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31127b | 오순환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9:00pm
남산화랑 NAMSAN GALLERY 부산시 금정구 범어사로 426(남산동 952-2번지) Tel. +82.51.514.4658 www.남산화랑.kr
저 너머까지 모든 것은 꽃이다 ● 10여 년도 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울산시 웅촌에 있는 오순환의 작업실을 찾았다. 마당에 서 있는 가을의 은행나무는 노란 빛 촛불처럼 불타고 있었다. 나는 쉼 없이 불타오르고 있는 또 다른 '촛불'을 봤다. 이전보다 훨씬 좁아 보이는 작업실에서 '마음 가난한' 화가의 식지 않는 작가혼을 보았던 것이다. 거기를 다녀온 이후 며칠 동안 계속 작업실 바닥에 찍힌 숱한 물감 자국들과, 널려 있던 물감과 화구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고투하고 있는 흔적들이었다. 그것들을 이를테면 진흙이라 친다면 그 진흙에서 연꽃인 작품이 촛불처럼 막 피어나고 있었다. 촛불 모양은 붓 모양과 닮았다. 아니, 가녀린 몸피의 오순환이 붓이었고 촛불이었다. ● 그가 웅촌 작업실을 사용한 지는 16년이 됐다. 길쭉하게 흐르는 회야강 물길을 따라 이른 그 마을에서 그는 평일에는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하고 주말이면 부산 집에 잠깐 들른다. 그가 그렇게 많이 그렸던 「가족」과 「집」을 떠나 작업실로 돌아오면 그는 먼저 잠을 청한다고 한다. 그림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한 '시차 적응'이다. 나는 그 적응이 아릿했다. 작업실 한쪽에 놓인, 그가 몸을 누이는 조촐한 간이침대를 보고 나는 과연 그림은 뭔가, 라는 부질없는 질문을 품었다. ● 작업실에서 직접 본 그림은 이미 보내온 사진으로 느낄 수 없었던 깊이가 있었다. 그것을 일컬어 이른바 '실물 대조'라고 하는 것이다. 꽃과 집이 있는 작품 「꽃」에 세로로 쓰인 글귀는 다음과 같다. 「백사여의 차외하망(百事如意 此外何望)」. 모든 일이 뜻과 같으니 이것 외에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그것은 내가 품었던 부질없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꽃 두 송이가 그려진 작품 「꽃」은 말 없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단번에 사로잡았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에 이르고 있는 아, 저 그림들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고 하듯 꽃은 꽃이요 집은 집이었다. 무엇을 더 보태고 뺄 것인가.
1. 기법 ● 그림은 보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것이 그림이다. 그림에서 우리가 처음 보는 것은 물감이 올려져 있는 화면이다. 오순환의 화면은 고유한 특색이 있다. 한 번은 오순환에게 "물감 사용 기법이 묘하다"고 말했다. 그는 "화가에게 기법은 특별히 중요할 것도 없다. 그림에 담긴 것이 무엇이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 말은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기법이 모든 것은 아닐지언정 분명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 그는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다. 아크릴은 반사하지 않으면서 화폭 속으로 스며든다. 또한 덧칠을 하면서 계속 새로운 색을 찾아 그릴 수 있는 걸 가능케 하는 물감이다. 과연 오순환은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에 드는 색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그린다"라고 했다. 마음에 드는 색을 찾는 그 반복 과정은, 말을 부리자면 수행 과정과 흡사하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이 세상에 없는 색도 찾아내고, 이 세상에 있는 그대로의 색도 찾아낸다. 그의 그림은 그의 심성을 따라 온화하고 부드러운 색감을 띠고 있다. 쳐다보면 희붐하게 사라져 버리는 묘한 색도 있고, 선(禪)적인 고요에 이른 화면도 있다. 그것들은 모두 기법과 관계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기법은 그림의 집」이다. 기법과 그림은 따로 둘이 아니다. 기법은 바깥이고 그림은 안이 아니라 기법과 그림 모두가 바깥인 동시에 안이다. 기법과 그림은 하나다. ● 오순환이 자꾸 덧칠을 하면서 찾는 마음에 드는 색은 어떤 것일까. 그는 "좋은 그림은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그림"이라고 했다. 유무간(有無間)에 있다는 말이다. 