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와 민중

2015_1130 ▶ 2016_0131

초대일시 / 2015_1204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강경구_김봉준_김상구_김억_ 김준권 류연복_서상환_손기환_안정민_이상국 윤여걸_이상국_이윤엽_정비파_정원철_홍선웅

후원 / 경기도

관람시간 / 10:00am~05:00pm

해움미술관 HAEUM MUSEUM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133 Tel. +82.31.252.9194 haeum.kr

국토와 민중 - 우리시대의 목판언어1. 『국토와 민중』전(이 전시제목은 1983년 한길사에서 간행한 소설가 박태순(1942~)선생의 『국토와 민중』이란 국토지리와 인문지리를 아우른 책의 제목을 빌려왔다. 당시 저자는 우리나라 전체를 훑으면서 국토의 지형, 풍광, 기타 지역적 특색과 민중적 삶들을 아우르며 기록했는데, 거기서 필자는 우리국토와 민중들에게 내재된 정서를 강하게 느꼈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기획의 컨셉을 그때 읽었던 『국토와 민중』의 감동스런 느낌으로부터 출발했고 또 그 제목을 그대로 차용했음을 밝힌다.)은 우리 삶의 현장인 '국토'와, 거기에서 살고 있는 '민중'들의 현실과 정서가 어떻게 상호 침투, 혹은 융합되는지를 목판작가 15인의 형상성을 통해서 드러내려 기획되었다. 목판화는 나무판에 칼질을 통해 이미지를 돌올시키는데 적합한, 간단명료한 표현매체다. 그러나 이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수 십 년 이상의 작업과정을 통해 부드러우면서도 유연한 미를 성취하고, 동시에 강력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내공을 보여준다. ● 이 전시는 목판화의 장르적 특성과 함께, 지금 한국의 사회현실에 밀접한 내용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각 작가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개성을 최대한 수렴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거대한 전형성, 즉 지난 20여 년 정도의 궤적을 통해서 한국현대목판화가 보여줄 수 있는 서사적/조형적 수준과 소통의 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현재 한국의 목판화는 다양한 양식·스타일·경향의 작가들이 경연하는 복합적 장場이다. 그런 다양한 특성들 중에서, 목판화의 원초적인 맛과 정보전달 및 정서적 소통기능을 최대한 확장시킬 수 있는 형식과 내용의 작품들로 본 전시가 구성되었음을 우선적으로 밝힌다. ● 한편, 전시제목에 풍경 대신에 '국토'란 어휘를 쓴 이유는 작가들의 목판화 형식과 분위기가 외국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목판언어라서 그렇다. 구미나 가까이는 중국, 일본과 비교해서도 가장 독립적인 지역성과 표현적 조형성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이는 곧 한국의 현재 목판화 수준이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개성적인 위치에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어서 '민중'이라는 다소 시대가 지나간듯한 단어를 본 전시명칭에 쓴 이유는, '시민'이라는 어휘로만은 전통적 맥락에서의 목판화형식을 차용하는 작품들의 이미지를 수용하기 어려워서다. ● '시민'보다는 좀 더 폭넓게 시대를 아우르며 정치·사회적 맥락의 반영과 비판성을 강조하기엔 '민중'이란 어휘가 더 적합했기 때문이기도 해서다.

