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양재문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6_0216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아트링크 GALLERY ARTLINK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66-17(안국동 17-6번지) Tel. +82.2.738.0738 www.artlink.co.kr
사진전 비천몽에 관한 존재론적 소고 ● 발자크의 단편소설 『익명의 걸작 le chef-d'oeuvre inconnu』은 우리에게 인간의 완벽한 그림을 상상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장면을 보여준다. 거기서 신비의 화가 프렌호퍼 Frenhofer가 그린 환상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창작의 한계를 시사한다. 당시 니콜라스 푸생 N. Poussin의 스승인 프렌호퍼는 거의 10년 동안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한 그림을 위해 남몰래 그려왔지만 아직도 완전한 모델을 찾지 못했고 그 누구도 그때까지 그의 그림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푸생은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여인을 모델로 추천하였고 이후 모델에 만족한 스승은 아무도 모르게 밤낮으로 그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스승은 자신의 그림을 끝내고 제자들을 모아 놓고 그림을 공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스승의 완벽한 그림을 본 제자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하게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림은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성으로 모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릿하게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카오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는 그려진 전라의 여인이 흐릿한 안개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인상을 결코 지우지 못했다. 이후 스승은 자신의 미완성 그림을 불태워버리고 죽었다.
이 드라마는 물론 발자크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완벽한 그림은 오히려 포획할 수 없는 불가능한 행위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재현의 영역에서 이러한 행위는 전통적인 모든 형식을 뛰어넘어 자신이 경험한 삶의 비밀스런 회한과 그 초감각적인 존재를 지시하기 위한 이미지-행위 image-acte, Philippe Dubois가 된다. 그것은 또한 니체가 예술가의 행위는 양파의 알맹이를 드러내기 위해 끝없이 껍질을 까는 부조리와 같다고 단언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껍질에 본질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고 믿고 끝없이 껍질을 벗기기 때문이다. 여기 프렌호퍼의 완벽한 그림을 생각하게 하는 작가 양재문의 흐릿하고 몽롱한 춤 사진들이 있다. 사진들은 단순히 시각적 임펙트와 미적 효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거의 무의식적인 충동으로부터 야기된 그러나 각기 다른 형태로 드러난 양파의 껍질들이다. 이러한 충동의 세계로부터 드러난 존재론적인 지시 index는 우리가 현악기의 현 絃을 울릴 때 각자에게 전달되는 소리의 공명 共鳴처럼 오로지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되는 공 空의 세계를 누설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진은 오로지 본질을 지시할 뿐 결코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사진이 보여주는 혼돈의 춤사위들은 또한 빛과 움직임이 만들어낸 율동의 흔적임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한 순간을 응고시키는 결정적 순간이나 반박할 수 없는 행위의 증거도 아니며 또한 미적 감동을 위한 조형적 표현이나 사회적 모순에 거슬러 표명하는 집단적 이슈는 더욱 더 아니다.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도 주지 않는 작가의 사진들은 마치 허물거리며 하늘로 비천 飛天하는 영혼을 보여주듯이 춤사위 그 자체의 기록을 넘어 그것으로부터 반사되고 전이(轉移)된 정신적 생산물로 이해된다. ● 작가가 자신의 노트에서 "어떠한 순간을 사진에서 멈춤 그 자체로 표현하지 않고, 춤사위에서 잘려져 나오는 찰나의 전과 후 그리고 그 일련의 광적들을 한 장면에 포함시켜 거기서 드러나는 여운을 추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라고 진술하듯이, 움직임의 연속만 보여주는 사진들은 작가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오방색 컬러와 저속셔터를 사용하여 자신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충동(intuition)이나 알 수 없는 욕구(désir)로부터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조짐의 인상(impression)이나 음색(tonalité)으로부터 야기된다. 그것은 춤사위에 연관되어 자신의 심연에 내재된 기억의 레미니센스와 삶의 애환 그리고 그 존재론적인 아쉬움이 혼돈으로 뒤엉켜 드러나는 일종의 회한의 고백이다. ● 이럴 경우 춤은 더 이상 행위로서의 춤사위가 아니라 어떤 사태의 진상이나 본질을 암시하는 지시로서 춤이 된다. 예술의 완벽한 재현을 위해 불태워버린 프렌호퍼의 불가능한 그림과 같이 작가가 보여주는 혼돈의 춤사위들은 삶의 기쁨과 슬픔, 꿈과 절망, 환희와 회한을 호출하면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애절한 기억의 파노라마임과 동시에 그 불가능한 재현의 여명(黎明)이 된다. 왜냐하면 본질은 끝없이 껍질만 드러내는 양파처럼 언제나 부재의 신호로 끝없이 자신의 존재를 암시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 이경률
지난날 작업하였던 춤 사진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삶의 가장자리에 머물고 있었던 나의 고백으로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중압감에 젖어있었다.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 호수에서 아무리 노를 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 같은 것이랄까. 어떠한 순간을 사진에서 멈춤 그 자체로 표현하지 않고, 춤사위에서 잘려져 나오는 그 순간, 찰나의 전 혹은 후의 시퀀스(sequence)적인 일련의 광적들을 한 장면에 포함시켜 그 여운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내 안에 존재하는 한(限)스러움과 더불어 답답함으로 돌파구를 찾아 헤매는 마음들이 뒤엉켜 무언지도 모를 혼돈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의 세월이 지났다. 뒤돌아보니 이제 삶의 지평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젊은 날 절망감으로 다가왔던 限은 이제 하늘을 올려다보고 심호흡하며 쉬어갈 수 있는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 여유라는 이름이다. 천상을 꿈꾸며 춤추는 자는 아름답다. 절박함에 의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묵묵히 날개 짓 하는 초인의 춤을 꿈꾸고 싶다.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오방색은 고요하다. 은유적인 컬러 톤을 통하여 신명과 절제의 정서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限스러움의 들숨과 날숨으로 만들어진 나의 오방색 치마폭의 움직임이 이번 작업 비천몽(飛天夢)을 통하여, 그 존재성마저 초월한 춤으로 재편되어 신명스러운 한(限)의 빛으로 다가오기를 기원해 본다. ■ 양재문
Vol.20160216a | 양재문展 / YANGJAEMOON / 梁在文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