장대한 하늘과 구름, 주변의 산과 나무도 늘 그렇게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없는 듯 있다. 그가 찾아내는 색도 그런 것이다. 단순하고 질박한, 질리지 않는 항심(恒心)에 이른 색은 자연의 본질에 가까울 것이다. 그 색을 찾는 일이 그의 그림 기법과 한통속을 이루고 있다. 아니 그런 색을 찾으려는 것이 그의 기법을 낳은 것이다. 그래, 그림과 기법은 하나다. 그것이 마음이다. ● 오순환은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학교 다닐 적, 책가방 속에서 펜이 굴러다니면서 책장에 번진 잉크의 파란색이 참 좋았다"라고 했다. 나는 구체적인 그 개별적 경험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것처럼 참 좋았다. 우리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어 그 경험은 손에 잡힐 듯 생생히 통하기 때문이다. 책장에 파르스름하게 번졌던 잉크! 그는 이 파르스름한 색을 특별히 많이 구사한다. 앞선 작품 중 음영을 살짝 드리운 파란 갈필 선묘의 커다란 「난」 작품은 정신의 깊이를 심심히 표현하고 있었다. ● 한 번은 아트페어에서 이런 그림을 본 적도 있었다. 아주 간단한 필치로 화가 혼자 방에 이불 덮고 누운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파란 갈필 터치가 지극히 높고 가난한 정신을 「세한도」 풍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쉬 잊히지 않는 그림이다. ● 맑은 물이 깊어지면 시퍼렇게 되는 것처럼, 백자에 세월이 엉겨 붙으면 시퍼런 기운이 감도는 것처럼 오순환의 파란 갈필 그림은 깊고 서늘하다. 나무가 있고 풀이 있는 뜰을 남자가 소요하고 있는 「풍경」 그림들은 아이가 그린 것 같다. 고졸하다. 필치도 또렷하지 않고 흐릿하다. 그의 말대로 있는 듯 없는 듯한 느낌으로 그렸다. 그 파란색 속에 그가 어른거린다. 가방 속 책장에 번진 잉크 얼룩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어린 오순환! 밤새워 작품을 다 그리고 마당에 나서면 다가서는 새벽의 파르스름한 대기, 그 청아한 파란색이 그가 그리는 색이다.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어 번진다.
2. 꽃 ● 오순환은 이런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한밤중, 작업을 하다가 배가 고파졌단다. 먹성이 좋지 않은 그가 배가 고팠다는 것은 정말 배가 고팠다는 것이다. "시골 작업실에 혼자 있으면서 저쪽 부엌에서 끓인 김치찌개 냄비를 들고 캄캄한 마당을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가로질러 가는데 아, 지금의 내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 거라요." 아니 그는 온전하다고 했던 것 같다. ● 나는 그가 말하는 이미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 담고 있는 감각이 꽃 사태처럼 쏟아졌다. 거기에는 한밤중의 배고픔이 있고, 조심스러운 걸음걸이가 있고, 얼큰한 냄새가 나는 뜨거운 김치찌개 냄비가 있고, 발밑에서 돌부리를 숨기고 있는 캄캄한 마당이 있다. 그런데 어두운 마당을 뜨거운 냄비를 들고 가로지르는, 먹고자 하는 중생의 가감 없는 모습이 왜 아름다우며 온전한 것일까.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의 소중한 순간이기 때문인가. ● 오순환과 이런 얘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깨달음의 최종 단계는 무엇일까.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미 다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저 높은 곳에 닿는 것이 아니라 이 낮은 곳이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을 단박에 아는 것이다." "진짜지요? 그런데 햐-, 내 생각하고 똑 같네." 하지만 정말 그러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을 것이 애초부터 없다면, 그리고 이미 다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고 번민하는가 말이다. 그때 오순환이 그림으로 내미는 것이 꽃이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로 잘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니 확실히 있는 것과, 있는지 불분명한 것이 있다. 이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표현하는 것이 꽃이다." 말할 수 있는 것 너머, 확실히 있는 것 너머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고통스러워 하고 번민할지라도 그것 너머, 아니 이미 그것 속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염화시중의 미소 같은 것이 꽃이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꽃을 그리는 이유다. 