 효자로7길 5(통의동 7-13번지) Tel. +82.2.736.1054 www.artfactory4u.com

기억으로부터 얻는 치유, 치유를 위한 기억"초현실주의자들이 현실의 모습이라고 부르는 것은 왜곡된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사실성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욕망은 이때 세계와 분리되기를 그치고, 초현실주의자로서의 인간은 현실과 의식의 종합인 초현실에 도달한다." (앙드레 브로통) ● 문인이자 의학자였던 앙드레 브로통(André Breton, 1896~1966)은 1924년 자신의 저서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그것에 대한 정의를 위와 같이 내렸다. 그는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단순한 개인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기지 않고 '현실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상상해냄으로써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정신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브로통은 그것이 의식적 영역과 무의식적 영역을 결합시키는 수단으로써 사용되어 그야말로 '절대적 실재'가 된다고 보았다. 그의 이론대로 라면 초현실주의는 상상과 판타지에 의한 현실 같지만 진짜가 아닌 '가상현실'과는 달리 실증적인 의미로서 현실을 초월한 그 무엇을 의미한다고 봐야 옳다.

정윤경_기억으로부터_캔버스에 유채_60×145.5cm_2015

근래에 젊은 작가들에게서 자주 목격되는 '초현실주의적 예술'은 바로 이러한 중요한 요소들이 배제된 채 단지 개인의 공상과 망상에 국한되는 경향을 보인다. 로트레아몽(Comte de Lautréamont', 1846~1870)의 시 구절처럼 '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운' 데페이즈망 형식의 남발은 표면적 조형성은 증진 시킬 수 있겠으나 현실성이 결여된, 다시 말해 본질을 상실한 단순 망상적 접근인 탓에 그것의 결과물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내재하고 있다. 초현실주의란, 단순히 비현실적인 상황을 유추해 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현실을 근간으로 하여 그것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반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초현실주의적 예술은 반드시 현실적인 논제와 맞닿아 있어야 옳다.

정윤경_기억으로부터_캔버스에 유채_60×145.5cm_2015

이러한 관점에서 정윤경의 작업방식은 전통적인 초현실주의가 지니고 있는 미학적 맥락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 그녀에게 현실, 다시 말해 의식은 '부모님의 부재'이며 무의식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다. 현재 그녀는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아내이며, 아이의 엄마이면서 동시에 예술가이다. 남들보다 몇 곱절이나 고단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당당히 맞서있지만, 가끔씩 모든 본분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구칠 것이다. 씩씩하기만 한 아내, 강인한 엄마,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정윤경이 아닌 부모님의 품 안에서 어리광을 피우며 실컷 울며 위로 받고 싶은 솔직한 자기 자신을 욕망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추억들을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오래된 세월의 탓인지 아니면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 탓인지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했던 수많은 추억들을 또렷하게 생각해 낼 수가 없다. 부모님과의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의식 상태인 꿈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그 꿈에서 깨어나면 다시 또 각박한 현실만을 인식한다. 작가는 철저히 현실을 기반으로 부모님의 부재를 직시하고 그러한 상황을 거부하며 부모님과 관련된 추억들을 기억해 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한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과거의 특정 장면을 기억해 내어 그것을 화면에 재현하는 방식이 아닌 기억들을 생각해 내는 그 과정 자체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 과거의 기억들을 유추해 내기 위한 과정 중에 발생하는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지점을 구현해 낸다고 볼 수 있다.

정윤경_기억으로부터_캔버스에 유채_162.2×97cm_2014

초기 작업은 '꿈을 꾼다'라는 상황 자체에 의미를 집중한 흔적이 보인다. 마치 컬러 필터가 씌워진 조명이 내리쬐는 심해(深海)를 표현 한 듯 몽환적인 색감이 캔버스를 메우고 있다. 개구리 알 형태를 한 수많은 세포들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괴한 끈들이 화면 여기저기를 넘나들고 있다. 의식의 상태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는 블랙홀은 화면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작업이 점차 진행되면서 녹색계열로 전체적인 컬러가 정리가 되고 바닷속 같던 구상적 풍경이 사라지고 화면의 일부를 여백으로 남기면서 본격적인 추상화 과정이 시작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는 상상 속의 풍경을 단순히 '재현하던 방식'에서 대상이 없는 그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기억'과 관련된 실재하는 대상을 그려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신을 통해 떠오르는 어떤 에너지를 미사여구 없이 고스란히 표출해 내는 형태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캔버스에 남을 최종 결과물 보다는 작업 과정 자체가 지닌 정신성에 치중하게 되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가장 최근 작업에서는 그녀가 정신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작가의 정신성을 최고의 가치로 강조하는 동양 미학의 포맷을 고스란히 캔버스에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그 근거로 볼 수 있다. 캔버스에 먹을 주재료로 사용하여 뿌리고 흘려서 우연히 발생한 형태를 작업의 출발선으로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먹이 침범하지 못해 비어있는 공간들을 붓질로써가 아닌 여백으로 채워 해석의 여지를 관객에게 전가시키는 방식 또한 동양적 사고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후 먹이 마르고 나면 그 위에 자각(自覺)이나 의식의 검열 없이 개구리 알 형태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복제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에 대한 욕망을 해소하는데 이 행위가 그야말로 작가의 정신성이 최고조로 달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겠다.

정윤경_기억으로부터_캔버스에 유채_130×75cm×2_2014

인간의 잠재의식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유일하게 무장해제되는 지점, 다시 말해,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수면상태이다. 그러나 정윤경에게 있어 자동기술적 표현기법(automatisme)을 이용한 작품 제작은, 굳이 수면상태가 아니면서도 상처받지 않기 위한 자기 정당화 과정이 해제된 상태가 되게 한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지점이 되며 이제는 대부분 지워진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려 노력하는 이 과정을 통해 그녀는 현실의 자아를 치유한다. 이미 해체되고 파편화된 기억들을 지금에 와서 명확하게 재조립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현실이라는 톱니바퀴와 맞물려 왜곡되고 가공되어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재생산 되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에게 있어서 그 기억의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정윤경의 작업이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마음 속에서 지워 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를 사랑했던 마음만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윤상훈

Vol.20160220a | 정윤경展 / JUNGYUNKYUNG / 鄭赟卿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