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주말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이목화랑 YEEMOCK GALLERY 서울 종로구 북촌로 94(가회동 1-71번지) Tel. +82.2.514.8888 www.yeemockgallery.co.kr
김범중, 김명진, 하대준이 참여한 『Mono Chroma』전을 단순하게 요약한다면, 폴리크롬의 반대 항에 있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상과 서사가 있는 그들의 '모노크롬'은 1970년대 미술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요즘 다시 미술시장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는 추상적 모노크롬과는 차이가 있다. 한지 위에 먹, 아교, 흑연, 재, 블랙 제소 등이 여러 안료, 그리고 드로잉과 꼴라주에 이르는 여러 기법이 활용된 그들의 작품은 밝음과 어둠 사이의 무수한 중간단계를 활주하고 있는 무채색 회화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Mono Chroma'는 그들의 작품을 특징짓는 무채색을 가리키는 범주, 즉 과학 용어와 같은 중성적 용어에 가깝지, 역사적이거나 미학적인 용어는 아니다. 전시부제 안의 '모노'를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존재의 일의성'(들뢰즈)과 가깝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지배적인 규칙인 이분법이 아니라, 하나이자 다수인 세계관을 말한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존재의 함성]에서, 들뢰즈를 따라 존재의 일의성은 존재가 수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본다. ●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명확히 구분되지만, 모두 동등하며 존재론적으로 하나 인 것'(들뢰즈)을 말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하나의 유일한 목소리가 존재의 함성을 들려준다'고 한다. 가장 다채로우며 가장 차이화 된 모든 존재 양태들과 관계를 맺는 존재의 유일한 하나의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동등하게 감싸는 이러한 척도는 모든 사물들에게 있어서 같으며, 또한 실재, 질, 양 등에 있어서도 같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뿐 아니라, [의미의 논리]에서도 '실재적인 것을 위한 유일하고도 같은 하나의 존재'를 강조한다. 이러한 '존재의 일의성'은 흑백논리로 귀결될 수 있는 이분법을 넘어서, 진정한 다원주의를 향한 초석이 된다. 이분법의 전형적인 방식은 원본과 복제를 구별하는 재현주의이다, 무엇(자연)으로부터 무엇(언어)을 뽑아내는 추상 또한 재현주의 한 범주에 속한다. 추상은 여전히 참조대상과 관련되며, 구성(해체)주의를 통해서 극복된다. ● 전시의 세 작가에게도 흑 또는 백 대신에, 흑과 백 사이의 무한한 하나의 계열이 있다. 'Mono Chroma'라는, 다소간 논란이 될 만 한 전시제목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작가들이 함께 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방향타를 말할 뿐, 이미 관념적 의미로 과포화 된 특정 사조의 덕을 보려는 것은 아니다. 요즘 서둘러 미술사적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70년대 풍의 단색화는 최소한의 실행과 최대한의 의미 부여가 만나곤 했다. 그때 관객 또는 독자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말과 사물의 무한한 거리를 느끼게 할 뿐인 오독부터 과대광고에 이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80년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이후까지 70년대 단색화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많은 사조들이 부침했지만, 이제 '역사'라는 미명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는 유령들과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동일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들의 작품은 심신의 차원에서 극도의 수행성이 떠올려지는 순간에도, 이전 세대의 단색화를 특징짓는 관념성과 초월성과 거리가 있다. ● 그러한 관념성과 초월성은 객관세계보다는 객관세계를 향하는 주체의 의식에 과도하게 방점이 찍힘으로서 생겨난 태도이다. 그러나 주/객관의 '현상학적' 합일 같은 등으로 대변되는 '지나치게 평화회복적인'(들뢰즈) 담론은 지배적 제도 속에 잘 안착해 있었던 그 세대의 삶의 조건에서 발원한 것은 아닐까. 기왕에 초월과 관념을 비판하는 자리이니만큼, 일상의 예와 비교해보자. 이 전시의 작품들은 한 덩어리의 밀가루에서 수많은 겹과 결을 가진 파이나 국수가 뽑혀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또는 하나의 평면으로 무한히 다양한 형태가 가능한 접지술과도 비교될 수 있겠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최초의 밀가루 덩어리는 굳이 클 필요는 없지만 엄청나게 끈기가 있어야 한다. 