그가 꽃을 들어 보인다. 우리는 웃는다. 그래 꽃은 좋다. 참 좋다. ● "세상은 이렇게 피어 있다. 꽃이 피어 있듯 어느 것 하나 완전하고,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다. 기쁨과 괴로움 이 모두가 지금 모습 이대로 환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아마 신이 있다면 우리에게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오순환 작업노트) ● 오순환의 작품에서 꽃은 사람이기도 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의 모양과 사람의 모양이 비슷하다. 아니 똑 같다. 한밤중 냄비를 들고 마당을 가로지르던 오순환도 꽃이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꽃이고, 이 글을 쓴 나도 꽃이다. 우리는 이 말 속에서 상승하고, 그의 꽃 그림을 보면서 더욱 상승한다. 그날 우리는 만추의 산속 음식점에 앉아 있었다. 비가 좀 뿌렸고 바람이 불었다. 창밖 저쪽 허공에서 낙엽 하나가 희한하게 핑그르르 돌면서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나는 "저기 나비가 날고 있다"고 말했다. 아니 그것은 꽃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도 꽃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가을이 절정에 이른 무릉도원에 앉아 있었다.
3. 꽃의 질서 ● 우리는 대개 반복을 견딜 수 없다. 지루하기 때문이다. 반복을 견딜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지루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꽃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겉으로는 같은 꽃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다른 꽃이기 때문이다. 반복처럼 보이나 실제 반복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면서 건사하는 하루하루는 꽃인가 꽃이 아닌가, 반복인가 반복이 아닌가. ● 오순환의 최근 그림에서 꽃들이 사방연속으로 배치된 작품들은 반복을 질서로 전환시키고 있다. 처음에 나는 이 일련의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장식성을 봤다. 하기야 모든 작품은 내 입술을 그 입술에 포개는 순간, 사람으로 변해 세상에 걸어 나오는 '피그말리온의 조각' 같은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장식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은 미술 작품이 감당하는 얄궂은 운명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 사방연속의 꽃 그림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오순환의 이즈음 조형적 관심과 재미, 탐구는 질서에 닿아 있다. 질서 있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것이다. 「하늘에는 별, 내 마음속에는 도덕률」이라는 칸트의 지상 명제처럼 천체의 질서를 따라 내 마음 및 인간 도덕의 좌표를 질서 있게 잡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리라. 오순환은 드로잉 노트를 펼쳐 보이며 "질서 있는 그림이 묘하다"라고 했다. ● "불교에서 질서는 지혜라고 합니다." ● 새로운 변화, 새로운 발견에 대한 일구(一句)였다. 아, 우리가 삼라만상의 '저절로 그러한(自然)' 질서를 내 삶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참으로 크나큰 지혜를 가지는 것일 터인데 말이다. 그의 그림에서 불교적 밑바탕은 매우 짙다. 아슬아슬하고 뜨거운 임계점과 경계까지 갔으리라. 과연 예술과 종교, 미술과 불교가 뭐가 다르랴. 그것이 가로지르기다. ● 「꽃」 작품 중에서 남자 하나가 화면 4분의 3을 차지하는 집 앞의 질서 정연한 노란 꽃들을 다소곳이 바라보는 그림이 있다. 바라보는 그 거리감이 좋다. 인간은 끊임없이 기웃거리며 생각하고 통찰하는 존재다. 그 그림에서 남자가 조심스럽게 몸을 약간 기울여 꽃을 바라볼 때 꽃들과 잎들이 떨리는 것 같다.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다른 「꽃」 그림들에서는 사람을 꽃 속에 집어넣어 아예 꽃들이 이루는 질서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버리는 쪽을 많이 택하고 있다. 사람도 꽃 그 자체가 되는 지경, 사람과 꽃의 구분이 없는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 거기에는 이 세상 같지 않은, 이 세상이 나아가야 할 편안함이 있다. ● 그는 16년 간 같은 마을에서 작업을 이어왔다고 했다. 