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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국민아트갤러리 KOOKMIN ART GALLERY 서울 성북구 정릉로 77(정릉동 861-1번지) 국민대학교 예술관 2층 Tel. +82.2.910.4465 art.kookmin.ac.kr
사이(between)의 미학: 앎에의 의지와 조형욕망의 듀에토 ● 1. 프랑스의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는 「플라톤의 히스테라(hystera)」라는 에세이에서 플라톤의 국가론(Republic)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 플라톤이 의도하는 인식론적 의미에 도달하기 위한 통로를 동굴 내부와 외부 사이에 놓인 『은유적 미로』라고 부른다. 그녀는 생명의 질서를 만드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연결 통로를 그와 같은 은유적 비유로 대신한 것이다.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가운데 한사람인 그녀는 무엇보다도 히스테라와 같은 내, 외부 '사이의 신비'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 작가 신정재도 지금 미로(labyrinth) '사이'를 고뇌하며 통과하고 있다. 그가 선보이는 배열적 생명의 에코인 림보(Limbo)라는 '경계와 사이'의 미시은유는 '앎에의 의지'와 '조형욕망' 사이에서, 그리고 연구와 표현 사이에서 새로움을 찾는 자신만의 은유적 미로를 만들기 위한 거시적 '과정'(process)이다. 그래서 그는 로고스와 파토스의 사이에 놓인 미지의 통로(림보)를 찾아 지금도 여전히 탐사하고 추리하며 상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간마다 지금 여기에처럼 그 '실재'(reality)에 대한 리포트를 내보이기도 한다.
2. 일찍이『과정과 실재』(1929)를 쓴 과학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과학의 논리적, 수학적 추리가 묘사하는 것만큼 사물에 대해서 질서정연하고 기계적인 배열을 인간의 지성이 그 외부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다. 이를테면 '만일 기본적인 실재가 물질적이고 그것의 다양한 부분이 꽉짜인 기계적 조직으로 이뤄졌다면 자연에는 어떻게 진정한 새로움이 있을 수 있을까? 물질적 사물로 만들어진 자연은 때때로 재배열될 뿐인데 이와 동일한 대상들 이상의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불활성적 물질은 어떻게 정태적 상태를 극복하고 진화할 수 있을까? 나아가 인간의 앎에의 자유는 철저하게 기계적인 우주 안에서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와 같은 의문들이 그것이다. ● 하지만 자연의 조직, 실재의 기계적 질서와 배열의 과정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의문은 앎에 대한 인간의 의지와 자유만큼이나 열려 있다. 그래서 변화하는 과정의 연속이 실재의 진화를 이어주듯 과학은 그 진보의 거시적 흐름을 멈추지 않나보다. 그 호기심은 과학자가 아닌 화가 신정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림보, 즉 죽어 있지도 살아 있지도 않은 경계와 사이에서 동일성에 대한 탐사와 수집, 분류와 배열을 멈추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는 탐사자인가 컬렉터인가? 연구자인가 화가인가? 그는 그 둘 다이다. 무엇보다도 '사이의 미학'을 꾸며보기 위해서다. 그 때문에 그는 지금도 자연에 무단 침입한다. 오히려 그는 자연에의 침입자이다. 또한 그는 실재들 사이에서 어렵게 만난 인상들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리포터이기도 하다. 이렇듯 『과정과 실재』의 질서를 알아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 다시 이미지로 조형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자연에로 침입하는 것이다. ● 하지만 외부에서 침입한 그가 실재의 히스테라에 도달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과정에서 어찌 갈피 잡아야 할지를 갈등하고 있다. 그래서 의지와 욕망 사이의 미로를 발견할 때마다 자신의 앎에의 자유가 철저하게 기계적인 실재들에 대하여 어떻게 새로운 질서로 화폭 위에다 이미지화해야 할지를 되묻고 있다. 거기에는 화석만큼이나 소름끼치는 정적과 더불어 그의 고뇌가 꿈틀거리고 있다. ● 예컨대 2013년의 개인전 Limbo의 퍼레이드가 그것이다. 새로운 관찰과 발견은 언제나 새로운 배열과 표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침묵에 빠져 배열되어 있는 Batocera처럼 그가 또 다시 '정적의 미'를 즐기려 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이 낭독하는 묵시록에 귀 기울이는 이들과 만나고 있는 사제와 같기도 하다.