이 전시의 세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러한 끈기이다. 끈기는 실재라는 하나의 덩어리를 2개로, 4개로, 8개로...n개(또는 차원)로 증식시킬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물질과 육체가 만날 뿐이다. 여기에서 정신은 물질과 육체의 또 다른 국면일 뿐이다. 하나에는 전부가 들어있다. '모노'는 단지 하나가 아니라, 전체를 위해 선택된 말이다. 전체는 하나의 질서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의 집합을 말한다. 3인의 작가들은 '모노'라는 말을 붙여 최소화했지만, 그 안에서 구사되는 색의 계열의 무한대이다. 과학에서의 실험이 한정된 조건 속에서 선택된 구성요소들의 조합을 꾀하듯, 이들이 활용하는 무채색의 계열은 실험적이라 할만하다. 그들에게 실험은 장황한 장치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장치들에 너무 의지할 때 실험은 형식주의에 빠지고 만다. 중요한 것은 형식주의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실험하는 것이다. 요즘같이 표현적 도구가 다양한 시대에 금욕적이다 싶을 만큼의 조형적 선택은 최대한의 조합이 가능한 결정적인 구성 요소의 선택으로 보여 진다. 그들은 여러 잡다한 요소가 절충적으로 뒤섞여 있는 피상적인 다양성이 아니라, 한정된 조건을 최대한의 결과와 연결시킴으로서 극한의 다양함을 펼쳐 보이려 한다. 먹이나 연필 등 이 전시의 작가들이 활용하는 일련의 매체는 일단 검정 계열로 대변될 수 있는 무채색으로 다가오지만, 검정 자체가 다양한 색의 혼합으로 가능한 색인만큼, 그들의 '단색'에는 이미 수많은 색이 잠재해 있다. ● 각각의 작업은 그렇게 잠재된 수많은 색을 무채색의 계열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잠재성과 현실성 간의 역동적 관계는 형상이 있으면서도 재현주의에 기대지 않는 이 전시의 작품들 모두에서 발견된다. 3인의 작품들을 채우고 있는 무채색의 계열에서 흰색과 검정이라는 양극은 잠정적으로만 설정될 뿐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어떤 시공간으로도 호환될 수 있는 여백부터 어떤 검정보다도 더 어두운 검정이 자리하곤 한다. 그들의 작품에서 선과 면, 그리고 얼룩은 한지 바탕 면과 숨바꼭질을 한다. 한지에 가해진 다양한 기법은 시각을 넘어서 촉각을 자극한다. 다양한 촉감과 결합된 무채색은 다채롭게 다가온다. 그것은 눈/의식 보다는 몸/무의식에 호소한다. 시각을 현혹하는 색이 제한된 대신에 극대화된 촉각성은 연필이라는 바늘로 바탕을 긁는 듯한 드로잉(김범중), 아교를 활용하여 먹의 입자를 떠돌게 하는 기법(하대준), 먹으로 얼룩진 한지를 오려 붙이는 방식(김명진)을 통해 실행된다.
하대준; 의식과 무의식이 협력하는 형태발생적 회화 ● 하대준의 작품은 농도 변화가 무궁무진한 먹 자체의 속성에 주목한다. 먹의 발색이 많기 때문에 굳이 색을 말하는 것은 사족을 붙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채색화보다는 수묵화에 방점을 찍는 동양화의 경향을 반복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물컹거리는 형상들이 범람하는 하대준의 '수묵화'는 매우 이질적이다. 먹이 한지에 스며듦으로 인해 발색되는 효과를 기대하는 대신에, 아교를 탄 물로 먼저 그린 후 먹으로 그리기 때문에, 바탕에서 겉도는 일부 먹 입자들이 독특한 색감과 형상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그 상태를 '종이+아교+먹의 혼합체가 잘 놀고 있는 상태'라고 표현한다. '먹을 빗자루로 쓰는 듯한 기분으로' 그리는 방식은 작가의 주관적 의지에 의해 형상을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 요소에 개방시킨다. 그것은 작품 앞에 있는 주체의 의식보다는 몸(또는 물질)의 무의식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자루질' 역시 최소한의 방향성이 있다는 점에서, 전적인 자동기술적인 산물은 아니다. 진보와 새로움을 넘어 이질성을 추구하는 현대미술에서 무의식은 중요한 요소였다. ●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존재의 함성]에서 사유는 자기의 근원을 결코 의식 안에 두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사유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의식으로부터 돌아서야 하며, '스스로를 무의식화'해야만 한다. 들뢰즈가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어서 선언하듯이, '의식이 하는 일은 허위의식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선재적 처리에 중첩되는 먹은 다양한 밀도로 분포하게 되며, 우연적/필연적 궤적을 화면에 남긴다. 마치 부분적으로 코팅을 하듯 처리된 아교는 재현과 일치되지 않는 입체감 있는 형상을 낳는다. 아교처리에 의해 매끄러워진 부분들은 정확히 계량될 수 없다. 미끄덩거리는 질감의 형상들은 마치 유동하는 세포질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특정한 종의 재현이 아니라, 생명력을 표현한다. 경계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에서 죽음도 떠올린다. 그의 작품에서 생명은 깊이와 표면으로 이원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표층자체가 다양하게 굽이치면서 또 다른 깊이를 만드는 하나의 실재이다.
