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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1210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아트사이드 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6길 15(통의동 33번지) Tel. +82.2.725.1020 www.artside.org
온 사방에 물결이 일렁이는 그곳 바닷가를 거닐다 / 내 그림자가 바다에 드리워진 것을 본 것 같다. / 상상이었을지도 모른다. / 그 바다와 그림자에 대한 기억은 하도 강렬하여 / 내가 뭍으로 돌아와 거리를 헤맬 때도 / 바다 물결이 출렁이던 곳, 흔들리던 푸른 그림자가 나를 따라다닌다. / 그 그림자가 도시의 회색 벽에, 시멘트 계단에, 내 작업실 입구에, / 사방에 드리워져 내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 그림자 / 어떠한 미물도 실존하는 것은 그림자가 있다. / 우리가 실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때 / 우리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의 그림자가 있다.
내 작업실에서 나는 왕이다. 뿐만 아니라 노예이기도 하다. 내 작업실에서 나는 기획자이자 투자자이고 노동자이자 청소부이며 심부름꾼이자 화부이다. 내 작업실에서 나는 '거의 모든 것'이다. 그러니 잘못된 작업을 해도 탓할 곳도 없고 원망할 사람도 없다. 월급을 못 받아도, 몸을 다쳐도, 휴일을 주지 않아도 항의할 곳도 없다. 다 내 탓이다. 한편 그 재미에 작업을 하는 것 같긴 하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 잔소리할 그 누구도 없고, 이걸 해라, 저걸 만들어라 명령하는 자도 없으니 완전 자유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과거 왕조시대에 모든 미술작업은 주문생산에 의해 제작되었다. 사실 그때는 예술이란 명칭도 없었다. 당시에 'art'는 '기술'을 의미했다. 예술이란 혁명이후 점차 시민사회로 들어서며 후원자와 주문자를 잃은 작가들이 방황 끝에 획득한 새로운 개념이다. 바야흐로 개인이 대두된 것이다. 물론 시대가 그것을 요구했고 또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획득했다기에는 만들어진 정황도 있다. 결국 새롭게 떠오른 구매자와 화상들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작가들이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여기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갈렸을 것이다. 아무 짓이나 마구해도 되고 아무거나 되는대로 만들어낼 자유는 작업실 내에서는 보장된 자유다. 그러나 이 작업들을 세상에 내놓고, 선보이고,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고자 한다면 그 자유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주문장 없는 주문을 받는 것이 아닐까. 과거 미술의 역할이 권력자를 찬양하거나 종교적 장소를 장식하는 일로 수요자의 요구형태가 비교적 단순했다면 지금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미술의 양상은 실로 다양하다. 그것은 미술기능의 다변화를 말하기도 한다. 이제 보이지 않는 주문장에 그 무언의 요구에 설득력 있는 작업으로 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주문장의 발신자는 대중, 그렇다. 바로 대중인 것이다. 내 세상인줄 알았던 내 작업실에서 아무도 바라보는 이가 없어도, 내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뒤통수가 따갑다. 버스를 탄다.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고 저들 모두에게도 가지고 다니는 짐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저마다의 삶의 보따리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적절한 이유를 붙여가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이기에 움직이는 것이다. 무언가 사명감을 가지고 열정을 쏟아 할 일이 있다는 뿌듯함의 이면에는 그런 식의 자기최면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움직임의 보편성이 있다.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는 나의 뒷모습을 내가 본다. 구부정한 어깨로 흙덩이를 들고 씨름하는 '또 다른 덫에 걸린 모습'이다. 측은하다. 언젠가 대로상에서 넘어져 흙투성이가 되어 너부러진 채 통증과 삐져나오는 눈물 속에서 떠오른 생각도 그랬다. "일상은 이리도 너저분하고 하찮은 것을" 그 순간 나는 내 작업들을 떠올렸고 그것들은 가증스럽고 어처구니없이 화려했다. 그들은 내가 아니었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그 후에도 불쑥불쑥 나를 찾아오곤 하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에 대한 회의와 함께 '나'라는 개인을 불신했다. 사고와 행동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행위하고 있었다. 생각은 헝클어지고 가닥을 잡을 수 없이 무수한 갈래로 빠져나갔다.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야 했다. 작업실 바닥에 주저앉아 나의 '문화행위'에 대한 적대감으로 힘들어했다. 무엇을 한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고, 삶은 그 어떤 것보다 앞서는 것이다. 내 작업과 내 삶의 질의 상관관계가 아무래도 수상하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나는 늠름한 생활인의 모습으로 설거지통과 작업대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자신으로 인한,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삶도 내 작업도 다가올 시간의 파도의 출렁임에 따라 흔들리며 나아갈 것이다. ■ 한애규
테라코타(terra cotta)로 만들어진 여인상으로 잘 알려진 작가 한애규의 개인전이 통의동 아트사이드에서 열립니다. 만물을 생성케 하는 땅과 같은 풍만한 모습의 어머니, 주체적인 여성의 삶을 표현해온 그녀의 테라코타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푸른그림자」라는 제목으로 또 다른 전개를 보여줍니다. 이전의 붉으스럼하던 테라코타 작업에 비해 푸른색이 두드러지는 것이 이번 개인전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여행에서 받은 강력한 기억을 푸른색의 물질로, 여인의 몸으로 떠올리며 다시 눈앞에 두는 것은 떠나지 않던 기억과 환영을 붙잡아 두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계단을 오를 때 보였던 환영의 지그재그로 꺾인 선들, 그것을 마치 삽으로 떠내듯 흙으로 빚어내고 구워 이제 손으로도 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상화된 자신의 모습으로 이제 개인의 기억을 모두의 기억으로 만들며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공감을 일으킵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를 구체화하지 않고 그것의 그림자를 증거로 삼아 보여주는 행위는, 삶과 예술, 그리고 실존하는 것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을 그리게 합니다. 하지만 일렁이는 수면에 비쳐 흔들리는 자신의 그림자, 푸른그림자는 실존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릴 만큼의 강한 이미지로 남아 흙으로 구어 졌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그런 그녀의 삶도 작업도 시간의 파도에 따라 푸른 그림자로 출렁이며 나아갈 것입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 간다는 말이 있듯, 다른 재료가 아닌 흙을 만져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존재와 소멸에 대한 사유로 이끌며 작품 해석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삶과 죽음,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삶, 욕망과 공허함처럼 묵직한 주제들을 흙으로 어루만져 그 무게를 덜고 편안하게 제시하는 데에는 작가로서의 오랜 상념의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 덕분에 조금은 더 가벼운 시선으로 그것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고 삶은 그 어떤 것보다도 앞서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듯,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일상의 체험과 어우러져 한애규 작품의 중축이 되었습니다. ■ 정성희
Vol.20151210a | 한애규展 / HAHNAIKYU / 韓愛奎 / ceram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