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5_120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29-4(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물질의 표면에서 떠나는 나선형 시간여행 ● 한 덩어리에 100키로 가까이 되는 시꺼먼 돌덩어리가 어디선가 기운을 받아서 마치 생명이나 우주가 새로이 탄생하는 듯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김희용의 '새기다, 氣' 전은 말그대로 돌에 기를 불어넣은 작품이다. 통상적으로 기는 불어넣어진다고 상상되지만, 수용체가 단단한 재료인지라 새겨진다. 나선형으로 진행하는 선의 흐름은 발생과 수렴, 또는 펼침과 접힘이라는 상호적 과정을 상징한다. 검은 바탕 위에 새겨진 흰 선은 최초의 시작이라는 극적 행위를 드러낸다. 그러나 시작이 있는 만큼 끝도 있고, 펼쳐진 주름은 어디선가는 접혀지며, 코스모스는 카오스로, 빛은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방향은 쌍방향이다. 나선형으로 돌에 새겨진 드로잉은 변모를 상징한다. 빙빙 돌아가는 기계의 움직임과 돌의 표면 굴곡이라는 저항을 극복하고 새겨진 선들은 하나의 기점으로부터 퍼져 나가는 기운들을 보여준다. 기의 퍼져나감을 강조하기 위해 금색으로 색을 낸 것도 있다. 기점이 여러 개인 경우에는 수렴과 발산이라는 양방향의 움직임들이 교차된다. 서로 다른 굴곡 면에 위치한 기점과 기점의 만남은 힘과 힘이 부딪혀 더 큰 소용돌이로 확장하기도 하고, 서로 상충되기도 한다.
소용돌이 형상으로 뻗어나가는 선은 나비효과처럼 조그만 차이도 매우 커질 수 있음을 예시한다. 작가가 기운을 불어넣기 전에 이미 돌은 어떤 기운의 결집체였다. 그래서 작가는 돌과의 교감을 중시한다. 마주한 돌은 작가의 주관적 의지가 남김없이 관철돼야 하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다. 김희용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돌만큼이나 작가도 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압도하거나 압도당하는 느낌이 아닌, 즉 너무 작지도 너무 크지도 않은, 작가가 팔을 뻗어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돌덩어리는 대화의 적정 수위를 알려준다. 돌 위에 새겨진 선에는 손의 떨림, 감정의 기복이 지진파처럼 드러난다. 작업하는 방식은 같지만 결과는 일회적이다. 부드럽게 연마된 표면은 마치 알 같은 느낌도 준다. 유기체의 주름처럼 보이는 그 위의 선들은 알의 분화과정에 필수적인 선들을 떠올린다. 새겨진 기, 즉 선은 덩어리를 유기체로 조직한다. 새겨진 선은 물질적 덩어리를 활성화한다. 비슷한 양태의 덩어리들이 한 공간에 여러 개 배치되어 있음으로서 덩어리들 간의 잠재적 움직임도 감지된다. 질 들뢰즈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잠재성에서 분화되는 생명의 양상을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유기체는 원초적인 주름, 접힌 것, 접기이다.
세계는 변화하는 곡률(inflextion)로 나타난다. 알은 세계의 시작이다. 김희용의 작품을 알과 비유하기에는 너무 단단하지 않나 싶지만, '모든 단단한 것이 유동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했음'(미셀 세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돌 표면에서 떠나는 나선형 시간여행은 단단한 것이 유동체였던 시기로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작가는 부피를 가진 표면 위에 새긴 발산/수렴하는 선을 통해 시작/소멸의 자리를 두드러지게 한다. 명확한 계획 없이 이루어지는 선의 여행은 점에서 점이 아닌, 주름에서 주름으로 나아가는 운동을 보여준다. 표면을 감싸는 선들의 움직임으로 가득한 김희용의 작품은 도구화로 전락될 수도 있는 투명한 공간이 아닌 불투명한 자리를 강조한다. 몸과 물질이라는 두 실재가 만나는 장에서 선은 양자의 연결고리가 된다. 작가는 돌에 잠재된 형상을 최대한 활용한다. 창조는 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작업이란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잠재적인 것은 언제나 차이, 발산, 또는 분화를 통해 현실화된다. 분화는 어떤 선들의 창조를 함축하고 바로 그 선들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 몸과 물질이 총 동원되는 선 긋기는 나를 잊게 한다. 그것은 나를 잊게 함으로서 나를 표현한다는 역설로 인해 희열을 안겨준다. ■ 이선영
연결되어있다. ● 종로의 나무들을 그렸다. 배우로서 나는, 무대 위에서 문득 상대배우와 내가 하나가 되어있는 순간을 느낀다. 그러다보면 관객과, 또 저위에 기술 스태프와 그리고 무대장치, 나를 비추는 조명까지 극장전체가 하나의 유기체가 된다. 이런 경험이 없거나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정서의 오고감을 가능하게 하는 인류의 보편성은 모두에게 선험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뭇가지들도 각각의 객체 같지만, 하나의 줄기에서 만나 뿌리로 내려가고 땅에 뻗어 다른 나무들과도 만난다. 이렇듯 너와 나도 연결되어있다고 믿는다. ● 연극은 관객과 만나서야 완성이 된다. 연습실에서의 동선과 무대에서의 동선은, 물리적으로 같더라도 다른 차원의 것이다. 배우는 그것을 직접 느끼며 동시에 발화시킨다. 그것은 배우의 역량이라기보다 관객, 배우사이의 어떤 것이다. 회화도 작가와 관객사이의 것일 수 있을까? 관객이 없어도 회화작업은 완성된다. 하지만 거기에서 예술행위의 목적을 찾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화면은 질문이라고 하겠다. ● 답은 어디에든 있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다. 회화는 그것을 각지할 수 있는 수단,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을 함께 보기위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비벼댄다. 내 몸을 투과한 화면은 다시 너와 나에게 보여 진다. 또 다른 나 이기도한 너에게 묻는다. ■ 홍상표
사람들 ●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다. 한 사람에 생각 하나, 그 다채로움을 본다. 다 같은 사람들로 보이는 다 다른 사람들... 군중이란 단어에 휩쓸린 개인의 상실을 본다. 멀리서 보는 '군중'과 가까이에서 느끼는 '사람'의 너무나 큰 차이를 본다.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 하나의 '우주'다. 우주가 하나의 부속이 되는 것을 본다. 부속이 하나의 우주가 되는 것을 꿈꾼다. 사람들이다.
미술평론가 김윤섭은 전시서문을 통해 "한 사람이 다니면 작은 흔적이 남지만, 많은 사람이 다니면 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김소형 작가 역시 개인의 흔적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진 생동감 넘치는 정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 이번전시의 대표작품인 「세상 사람들」 한 점엔 두터운 마티에르의 물감 층을 올려 표현한 빼곡한 사람들이 무려 수천 명이 넘게 등장한다. 제각각 다른 감정을 대변하듯, 색색의 사람들은 서로의 몸을 맞대어 거대한 군중을 만들거나 행복나무를 만들고 있다. 무수히 작은 사람들을 등장시킨 김소형의 작품 속엔 인간은 작은 우주임을 강조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내포하고 있다. ■ 김소형
Vol.20151205e | 김희용_홍상표_김소형-층별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