위아래로 무심히 그은 선들이나 무대 중앙에서 요동치는 듯한 형상은 수많은 주름들처럼 보인다. 주름은 펼치고 접히는 하나의 과정에 의해 움직여진다. 하대준은 '매끈한 표면을 지향하는' 현대 사회의 기술을 언급한다. 단색화로 절정을 이루는 (한국의) 모더니즘 미학 역시 그림을 평면으로 간주한다. 순수한 평면이 되기 위해서 이미지나 서사 같은 불순물은 사라져야 했다. 그러나 하대준의 그림은 「촛불」, 「따뜻하게」같은 작품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차가운 기술적 표면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은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고, 현실적인 것이 다시 잠재적이 되는 쌍방향의 움직임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장이다. 미끄러지듯 그려지지만, 화면은 막 생산된 상품처럼 맨질거리지 않는다. 형상이고 바탕이고 대부분 얼룩져있다. 그의 작품에는 아교와 물과 먹의 순간적인 조합이 만들어내는 얼룩같은 경계들이 있지만, 이 경계들은 현실성과 잠재성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작품은 어떤 특정한 모델을 복사하는 이원적 과정이 아니라, 무단히 생성하고 소멸하는 하나의 과정일 따름이다. ● 마누엘 데란다는 들뢰즈의 사상을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으로 정리한 책에서, 온도, 압력, 속도, 화학적 농도에서의 차이들 같은 강도적 차이들을 말한다. 이 차이들은 결정체의 형태발생이나 동식물의 형태발생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 의하면, 들뢰즈의 존재론에 있어 하나의 종은 그것의 본질적 특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발생시키는 형태발생적 과정(morphogenetic process)에 의해 정의된다. 종들은 시간을 배제한 범주를 표상하기 보다는, 역사적으로(시간적으로) 구성된 존재들이다. 이러한 하나의 과정에 의해 다양체(multiplicity)가 생겨난다. 들뢰즈는 다양체들의 연속체를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맥락에 의하면 생명의 과정을 닮고자하는 예술은 이데아 같은 초월적 관념으로부터가 아니라, '물질세계에 내재적인 형태를 발생시키는 원천들만 사용함으로서, 모든 초월적인 요인들을 배제'(마누엘 데란다)한다. 하대준이 사용하는 물, 아교, 먹이라는 물질은 '가능성들의 공간'인 다양체로 분화된다.