강경구_새벽이 오기 전_조립목판에 판각_238×172cm_2015
김봉준_민주주의를 살려내라

2. 한국의 목판화가 근대적 의미로서 등장한 것이 대략 130여 년 전인 개항기(1883년 한성순보에 실린 지구환일도와 같은 서양 천문학 기사의 목판화 삽화. 1884년 근대 최초의 번역소설인 천로역정의 목판화 삽화. 1899년 황성신보에 실린 최초의 목판화 그림광고. 1909년 대한 매일신보에 연재된 만평... 등.)이고, 현대적 개념의 순수미술로 진행된 건 60여 년 정도(보편적으로 미술사가들은 한국현대판화의 시작을 1958년 이항성의 주도로 결성된 「한국판화협회」로 보고 있다. 본격적으로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건 1968년 「한국현대판화가협회」로 참가인원 및 규모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협회 조직이 비교적 원활한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가 되었다. 전자는 근대기 출판물·신문·잡지 등의 삽화 및 장식으로 기능하면서 전래 고판화의 일러스트 속성으로 동시대적 사회문제나 미감의 소통에 능동적으로 기능한 일종의 매스미디어의 역할이었다. 후자는 한국전쟁이후 작가 개인적인 표현매체인 퍼스널미디어로서 현대미술내 독립된 장르적 속성을 확보한 것이었다. ● 현대적인 파인아트로서의 목판화는 지난 60여 년간 놀랍도록 많은 변모를 동반했다. 1958년 판화가 이항성의 주도로 결성된 '현대판화협회'의 창립전에 참가한 상당부분의 작가들이 전통적인 목판화의 기법과 정서를 그 주요한 조형요소로 구사하면서도, 독립된 자기표현의 판화작품으로 목판화를 인식하면서부터 이런 현대적 변화는 시작되었다. 50, 60년대 한국전쟁후의 절대적 빈곤시기에 단순하고 담백했던 조형으로서의 원초적 판각과 프린팅으로 목판화를 개척하고 발아시킨 최영림, 박수근, 정규, 류강렬, 이상욱 등의 작업들이 그 출발이었다. ● 이런 한국현대목판화 1세대 작가들의 영향으로부터 70년대엔 본격적인 모던한 감수성의 작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70년대 현대미술 타 장르들의 모던한 흐름과 함께 본격적으로 목판언어들을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확대했다. 김상유, 강환섭, 김형대, 석란희, 서승원, 송번수, 김상구, 이승일 등의 작업으로, 목판화가 현대적 미감의 구축과 현대미술로서 자기 자리를 잡는 시기이기도 했다. ● 5공 군사독재정권과의 정면승부를 벌인 문예운동으로 목판화의 전통적 양식과 기능성,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의 목판화, 1930년대 노신 목판화운동의 성과를 참조한 80년대 '민중·민족미술' 및 실존적인 인간적 형상성을 통해 동시대성을 반영한 비판적 '형상미술'은 한국현대목판화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 같은 역할을 했다. ● 전자는 오윤, 이상국, 이철수, 홍선웅, 홍성담, 김봉준, 김경주, 김준권, 류연복, 최병수 등의 민중미술계열의 작가들이다. 이들은 목판화를 전시장 미술 뿐 아니라 출판미술, 집회 및 시위 현장에서의 현장미술, 생활 공예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하며 목판화의 대사회적 기능 및 전래적인 일러스트 기능 등으로 당대 정치·사회·문화에의 구체적 참여기회를 최대한 확장시켰다. ● 이와는 달리 후자인 형상미술의 작가들은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형식과 주제를 가다듬어온 서상환, 안정민과 '목판모임 나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윤여걸, 이상호, 손기환, 김억, 정원철, 김진하, 이섭 등이었다. 작품 내에서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 폭력, 억압 등을 상징적으로 반영·고발하거나 저항하며 작품의 밀도와 형식, 어법과 표현성, 새로운 판각법 등을 중요시하며 사회 현장보다는 전시장미술을 지향한 경향이 비교적 짙었다. ● 아무튼 한국의 1980년대 민중미술/비판적 형상성의 목판화운동은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열정과 폭발력으로 독일 표현주의 목판화, 중국 노신의 목판화와 더불어 세계판화사에서 두드러졌던 판화운동 중의 하나라고 해도 결코 과하지 않은 평가라 하겠다.

