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갤러리 175 Gallery 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불안, 그것은 속이지 않는 것이다 (among all the signals, anxiety is the one which does not deceive)" -Jacques Lacan, Seminar X (L'angoisse), 1962~1963.
1. ● 말하자면 어떤 사진은 우리가 품고 있는 감정의 '알리바이'를 의심하게 한다. 사태를 포착하는 능력에 있어, 어떤 사진은 당신이 거기가 아닌 '다른 곳에(alius+ibi)' 있었다는 상상적 믿음에 금이 가게 만든다. 다름아니라 그것이 '있어왔음(having been)'을, 당신이 거기에 연루되어 왔었음을 어떤 사진은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어떤 사진은 하나의 신호이며, 얼룩으로써 우리에게 건네진다. ● 대체로 클리셰적인 이헌지의 사진이 껄끄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언뜻 보아서 그가 디지털 카메라 혹은 스마트폰으로 담아낸 꽃과 달콤한 간식, 일상의 풍경들은 누구나 가까이서 쉽게 소비하는 사진-이미지들이지만, 거기에는 물질성을 초과하는 무언가가 끼여 있다. 달콤한 음식은 녹아 내리며, 썩기 쉬운 것들과 깨지기 쉬운 것들은 여지없이 파편화되어 있다. 꽃과 과일은 그 암술머리(stigma)와 꼭지가 강조되어 있어 성적인 기호를 방출하고 있는 듯 보이며, 횟집 수족관에서 바라본 이리저리 엉켜 있는 생선 떼들과 하수구 위에 죽어 있는 물고기, 길거리에서 마주한 짓이겨진 새의 사체는 불길하다. 또한 병원 환자 이송용 카트 옆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녹색 빛과 수술대 위를 비추고 있는 플래시 조명 등은 마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 이렇듯 엔트로피가 강한 이헌지의 사진-인덱스는 위험상황에 대한 전조현상같이 읽혀지기도 한다. 대상의 오점에 낙인(stigma)을 찍어감으로써 그의 사진이 누리는 효과는 무언가가 임박했거나,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신호적 방출을 꾀한다. 이것은 하나의 불안 징후로서, 왜 사진을 찍었는가라는 작가의 수행적 측면으로 우리를 이끈다.
2. ● 라캉에 의하면 불안은 일종의 나눗셈으로 지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몫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모종의 나머지와 마주하는 하나의 형식이 된다. 더 나아가 주체의 언어로 표상될 수 없다는 시점에서 불안은 절대로 나누어질 수 없는, 즉 무리수(無理數)적인 형상, 잉여적인 것과의 마주침에 다름 아니다. 마치 사소해 보이는 것들의 일상적인 채집활동처럼 보이는 이헌지의 사진이 불안의 징후로 읽혀질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잉여적인 것들과의 대면을 전경화했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의 심리적인 투사를 극소화한 채로 풍경의 배치를 툭 잘라버림으로써, 작가의 수행성은 일상에 불가피하게 끼어 있는 불안의 편린(片鱗)들을 발견한다. ● 우선, 시선의 위치부터 주목해보자. 그 시선은 대체로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안에서 바깥으로' 라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시각적인 정면을 비켜나간 채 대각화하여 사물의 형상에 가 닿는다. 다른 궤적이지만 이러한 시선의 지향성을 두고 작가 자신은 'peep', 즉 훔쳐보기의 시선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작품은 시선의 위치가 가지는 안전성을 담지하고, 대상을 외시한다는 듯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 이러한 사진적 행위의 계열 속에는 시선과 대상 관계의 전도라는 불편한 감각이 편재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내가 '먹는다'라는 포만감의 행위-결과는 오히려 그 대상에 포획되어 물끄러미 '바라본다'라는 공허한 시선의 흐름으로 번역되어 있다. 내가 먹고 남긴 것이지만, 타인이 미처 올바른 자리에 버리지 못한 것이지만, 어쨌든 그 대상은 즉시 청소-멸균 되지 않고 자연적으로 녹아 흘러내린다. 스스로 고형화되지 못하고 자괴(自壞)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대상들은 사진적 프레임 안에서 드러나는 순진한 시선 안에 가두어진다. 무심하게 펼쳐 놓는 듯 하지만, 사진 각각의 현전성은 이러한 논리적 '탈구(out of joint)'의 결과로서 끊임없이 유보된다.