김범중 ; 강도적 차이들이 발생/ 해소되는 과정 ● 수평선 위아래로 진동하는 듯한 사각형들, 또는 여러 중심으로부터 방사 또는 수렴되는 여러 크기의 타원형들이 빼곡한 김범중의 작품은 한지와 연필이라는 최소한의 재료로 펼쳐진 우주이다. 작품의 재료를 극도로 한정시키고 선긋기라는 하나의 방식을 고수해서 생겨난 여러 상태들은 미니멀과 맥시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하나만 떼어내서 봐도 충만한 자족적 형태들을 가지며, 최소, 또는 최대한의 접점을 가지고 연속되어 있는 지속의 세계이다. 그의 작품은 소우주들이 모여 대우주를 이루고, 대우주와 소우주는 거울처럼 서로를 반사한다. 물위 떠 있는 섬 같은 풍경으로도 다가오는 작품 「Eigen Frequency」는 실재와 그 반영상이 동등하다. 가장자리 또는 두 개의 중심에서 형태가 사라지는 만큼 생겨나는 듯한 작품 「Stereodium」에서 나중에 오는 것보다 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처음의 것은 없다. 생명처럼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는 이 세계에서 기원과 종말은 불분명하다. ● 사각형이나 타원형으로 이루어진 단위 구조들은 일종의 원자나 세포가 되어 회화의 몸체를 이룬다. 정지된 매체인 회화는 실제로 움직이지 않지만 그의 작품에는 밀도와 강도의 차이로 인한 잠재적인 움직임이 감지된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운동과 지속은 절단들을 통해 표현된다. 전체 안의 변화는 대상을 나누거나 모이게 한다. 마치 물에 떨어뜨린 진한 밀도의 액체나 공기 중에 울려 퍼지는 음, 또는 향처럼, 빼곡하거나 성글게 표현된 매질을 따라 펼쳐지는 다양한 상태들이 구별되는 점진적 변화이다. 거기에는 공간적인 차이로 암시되는 시간의 추이가 있다. 밀도와 강도가 높은 부분이 시작이고 그 반대가 끝이겠지만, 시작이라고 가정될 수 있는 부분은 진하다 못해 종이의 섬유질이 일어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시점이 시각적으로 가늠 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에서 시점과 종점은 모호하며, 보이지 않는 극점들을 연결 짓는 과정만이 확실하다.
김범중은 2015년에 있었던 『Stereodium』전에서 '우리는 항상 대립군의 긴장 속에 살고' 있다고 보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함을 말한다. 오감 중 가장 명확하고 추상적인 감각인 시각(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발원한 시각중심주의)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이원론적 상황을 강조하곤 한다. 다원주의로 언급되는 오늘날, 단순한 이분법은 사라진 듯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인터페이스 안에 (이진법의 형태로) 편재해 있다. 그러나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는 다르다. 시간적 추이에 따르는 운동인 소리는 무수한 이합집산을 반복한다. 그는 2014년 작가 노트에서 '수많은 저항과 굴절로 변형되는 파장'을 말한다. 소리가 '단한번이라도 처음이 온전히 끝까지 가지는 않음'을 주목하는 작가는 변치 않는 '본질'이라는 것이 있는가를 묻는다. 변치 않는 본질을 추구하는 경향이 추상적이고 평면적인 단색화로 귀결되었음을 생각할 때, 김범중의 '모노크롬'은 역설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추상적 본질이 아니라, 실재적 과정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추상적 본질은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처럼 하나이고 그것을 복제하는 이원적 구조를 전제하지만, 실재적 과정은 끝없이 분기하는 차이들로 이루어진 하나이기 때문이다. ● 작가가 비판하는 이원론적 사고는 유형학적(typological) 사고이다. 마누엘 데란다는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서 이러저러한 본질을 규정하는 유형학적 사고 대신에, 보다 깊은 물리적 과정들의 단순한 결과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그것은 하나의 식(동)물종이 하나의 본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을 생산한 과정들에 의해 정의될 것을 요구한다. 데란다에 의하면 들뢰즈는 이러한 실재론적 존재론(realist ontology)을 강조함으로서,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고자 했다.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음과 비교될 수 있는 김범중의 작품이 기대는 것은 유형이 아니라, 강도이다. 마누엘 데란다에 의하면 강도적 성질은 분할될 경우 반드시 질적인 변화를 동반하게 되는 성질이다. 가령 온도차가 충분히 강도 높게 되면 계는 여러 가지 변화를 겪는다. 그것은 상전이(phase transition)를 겪게 되고 대칭성을 상실하게 되며 그 동역학이 바뀐다. 미적 쾌락(희열) 역시 물리학이나 생물학처럼 강도적 차이들의 변화--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강도적 차이들이 해소되는 양적이고 질적인 과정이 쾌락'이라고 말한다--로부터 야기된다.