김상구_No.682_우드컷_90×60cm_1998
김억_일어서는 땅 운주사_ed.12_한지에 목판화_180×90cm_2001

3. 이번 『국토와 민중』전은 이런 8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던 작가들이 주축이 되었다. 물론 서상환(1942~), 김상구(1945~), 이상국(1947~2013) 등 70년대 데뷔한 세 작가를 제외하면, 주로 80년대부터 목판화로 활동해온 작가들로, 현재 대부분 60대를 전후한 연배들이다. ● 먼저 1부에 해당하는 '국토'는 우리시대의 풍경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아름다움, 생명의 기운, 상처, 역사성, 현장성… 등을 노래하는 작가들로 구성된다. - 김상구: 유적지인 경주를 답사하면서 솎아낸 문화적 상상력과 역사적 현장성의 서정적 형상화. - 이상국: 풍경을 통한 삶에 대한 다양한 감정과 추상적 기운의 표현. - 김 억: 실제 국토의 현장을 지도와 인문지리의 개념으로 합치하면서, 그 풍경의 역사성과 거기에 내재된 민초들의 삶의 이야기를 동시에 드러내는 서정과 서사성의 합치. - 김준권: 최소한의 형상적 풍경을 통한 우리 국토의 담백하고 장쾌한 시각성의 한 전형 추출. - 류연복: 국토와 역사성에서 비롯되는 민초들의 삶의 역동성을 풍경으로 진작. - 안정민: 풍경에의 관념적/정서적 접근을 작업과정과 형식을 통해서 감성적/인식적 힘으로 전환. - 손기환: 삶의 현장에서의 삶의 현상/정서를 표현적/사실적 조형방식으로 혼합해서 엮어냄. - 정비파: 작가가 주관적으로 느낀 국토에 내재된 에너지를 거대한 스케일로 역사화 시키는 장엄미. ● 오밀조밀·여기저기·호방하게·열리거나·닫힌·사실·심안(心眼, 深眼)의 풍경을 통해서, 이들은 경관의 이면에 주름지고 접혀지고 가려져 있던 숱한 민초들의 익명적 삶의 이야기와 정서를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국토는 지난 역사와, 그 긴 시간대에 살았던 숱한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품고 있는 거대한 개별서사들의 보물창고다. 기록된 역사가 정치·경제사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승리자의 기술로 전개되었음에 비하면, 국토는 기록되지 않은 숱한 민중 개인사들의 스밈과 쌓임이 두터운 더께가 된, 그래서 발굴이 덜 된 감성과 인식의 '터'이자 그런 개인적 서사들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이는 이들 작가들의 화면이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서경(敍景)의 범주에만 머무르지 않는 이유다. 국토를 통해서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역사성을, 그 안에서의 숱한 민중들의 삶의 모습과 에너지를, 그리고 자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이 풍경들은, 우리국토와 거기에서 살았던 민중들의 삶을 반영하고(Reflection)/이야기하고(Narration)/그 기운을 표현(Expression)해 낸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목판화들은 시각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풍경을 관통함으로 그 다음에 마주칠 역사성과 인문지리적 공간의 총체인 감성적 화엄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 '민중'(2부)에 참여한 작가들은 국토에 거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 생각, 정서, 기타의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 헤친다. - 서상환 : 유·불·선·기독교·신화를 넘나드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생명성에의 구도적/샤먼적 접근. - 홍선웅 : 역사적 민중성의 토대에서 현재 민중적 삶에 대한 '풍경+민중정서'의 내러티브. - 김봉준: 조선시대 서책본 판화의 민속적 형식과 고졸한 민중적 미감의 바탕과, 당대의 정치사회적 저항성의 결합. - 윤여걸: 평범한 시민들의 도회적 삶의 일상성을 실존적인 개인의 자연주의적 시각으로 환원해서 포착. - 강경구: 정치사회적 당대의 부조리적 현실상황에 대한 억압상태와 인간에 대한 미적 고찰. - 정원철: 역사적 사실과 개별적 삶의 어긋남에 대한 휴머니즘적 접근으로서의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선. - 이윤엽: 민중성, 그리고 노동자 당파성의 힘과 희망에의 지향, 그리고 구체적 현장성의 실천. ● '민중'파트에 참가한 작가들은 오늘날 한반도에 살고 있는 나와 이웃들이 대면하는 공통된 현실과 개별적 서정성으로 2015년의 시각에서 리얼리즘적 '민중성'을 구현하고 있다. 무릇 현실이라 함은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마주한 실존적 상황으로부터, 넓게는 정치사회적 제 조건이라는 보편성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갖는다. 가장 고령인 서상환(1942~)의 인간의 내면적 관념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젊은 이윤엽(1966~)의 실천적 현장운동성에 이르는 진폭과 간극은 쉽게 사회과학적 '민중'의 범주에 묶기는 어렵다. 그러나 민중성을 조금 더 넓게 확장해서 보면, 피지배계층들의 주류 문화였던 토속성과 샤머니즘, 기타 각 개별 민중들의 세계관 내지는 심리, 정서까지도 아우를 수 있다. 이는 곧 사회과학적인 분석(객관)적 시각과, 미술의 작가(주관)적 시선이 독자성으로 연결되는 정서공간, 혹은 상징공간까지도 아우르는 것이다.

