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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만남 / 2016_0219_금요일_06:00pm
유리상자 10년 특별展 『2015 유리상자-아트스타』Ver. 1
관람시간 / 09:00am~10:00pm
봉산문화회관 BONGSAN CULTURAL CENTER 대구시 중구 봉산문화길 77 Tel. +82.(0)53.661.3521 www.bongsanart.org
봉산문화회관의 기획「2016유리상자-아트스타」展은 동시대 예술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찾는 예술가의 태도에 주목합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10년을 맞는「유리상자-아트스타」전시공모展을 기념하여, 이번 「유리상자-아트스타」 Ver.1展은 공모가 아닌 특별전으로 기획합니다. 올해 전시의 주제이기도 한 '헬로우! 1974'는 우리시대 예술가들의 실험정신과 열정에 대한 기억과 공감을 비롯하여 '도시'와 '공공성'에 주목하는 예술가의 태도 혹은 역할들을 지지하면서, 가치 있는 동시대 예술의 '스타성'을 지원하려는 의미입니다. 4면이 유리 벽면으로 구성되어 내부를 들여다보는 관람방식과 도심 속에 위치해있는 장소 특성으로 잘 알려진 아트스페이스「유리상자」는 어느 시간이나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시민의 예술 향유 기회를 넓히는 데 기여하고, 열정적이고 창의적인 예술가들에게는 특별한 창작지원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공공예술지원센터로서 더 나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참신하고 역량 있는 작가들의 작품 전시를 지속적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 특별전으로 준비된 2016년 첫 번째 전시 「2016유리상자-아트스타」Ver.1展은 회화를 전공한 이지현(1965生)의 설치작품 'dreaming book - 바다' 입니다. 이 전시는 날카로운 도구로 책을 해체하는 신체행위를 통하여,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자신의 생각과 현실 경험, 기억들을 시각화하고, 그것이 보는 이의 본성적本性的 직관直觀과 만날 수 있는 자신의 '미술'을 구현해가는 어느 지점입니다. 우리는 이 전시가 청하는 권유에 의해 예술가의 신체행위가 인류 역사의 기억과 미래의 또 다른 전망 사이를 매개하는 신성의 발현임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 이번 전시는 삶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스며든 '신체행위'를 사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상자 공간 속에 가시화하려는 작가의 조형 의지로부터 설계됩니다. 수천페이지에 이르는 책의 낱장 표면을 일일이 잘게 뜯어내어 해체하고, 뜯어낸 책 조각들을 다시 조심스럽게 붙여 원래의 형태와 전혀 다른 조형설치 상태로 구축하는 이지현의 작업 설계는 신문지를 가늘게 찢어서 캔버스 화면에 붙이는 작가의 1990년대 실내풍경 회화를 실제 전시공간에 입체적 회화로 현실화하는 또 다른 가능성의 실천입니다. 읽을 수 없는 '글자'로서의 '책', 부유浮遊하는 촉각적 질료의 '물질'로 제시한 이 책은 원래의 책과는 다른 모호한 정체성을 지닌 채, 왜? 라고 작가의 행위에 대한 의미를 질문하며, 세계의 본질 혹은 실존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거나 기록의 경계를 넘나들며 꿈꾸는 책을 상상하게 합니다. ● 5m 높이의 전시장 천정에 매달려 우리와 마주하는 길이300×폭85×높이60㎝ 정도의 길쭉한 형태의 종이 재질 덩어리와 그보다 낮은 위치에 매달려 엉긴 2개의 덩어리, 그리고 36㎡ 면적의 바닥에 한쪽 길이방향으로 운동력 있게 펼쳐진 종이이음들은 뭔가 결전을 치루는 해체적 행위 이후의 상태로 보입니다. 가까이 다가서면 거칠게 해체, 재생하면서 드러난 상처와 기억, 사실적인 존재감이 읽혀지며, 사물을 구성하는 쿼크quark입자 사이가 비어있음을 확대하여 확인시키듯이, 혹은 인간의 눈으로는 읽기 어려운 인류 역사의 기억들을 새긴 기념비를 분쇄하듯 한 사건 현장 같습니다. 최근, 제주 바다 인근에서 작업을 해온 이지현은 이 설치작업에 앞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작가는 인문학 책을 뜯어 바다와 배, 물고기, 섬, 파도의 이미지를 유리상자 공간에 연출하고, 지금까지의 인문 역사를 해체하고 떠나는, 하지만 그 역사를 이어가게 될 새로운 사건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 노를 저어가는 용기 있는 젊은이의 바다 여정과 우리의 상상 사이에 관계하는 새로운 소통을 꿈꿉니다. 우리가 올려다보고 있는 길쭉한 덩어리는 해체된 인문학 책의 낱장으로 공작한 작가의 '배'이며, 바닥에 놓인 책 낱장의 이음은 '바다'입니다. ● 눈앞에 펼쳐진 유리상자의 '지금, 현재'는 다름 아닌 자아와 현실 삶, 인류의 오랜 기억에 대한 성찰을 반영하는 '신체행위'이며, 돌이켜보고 다르게 생각하며 수만 번을 뜯고 작은 조각으로 해체하는 행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본연本然의 신성함을 찾아 또 다른 새로운 전망을 갈구하는 한 인간의 수행 태도와 탁월한 매체의 선택으로부터 이행되는 새로운 읽기의 가능성을 공감하게 됩니다. ■ 정종구