김명진 ; 무의식과 시대를 상징하는 검은 우주 ● 2014년 제주도에서 레지던시를 하는 동안 김명진의 작업은 크게 변했다. 먹을 수없이 쌓아올려 칠흑같이 어두워진 공간 속에서 가늘게 명멸하는 형상들이 주종을 이룬다. 섬에서 하늘색은 바다색과 구별되지 않으며 밤하늘과 밤바다의 색 또한 그러하다. 거기에는 하나의 색으로 함축된 우주가 있다. 그 우주 안에 확고한 토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존재들이 흔들린다. 김명진은 제주에 가서 자신이 원래 섬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고향은 통영이었는데 작은 다리가 육지와 연결되어 있어 섬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섬소년 답지 않게 물을 무서워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하얀 포말이 이는 바다는 보는 주체를 삼켜버리는 거대한 실재로 다가온다. 육체와 무의식의 거처인 실재계는 길들일 수 없는 원초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먹 뿐 아니라 블랙 제소나 재까지 활용한 그의 화면은 어린 시절을 지배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은 불안과 고독을 표현한다. 어떤 좌표도 가늠할 수 없는 암흑 속에 던져진, 또는 매달린 존재들은 '밤. 그림자, 무의식의 광장, 내 머릿속의 공간, 사라진 시간에 대한 성찰' 등을 상징하는 우주다. 이 검은 바탕 속에 모빌이나 줄을 타거나 저글링 하는 광대 같은 이미지가 떠돈다. 광대는 공 대신에 자기 얼굴을 굴리기도 한다. 그것은 작업이라는 것이 지속적으로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성찰임을 알려준다. 관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의 무대 위에서 광대는 외롭고 위태롭게 줄을 탄다. 어떤 작품에서 줄들은 조화롭게 상호작용하기 보다는 심하게 엉켜있다. 각자 자기궤도를 돌아야할 조화로운 우주가 혼돈에 빠져있는 것이다. 김명진의 작품 속 블랙은 그가 믿고 싶었던 '어떤 피안의 견고한 세계'일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더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시대의, 그리고 그 시대에 속한 개인의 혼돈으로 다가온다. 제주에서의 체험은 이윤과 성공 지향적 사회에서 어둠속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인간에 대한 애도와 동시에 어두운 무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기억을 불러냈다. 기억은 좋은 것이든 아니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덮이는 것이다. 마치 더 큰 통증이 더 작은 통증들을 순간적으로 잊게 하듯이, 더 큰 소리가 더 작은 소리들을 침묵하게 하듯이 말이다.
김명진이 활용하는 꼴라주는 무엇인가를 갑자기 충돌시켜, 은폐하기도 하고 드러나게도 한다. 모빌, 또는 모빌로 상징화된 어떤 소우주는 제주에서 참여한 '바다환경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실제로 제작했던 모빌에서 왔다. 모빌의 내용물을 채우는 것은 바닷가로 흘러들어온 잡다한 임의적 사물들이었다. 사건처럼 갑작스레 맞닥뜨리는 사물은 무의식을 일깨우고 끝없는 해석을 기다린다. 작가가 마련한 어두운 바탕은 가늘게 매달려 떠도는 존재들을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 어두운 바탕은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상태로 만들고, 다시금 잠재적인 것으로 되돌아가게'(들뢰즈) 한다. 매달려 있거나 떠있는 형상들로 인해, 김명진의 블랙은 밤하늘이나 우주, 불 꺼진 무대 등을 떠올린다. 그것은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과거와 미래가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는 신비와 마법의 세계다. 어두운 심연 속에서 명멸하는 존재들이 나름대로 희망적인 것은 그들을 매달고 있는 가느다란 선 때문이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는 선들은 하얗지 않다. 바탕이 검으니 하예야 확실할텐데 말이다. ● 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흰색의 상징은 빛의 연상으로 시작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많은 언어에서 흰색과 점정은 밝음과 어두움, 낮과 밤을 구별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겨난 이름이다. 김명진의 작품에서 먹을 수 십 겹 쌓아올린 어두운 화면을 가르는 가는 선들은 먹물로 얼룩진 종이를 오려붙인 것이다. 만약 그 선이 하얗다고 한다면 그것은 혼돈과 질서, 악과 선, 그리고 어둠과 빛이 명확하게 갈라지는 듯한 숭고한 장면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러한 기적과 초월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사를 도와주는 소년소녀가 등장하는 김명진의 작품 속 블랙은 금욕적인 수도사의 색도 떠올린다. 존 하비의 [블랙 패션의 문화사]가 말하듯, 블랙이 성직자들이 주로 입는 색이 된 이유는 '신은 형언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있었다'는 유대교 신앙으로부터 왔다. 하비에 의하면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어둠, 신성한 불로 타오르는 어둠은 종교에 쓰이는 어두움에 신비로움을 부여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종교적 신비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종말 및 우울과 더 연관되고 있다. ■ 이선영
Vol.20160202c | 모노크로마 Mono Chroma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