김준권_山韻 0901_수묵목판_160×400cm_2009
류연복_분단의 섬 - DMZ, 새들 돌아오다_E.d 10 + A.P 1_다색목판_60×180cm_2009

4.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의 작품은 형식과 기법적인 면에서도 다채로운 목판언어·재료·기법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절대적인 다수는 목판화의 원초적인 판각법을 중심으로 하는 작가들이다. 서상환·김상구·이상국·김억·류연복·정비파·홍선웅·정원철·김봉준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각자 독자적인 감수성의 칼 맛으로 목판에 가하는 표현의 맛을 최대한 끌어 올린다. 투박한 칼 맛으로 구축하는 관념과 서정성과 담대한 표현성이 어우러지는 서상환·김상구·이상국의 화면, 섬세하고 정교한 칼질로 역사·서사적인 내용을 담지하는 김억·정원철의 사실적인 재현성, 힘찬 선과 면으로 구축하는 도상들의 울림으로 민중적 생명성을 견인하는 류연복·손기환·정비파의 야성, 전통적인 목판화와 민화의 맛을 담백한 칼질로 길어올리는 김봉준·홍선웅 등의 민중정서 등이 그렇다. 이들의 작업은 목판화의 전래적 장점을 고스란히 수용하면서도, 각자의 체질로부터 길어내는 개성적 각법으로 현대적 미감을 충분히 펼치고 있다. ● 이에 비하면 김준권ㆍ윤여걸은 판각법과 함께 프린팅의 색다른 맛을 극대화한 경우다. 김준권은 한·중·일의 전통적 프린팅 방식을 두루 섭렵한 뒤 자신이 펼치는 형상에 맞는 수성 프린팅을 시도했다. 은은함과 함께 흑백의 번짐과 농담의 변주에 의한 미감이 돋보인다. 윤여걸은 판각의 묘미와 함께 릴리프 방식으로 한지의 물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화면의 이미지 뿐 아니라 한지라는 질료의 물질성을 통해서 시각 뿐 아니라 촉각적 지점까지 목판화의 표현과 감상의 경계를 넓혔다. 이외 안정민도 자유롭고 활발한 칼질의 표현적 판각을 실리콘으로 캐스팅 하는 프린팅 방법을 통해서 기존 목판화의 재료 영역을 일탈하고 또 모던한 뉘앙스로 그녀의 목판화를 확대시켰다. ● 마지막으로 거론할 작가들은 목판 언어를 더 적극적인 영역에서 미디어적 소통방식으로 확대하는 이윤엽과, 목판화의 장르적 경계를 타파하며 회화적 표현성을 추구하는 강경구의 제판작품이다. 이윤엽은 각 단위 작품들의 이합집산을 통한 설치방식으로 판각법이나 프린팅의 영역에 머물던 목판화를 단번에 실천적 현장미술로 전치시킨다. 이에 비하면 강경구는 프린팅하지 않는 회화적 프로세스로 목판 자체를 조립하고 입체화 하면서 나무의 물성과 작가의 표현성을 그대로 날것으로 노출한다. 회화와 판화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작업이라 하겠다. ● 그러니까 이번 전시에서 관객들은 이런 다양한 작가적 태도와 목판언어들의 변주들을 보면서 『국토와 민중』이라는 전시 소재/주제의 영역 뿐 아니라, 목판언어가 어떻게 동시대적 미감이나 감수성을 확보하는지에 대한 과정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형식과 기법들의 맛과 미감을 확인한다면 전시의 주제가 더 깊숙이 느껴질 것이다.