그의 생활은 주변의 것들이 모두 익숙하게 파악돼 있는 단순화된 생활이다. 꽃을 사방연속으로 배치하는 단순화된 질서는 그 생활의 반영인 것도 같다. 그가 붓이라면 그림을 삶으로써 그리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 그의 생활이 온통 작업에 바쳐지고 있으니 그가 붓인 것은 맞다. 작품과 삶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삶이 붓이다. ● 그러나 어떤 역설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질서 정연한 꽃들의 한없이 편안한 그림에서 그렇지 못한 '현실'과, 그렇게 되고 싶은 '갈망'이 동시에 얼비치는 것 같다. 그 '현실'은 누구나 공유할 수 없지만 그 '갈망'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됐지 않나. 공유할 수 있는 갈망의 이름은 행복이다. 그래, 그러면 됐다.
4. 집 ● 오순환의 그림에서 뺄 수 없는 것이 집이다. 단순한 평면 구조의 집은 더 간단한 모양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집이다. 그는 뜻밖에 "집은 케이스(case)다. 아주 좋은 케이스다"라고 했다. 하나의 틀이라는 말이다. 그는 집을 무엇이든지 다 집어넣을 수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과연 그는 집 속에 많은 것을 그려 넣기도 한다. 집 속에 사람이 앉아 있거나 이불을 덮고 자는 모습이 있는 건 당연하다. 화분이 있는 것도 이상할 것 없다. 그러나 집 그림 속에 개가 있고, 꽃이 피어 있고, 엄마와 아이가 손잡고 걸어 다니는 것은 좀 이상하다. 하지만 그것도 좀 더 생각하면 별스러울 것은 없다. 집 속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니까. ● 그러나 오순환의 방식은 그런 게 아니다. 간단한 모양으로 표현되는 집은, 한 개인이 맨 처음 발견하고 발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 총합이 자연스럽게 다듬은 모양새다. 누적된 누천년의 경험이 낳은 범상하고 평범하며 보편적인 것이다. 오순환이 환기하는 집 모양은 누구나 아는 보편의 집이요, 그의 그림에서 가장 견실한 형상이다. 그 집 모양을 보면 누구나 편해지는 법이다. 그것이다. 작가는 이 편한 형상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집은 모든 것이다. ● 당연히 집이 모양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집은 가족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그의 많은 그림에는 가족이 있다. 평온한 가족의 모습이 등장한다. 깊이 보면 그것은 그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이기도 하다. 화가는 "항상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했던 그의 아내는 말의 원뜻 그대로 그를 적극 내조하고 있다. 꽃의 환한 질서 속에 배치한 자그마한 집 속에 부부가 정좌하고 있거나, 집이 있는 꽃 천지 속에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거니는 모습은 화평하다. 꽃 무리 속에 개도 한 마리 놀고 있는 그 평화로운 풍경에 우리는 참으로 이르고 싶다. 가족과 떨어져 그림을 그리며 사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림 너머에 있을 것 같다. ● 그의 그림에서 집과 짝을 이루는 것이 길이다. 오순환의 그림에서는 숱하고 다양한 길 이미지가 나온다. 그것은 인생의 길이다. 길이 도(道)로 표현되듯 길에 도가 있다. 도를 얻으면 길이 곧 집이 된다. 우리가 길을 가는 것은 도를 얻기 위해서, 즉 집에 이르기 위해서다. 결국 집을 나서 길을 가는 것은 집에 이르기 위해서다. 인생은 '집을 나서 집에 가는' 과정이다. 두 그루 푸른 나무가 호위하며 앞마당에 네 송이 붉은 꽃이 있는 저 「풍경」 속의 집으로 우리는 지금 가고 있다. 오순환이 가고 있다. ● 오순환의 집 그림들은 요즘 더욱 단순화되어 가고 있다. 수식 없이 지극하다. 단순한 집 하나가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집의 한 모퉁이를 꽃 두 송이에게 살짝 내어주고 있는 그림. "「배려」예요." 그것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니 대번에 알겠다. 「뜰 앞의 잣나무」처럼 집 앞에 꽃 두 송이가 있으니 좋다. 나무가 있는 집 풍경은 참으로 많이 생략한 그림이다. 집 앞에는 꽃, 집 뒤에는 나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군더더기를 다 덜어냈다. 아마 화가가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일 터이다. 결국 이르러야 할 '집'이다.