지루히 책을 뜯다 문득 창 너머 섶섬이 눈에 들어온다. 점점이 떠있는 몇 척의 배도 따라 들어온다. 잠시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내가 서귀포에 지난 1년간 지내왔음을 의식한다. 작업하고 있는 나에게 또 다른 내가 약간 불만 섞인 대화를 건넨다. 대체 이 먼 곳 까지 와서 뭐하고 있어 라고. 창 너머 새연교가 조명을 밝히고 30년째 노화백이 치는 종소리가 오후 6시쯤 어김없이 들려온다. 난 오늘도 정해진 동선에 따라 매뉴얼화된 로봇 청소기처럼 작업실을 배회하다 늦은 시간 새연교 위 바람에 떠 밀려오듯 차가운 숙소로 내려온다. 반납기일에 임박한 책을 손에 들고 잠시 피로에 쌓인 몸을 싸구려 침대에 누인다. 몇 일전 눈보라 속 용눈이 오름서 본 성산의 먼 바다를 떠올린다. 오늘도 난 그렇게 채워 지지 않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자 인문학으로 가득찬 배를 빌려 타고 저 상상의 바다로의 여행을 떠난다. ■ 이지현
글을 읽어버린 책은 배를 두루마리 삼아 시간을 넘어갑니다. 가치를 상실한 책, 형태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애도하는 소리가 속으로 들리고 떠나가는 배에 걸쳐있습니다. 자연스러우면 좋겠는데 누군가의 공격으로 난파된 것처럼 말을 멎게 합니다. 책장의 파도가 넘실거립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유리로 갇힌 장소에 파도가 넘실거립니다.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시선만 너머 갑니다. 우리의 시선은 두 가지를 역설하며 느끼기 시작합니다. 한쪽 눈으로 까칠까칠하면서도 따뜻한 실험군을 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 영혼의 빈 껍질이 놓인 대조군을 주시합니다. 정말, 그 어떤 차이도 있지 않았으나 우리에게 오는 감정이 두 눈의 갈림길에서 갈라져 버립니다. 더는 읽는다는 건 무용합니다. 글자는 바랜 지 오래고 그 자리를 터져나간 양공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산재하는 구멍이 물질의 두께가 되며 다른 읽기가 시작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글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글을 읽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과거를 더듬어보면 정말이지 언제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눈앞에 엄마와 엄마라는 소리가 언제부터 일치했으며 엄마라는 글자를 읽고 엄마의 눈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첫 순간을 확실히 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의 의식과 눈은 지금에 있다는 것이며 그 방식이 무수한 착각의 공식으로 집적되어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문자는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의미를 발견하게 될 때 자신을 기만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 문자는 뜻도 기호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읽어야 하는지 망설이게 합니다. 언어 없는 책, 책 없는 책장, 책장 없는 오브제. 이제 오브제는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움직이며 보는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끝없이 넘실거리는 바다와 닮았습니다. 어디를 보든 시선을 맞출 대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 멀리에 무엇인가 있다. 연기를 피우면, 조명탄을 하늘로 쏘면 그가 나를 발견하겠지.' 하지만 그런 대상은 전혀 없습니다. 수평선 아래로 잔잔하게 술렁이는 파도가 들릴 뿐입니다. 바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말을 거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바다는 육지보다 네 배나 더 크고 땅처럼 딱딱하게 얼지 않습니다. 산세처럼 무엇이 보이냐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지켜본 마냥 그 어떤 호기심에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넘어갈 뿐입니다. 시선은 파도와 함께 파도를 넘어갈 뿐입니다. 바다는 이것을 과학이라고 보여줬습니다.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거라고 보여줬습니다. 