3. 로고스와 파토스의 듀오가 되어 찾는 '사이의 공간'은 Cerambycidae(검정 하늘소)의 땅, 그 가운데서도 Batocera(참나무 하늘소)의 땅이다. 그의 상상력은 생물학자들이 이미 동일성과 차이에 대한 관찰자의 신념을 가지고 기계적으로 표상화해 놓은 영토(분류표)에 침입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동일한 존재들의 체계인 genus의 분류법(taxinomia)에로 침입함과 다름 아니다. ● 미셸 푸코가 주장하는 『사물의 질서』(The Order of Things)에 따르면 본디 "분류법은 동일성과 차이를 다룬다. 그것은 『분류』의 학이며, 따라서 『존재』의 학이다." 또한 "분류법은 일종의 사물들의 연속성과 상상력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타나게 해주지만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그 연속성을 드러나게 해준다. 따라서 분류법은 존재의 연속성이 어떻게 비연속적인 표상들(répresentations)의 시간적인 결합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동일성의 체계에 의해 사물들을 인식 가능하게 해주는 taxinomia는 표상이 스스로를 표상할 때 그 표상 내부에서 열리는 공간 내에서 전개된다. 존재와 동일자는 그 공간 내에 거주한다." ● 하늘소들의 공간에 들어온 침입자이자 이미 그 안의 레지던트가 된 신정재가 추구하는 그 '존재의 학'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그 taxinomia의 미학정신은 푸코의 언설들과 교집합적이다. 적어도 존재의 연속성에 대한 의문에 동참하려는 의지와 욕망이 겹쳐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또한 그것은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동일성의 체계에서도 그렇고, 그것에 대한 '반복적 이미지'나 '이미지의 연속성'에서 더욱 그러하다. ● 그가 이제까지 보여준 동일한 존재들에 대한 genus의 분류는 재발견이고 재배열이다. 그것은 아마도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연속체의 종합을 새롭게 이미지화하기 위해서일 터이다. 들뢰즈도 『차이와 반복』에서 "연속체의 종합은 어떤 '연속적 반복'(continua repetitio)의 형식 아래에서 우선 내면적으로 이념들에 부합하여 공간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작가 신정재도 그렇게 함으로써 다름 아닌 '사이의 미학'을 지향하는 그의 이념, 즉 Limboism—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영원불멸을 위한 재탄생의 배열미학 정신—에 부합하는 내면적 이미지들의 공간을 반복해서 분만하고자 한다. ● 하지만 들뢰즈는 '반복되는 것은 표상될 수 없다'고도 주장한다. 그에게 반복, 즉 재기억은 표상의 봉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반복은 재현이나 표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반복은 이미지의 생산이 아니라 소멸이라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반복의 예식은 단지 외피일 뿐이다.…나는 반복하므로 억압하며, 반복하기 때문에 망각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특히 리비도에 따른 에로스의 경우가 그러하다. '에로스는 반복되어야 하고 오로지 반복 안에서만 체험될 수 있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작가 신정재가 반복해서 연주하는 로고스와 파토스의 이중주는 그것과 다르다. 에로스와 같은 반복적 충동 대신 '앎에의 의지'와 그것에 따른 '조형욕망'은 표상을 봉쇄하거나 망각하게 하는 억압이기보다 나름대로 표출하고자 하는 구상력이기 때문이다. '반복이 우리를 속박하고 파괴한다면 우리를 해방하는 것 역시 반복'이라고 하여 그것을 '악마적 역량'으로 폄하한 들뢰즈와는 달리 그는 taxinomia에 대한 푸코의 주장처럼 반복적인 재배열을 통해 '표상이 스스로를 표상하기'를 기대한다. 그는 평면이건 입체공간이건 표상에 의해 내부에서 열리는 그 공간이 곧 자신이 기획하며 꾸미는 Limbo를 위한 영토, 이른바 '미학적 재현분류학'의 탄생지가 되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4. 작가 신정재는 새로운 미로인 '미학적 사이'(between)를 발견하기 위해 동일성을 분류하고 배열한다. 그의 수집욕망이나 조형욕망은 처녀지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가리켜 '시지각적 인지를 통한 환상성 연구'라고도 자평한다. 그는 분명히 장자(莊子)의 나비 대신 하늘소로 환상(illusion)을 즐기고 있다. "지금의 나는 정말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지금의 나는 과연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바로 나로 변한 것인가?"를 연상할 만큼 그는 자신만의 히스테라로의 분류학적 환상여행중이다. ● 림보로서의 형이상학적 경계이건 히스테라의 안과 밖이건 생명을 지닌 종(種)들의 생과 사, 그 경계를 넘나들며 그와 같은 '사이의 미학'을 구현하려는 그의 듀에토 역시 환상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로고스와 파토스의 연속체이기도 한 미학적인 종합이 생소하게 느껴질 만큼 우리에게 신기한 환상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의 Limboism은 생소함 너머에다 그가 자신만의 희열을 준비해 둔 탓이다. 그래서 그가 관람자와 더불어 느끼려는 미학적 오르가즘, 그것이 바로 그가 바라는 탐사와 컬렉션의 피날레일 것이다. ■ 이광래