5. 마음 ● 밖에서는 가을바람이 계속 불고 있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보면 어쩔 때 장욱진의 그림이 떠오를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 장욱진 선생의 작품을 참으로 좋아 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변함없이 줄곧 좋아하는 화가는 마티스"라고 했다. 수년 전 부산시립미술관 명화 전시 때 마티스의 한 작품 앞에 섰을 때 그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렸다고 한다. "'갑자기'였어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냥 눈물이 줄줄 흐르더군요." 색채의 마술사로 일컬어지는 앙리 마티스! 색에 대한 욕심이 없는 화가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오순환은 색채를 그렇게 많이 구사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는 "마티스는 형상을 끌고 가는 힘이 넘친다"라고 했다. 과감한 생략과 표현! 분명 그림은 현실과 다르다. 그림은 그림이다, 라는 걸 힘 있게 보여준 이가 마티스다. ● 이런 지점이 오순환식 도상(圖像)이 자리하는 곳이다. 오순환의 그림에는 그가 나오고 그의 아내, 아이들, 집, 나무, 산, 꽃이 있다. 그것들은 반복적으로 나오는 도상이다. 그는 대단한 생략법으로 그 도상들을 끌고 간다. 그 도상들에는 '오순환 표'가 붙어 있다. 자기 스타일을 이루고 있다. 우리 민화처럼 원근법과 사물 크기의 비례가 무시되고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 우리를 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의해 장악돼 있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가 반복적인 도상을 그린다고 하지만 그는 실제 숱한 새로운 시도들을 해왔다. 온전한 깨달음을 바로 보여주고 싶어 달마를 직접 그린 적도 있고, 민중적인 삶의 희망과 꿈을 토정비결 문구를 가져와 표현한 적도 있고, 우리가 곧 부처라는 것을 그린 민불(民佛)도 선보였고, 청풍명월의 푸른 풍경도 그렸다. 그 많은 시도를 통해 그는 가족 집 나무 산, 그리고 꽃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가장 나중까지 남는 것, 그것은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다. ● "모두가 그 자체로 축복이며, 이렇게 축복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불법 아닌 것이 없고, 두두물물 부처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다." (오순환 작업노트) ● 10여 년 전 그는 "우리 민화는 절의 불이문(不二門)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의 수사가 참으로 날카로웠다. 범어사 불이문에 동산 스님의 일구가 새겨져 있다. 「입차문내막존지해(入此門內莫存知解)」. 이 문 안에 들어서면 알음알이와 분별을 버려라. 불이문은 이것과 저것이 다르지 않다는 지혜에 들어서는 문이다. 그러니 프랑스 마티스와 우리 민화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산이 나무이며, 나무가 집이며, 집이 꽃이다. 꽃이 모든 것이다. 우리 앞의 평범하고 당연한 것에 모든 것이 다 이뤄져 있다. 더 빼고 더 보탤 것이 없다. 모든 것은 꽃이다. 과연 그러한가. 오순환의 그림을 응시한다. 무엇을 봐야 하는가. 마음이다. 보이는가, 보이는가. ■ 최학림
Vol.20151217i | 오순환展 / OHSOONHWAN / 吳淳煥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