수평선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묻는 게 아니라 나의 눈은 수평선 뒤를 볼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약 보이는 것이 저 바다에 배를 띄워 정복하고자 하는 대상이 돼버린다면 언젠가 그 배는 한 인간을 자멸시킬 것입니다. 크루즈처럼 항공모함처럼 거대한 선박에 탑승한 인류는 지식의 전염병에 자초하고 말 것입니다. 바다는 작은 배의 환상을 보여줍니다. 단지 한 사람을 위한 배의 꿈을 슬며시 비춥니다. 노아(Noah)의 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기록 이전과 기록 이후의 시대를 구분하는데 정작 자신은 신화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역사 종전을 읽을 수 없습니다. 바다는 땅 위에서 땅 아래서 인류의 멸망을 지켜봤고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이 모이는 곳 바다를 통해야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읽기를 버리는 것, 현재 우리 앞에 노아의 다른 이름인 예술가의 방주가 있습니다. 한 명이 타기에도 매우 작고 약한 배입니다. 그는 망치질하는 사람입니다. 노아가 못과 망치로 나무를 이었다면, 그는 기록의 배경으로 배를 만들었습니다.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념하도록 네 면이 유리로 된 공간에 설치했습니다. 하늘의 궁창이 뚫리고 대지가 터질 때 돛대와 노 없는 방주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반면, 그의 돛단배는 투명한 유리창에 갇혀 우리의 시선을 도움 삼아 부유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눈은 3개월 된 아기의 시력이 됩니다. 꿈이 소중한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착각 아닌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유일한 출구입니다. 아이의 눈은 비어있습니다.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른의 눈은 수많은 습관이 된 근육과 프로그래밍이 된 인지작용으로 자신과 세계를 속입니다. 본다는 것은 세계를 담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합니다. 대상을 포착하는 원근법이 그랬고 현상을 포획하는 수많은 기록이 그랬습니다. 그런 관점을 통해 의식으로 들어온 것은 모두 유명을 달리합니다. 내가 본 그것, 내가 읽은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노아는 하늘로 난 하나의 창문을 통해 바깥 날씨를 확인했습니다. 유일하게 외부와 연결된 통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미디어라 부릅니다. 다시 말하면, 미디어는 비어있는 창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복된 상황에 놓였습니다. 배 외부에서 배를 둘러싼 창문을 통해 배를 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손에 있는 스마트폰 액정을 보듯 합니다. 미디어가 된 배의 공간은 한 가지를 알려줍니다. 바다가 우리를 거대하게 둘러싸고 있지만, 배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와 다른 점은 그런데도 한 곳에서밖에 볼 수 없다는 차이입니다. 이 틈으로 바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겸손한 신뢰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다라고 말합니다.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바다였다고 합니다. 유리창으로 고립되어 있는 배는 이 진실을 전달해 주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그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경우인지 우리는 깨닫습니다. 바람에 옷깃이 흔들리지 않고 머리카락이 날리지 않는다면 세상과 상관없는 도그마요, 유아론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수면 아래와 하늘을 구분하지 않는 배는 단지 떠 있는 지점입니다. 그러므로 홀로된 존재는 혼자로 남지 않고 무한히 쏟아지는 별빛처럼 반짝입니다. 이제 잃어버린 읽기를 다시 시작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 김용민
□ 시민참여 워크숍 제 목 : 이지현의 작품세계 일 정 : 2016. 4. 2(토), 오후3시 장 소 : 봉산문화회관 2층 아트스페이스 대 상 : 일반시민 참가문의 : 053)661-3526 내 용 : 이지현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 작가와 관객의 대화
Vol.20160219c | 이지현展 / LEEJIHYUN / 李支鉉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