본인의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정신적 미디엄, '채집'은 현장방문이란 구체적 행동양식을 수반하고 있다. 특정한 것을 대량 소유 하고픈 인간의 욕망에 의거하여 자연에서 확보되어진 컬렉션(결과물)을 나열함으로써 지배와 만족의 의미로, 그리고 확보되어진 결과물(채집물)은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닌 주인을 위한 조형적 욕망으로 쓰여지면서 캔버스와 유리모니터 안의 '제압과 확보'의 의미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 그렇다면 이러한 수집에 대한 시각적 쾌락은 어떠한 인지적 원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만족감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이것은 소유자의 뷰포인트(Viewpoint)를 통해 확보된 매체들이 시상의 어느 일정위치에 머무르게 되면서 특정 거리와 각도로 생긴 일루션(Illusion)을 통하여 해체적 쾌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매체를 향한 특정 시야적 관계, 양자 간의 사이미학에서 전달되어지는 소유의 쾌감을 나는 내 작업의 '텍사노미아'(생물학적 분류법- 동종별 보관양식) 를 통해 분류학자의 눈으로 그 실마리를 풀어 나가고자 한다. ●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사회 내의 욕망들을 실현하기 위해 구속과 피구속의 관계성에 대한 가시적 시야를 확보한 채 양자 간의 미묘한 거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불명료함에 대한 확신과 소유에 대한 근원적 욕망은 우리가 원하는 어떠한 중복된 이미지의 배열, 그 관계성에 의거하여 확장되어지는데 이러한 것들을 보충하기 위해 미쉘 푸코의 저서 'Les mots et les choses'의 이론을 조용히 들여다보면서 '말과 사물'이라는 원제적 차원보다는 'The Order of Things'(사물의 질서)라는 영문적 의미로 이번 전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 처음 내가 채집을 다니던 시절, 그것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중남미의 오지를 전전하면서 단순히 학술적 가치와 취미가 아닌 그들로 부터 미적인 흠모 이상의 것이 존재함을 느끼던 그 때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로간의 관계성이 시지각적 인지를 통하여 인간욕망의 새로운 미학적 관점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내 스스로의 과학적 여정은 끝나가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자연의 산물을 핑계삼아 행해졌던 나의 수행 또는 만행은 그 의미적 반영을 통하여 우리들의 이야기로 회귀되면서 나 자신과 사회로부터의 미묘한 관계성을 통해 인간의 소유욕에 대한 독재심을 다시 한번 늘어놓게 한다. ■ 신정재
The Order of Things.. ● If I gathered some of the things that I've been dreaming of, and then classified them in the same way according to their appearance, this act alone would reveal the fundamental core of my work. Basically all the world's living creatures have been given their own scientific designation based on their biological features. These traits have been systematized to further our understanding. In addition, individual species are a subset of a larger Genus which, in turn, is a part of a greater Order. Open as we might be to impartially experiencing the sensory stimulation of our environment, the mind inevitably begins its patterning process in its desire for order. Taxonomy in the field of science takes this need for order to what might seem like an extreme but is the natural outgrowth of our desire to identify, classify and analyze what is in front of us. For example, shoes on store shelves reflect size, color and pattern which are of intense interest for one with a taxonomist's gaze. For me, the visual impact of a succession of multiple figures with the same patterns, shapes, colors and forms acts as a kind of powerful spell from which there is no release. Likewise, when I stand before a series of objects, I am struck by the effect of the sequence in aggregate, its psychological aspects, powerful vigor, and strangely indefinable definition ■
Vol.20160119g | 신정재展 / SHINJUNGJAE / 申政宰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