3. ● 이렇듯 이헌지의 사진이 던지는 핵심 질문 중 하나는 감각적인 것의 분할이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어떤 곳을 찾아가거나, 혹은 사진적 왜곡을 요하는 일종의 연출적 재주를 부리지 않는 듯 하다. 단지 우연히 발견된 대상과의 근접성만을 확보한 채 가장 용이한 스냅사진 형식으로 재빠르게 그 곳을 훑는다. 또한 디지털 사진이라는 장점에 있어서 그의 사진은 손쉽게 저장되고 전송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담지 한다. 이러한 형식적 유사성 하에서 그것은 인터넷 공간을 떠도는 SNS 상의 사적 이미지들과 닮아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즉각적인 도해(insta+gram)'을 요구하며, 서로의 친밀감을 강화하는 그런 사진들과는 달리, 거기에는 모종의 중립 지점이 확보되어 있다. ● 파토스적 긴급성을 요구하는 자리에서 볼 때 그의 사진은 눈치가 없거나, 시치미를 떼고 있는 듯 보인다. 다시 말해 이도 저도 아니라서 분위기를 싱겁게 만들거나 따분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이-존재는 어떠한 감정적 정향성에 연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난처한 대상이다. 사진-이미지는 유혹적인 것인가, 아니면 혐오적인 것인가? 사진을 찍는 그는 수동적인 방관자인가, 아니면 대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행위자인가? 이러한 질문들 속에 함축된 이중구속의 프레임을 우회하면서 그는 불안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어디에도 귀속될 수 없는 것들의 정동적 울림을 관찰한다.
4. ● 말하자면 이헌지의 사진에서 감지되는 불안이라는 정동은 사소한 것과 관습의 영역 주위를 미세하게 일탈하면서 대상에 '끈적하게(sticky)' 달라 붙어 있다. 보편적으로, 대상과의 근접성을 기록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좋은 것으로 간주할 때 취하는 에토스일 것이다. 우리의 손이 닿는 범위를 벗어나는 사물들 혹은 그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불길한 것들이며, 행복이라는 미래적 약속을 거부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은 그러한 거리낌을 '아직 아님(not yet)'이라는 무규정적 상태로 도치시켜 놓는다. 말하자면 그의 사진적 실천행위는 행복이라는 지향성과 거기에 관여하는 환경-대상과의 연루를 끊임없이 역산(逆算)시키면서 오롯이 남아 있는 물리적인 흔적들을 남겨 놓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위협적인 것은 대상과의 애착을 분리시키는 자기 단절에서 오는 것일까? 거기에는 어떠한 상실의 차원이 스며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질문은 또 다른 교착 상태에 빠지게 한다. 이러한 의심은 현존과 부재라는 이미지의 현상학적 게임에 매몰되게 함으로써 그의 사진이 가지는 투명하고 일상적인 함축을 놓치게 한다. 말하자면 그의 사진은 마치 손톱 밑의 가시,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 같은 것으로서 금방 들통 날 것들의 수집이다. 오히려 거기서 발하는 신호는 의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서 우리가 가지는 규범적 낙관주의의과 대상과의 연루를 재치있게 빠져 나가려는 알리바이적 체계를 흔들어 놓는다. 다시 말해 에토스의 갱신을 요구하는 이헌지의 사진을 보다 적극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그 기저에 깔려 있는 페다고지적 함축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 송정훈
Vol.20160104a | 이헌지展 / LEEHEONJI / 李憲芝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