서상환_神語(Prayer)_목판(우드컷)_126×63cm
손기환_풍경산수_우드컷, oriental paper_30×45cm_2014

5. 현대인들의 삶은 가파르다.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이 온갖 분야에서 빠르게 질주하고, 우리들의 삶도 그 장력 하에서 빠르게 변하는데, 사실 우리는 그 속도가 주는 현상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디지털로 집약되는 21세기 벽두부터의 정보와 영상시스템의 진화속도는 가히 광속에 비할 만큼 정신이 없다. 일상도, 시각성도, 예술도 모두 그렇다. 또한 이런 디지털 문화에 기반 한 후기정보화사회 배후에서의 자본의 작동원리가 정치사회 및 문화예술에 끼치는 영향도 크다. ● 이런 문제는 미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외적 장르나, 양식, 표현의 문제뿐만 아니라, 미술의 사회적 가치, 존재 시스템, 제도적 문제, 해석학적 차원에서의 소통의 정치성 등, 미술의 토대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화두로 해서 21세기 중반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세대들은 그들만의 몸과 정서에 밀착한 또 다른 장을 요구하며 또다시 낯선 미술의 문법과 문맥을 구축해가고 있는 것이다. ● 목판화는 이런 현란한 현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진행되고 있다. 한 때 화단의 주류장르라고 해도 과하지 않았던 평가에 비하면, 수공과 노동이라는 전근대적인 목판화의 제작과정은 이런 디지털 주류 현실과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예술은 온존하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의 두뇌 뿐 아니라 사람의 근육, 사람의 피부, 사람의 노동력, 그리고 거기에서 연유하는 감성으로 말이다. 목판화는 거기에 가장 합당한 장르다. 수 백 년 전 과거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같은 제작과정을 가진 미디어지만 작가가 지향하는 세계인식이나 감성, 그리고 새로운 소통문법의 창출이 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회문화적 미디어로서의 가능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로서의 미디어자체의 신/구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작가의 작업 컨셉과 마인드와 표현역량의 문제다. 여기에 주류 현대미술과는 다르게 독립된 목판화만의 장르개념이 충분히 성립될 수 있다. ● 물론 목판화도 당연히 현대적 기법과 기술에 의한 새로운 시각언어로 진화해야 하고, 동시대적 내용을 담아야 하고, 현대적 소통회로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덧붙여 기존의 타 현대미술 장르들과는 또 다른 목판화만의 현대미술로서의 존재방식의 독자적인 행보는 반드시 필요하다. 기존 목판화의 파인아트적인 질료적 속성이나 표현과 더불어, 정보전달 매체로 그 장르적 소통 개념이 넓어졌을 때(혹은 과거의 일러스트적 소통기능의 장르성을 복원했을 때) 감각적/지각적 소통구조로의 더 넓은 확장성이 가능할 것이고, 그때 비로소 작가와 관객은 작품을 통해서 온전한 세계를 수평적으로 공유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목판화가 회화에 비해 자유롭게, 그리고 비교적 정확하게 소통될 수 있는 장점이 여기에 있다. 파인아트의 개념에 묶이지 않아도 되는 미디어적 확장성이 담보된 장르적·형식적·내용적 속성이 목판화의 열린 특성이기에 그렇다. ● 『국토와 민중』전이 동시대적 정서를 담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목판화의 동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화용론(話用論)'적인 소통구조로의 수평적 확대를 모색한 시도로, 관객들에게 느껴지고 읽혀지면 좋겠다. ■ 김진하

안정민_가로세로깊이-海印11_우드컷, 실리콘 캐스팅, 피그먼트_244×61cm_2010
윤여걸_오전 11시 37분, 종로_80×120cm_2011

2015-11-15 묵판화전에 부쳐 - 목판화의 새로운 도약과 개화를 위하여 해움미술관의 『국토와 민중』에 부쳐 ● 한국 현대 목판화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미학적이고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정치 선동성'이라는 측면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많은 화가들이 목판화 운동에 뛰어들며 전에 없는 활기를 띄었는데, 강고한 시대의 억압을 뚫고 나아가는 진보 집단의 유력한 정치사회적 표현 양식으로 전면에 떠오르며 시대의 전위로 나선다. '1980년 5월'이 기폭제가 되어 촉발한 민중미술은 민주화를 쟁취하려는 정치 운동이고, 사회의 변화와 혁신을 향한 격렬한 몸짓이며, 서양의 미의식에서 벗어나 주체 미학의 쇄신을 드러내는 원시의 숨결이었다. 동시대 회화작가들의 다수는 관념과 추상에 경사된 채 몰주체적 미학을 확대재생산했다. 반면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영향 아래에 있던 목판화 운동 작가들, 오윤과 홍성담 등 젊은 작가들은 사실주의적 소재에 주목하고 주체적 표현양식에 몰두하며 눈부신 성과를 얻었다. 오랫동안 미술품들이 개인의 기호품이자 소비 대상으로 그 협량의 유통과 수집이라는 고착에 갇혀 있었다면, 1980년대 목판화 운동의 활성화로 그 고착이 깨지면서 목판화들에서 울려퍼지는 시대적 진실과 전언을 공유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나누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 1980년대 한국 화단에 바람을 일으켰던 목판화 운동은 '근대 중국 목판화운동의 아버지'로 꼽히는 노신(1881-1936)을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 중국의 목판화 운동과 닮아있다. 노신은 케테 콜비프, 프란츠 마제렐, 블라디미르 파보르스키, 알렉세이 크라브첸코, 파벨 파블리노프의 판화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목판화 운동에 불을 지폈는데, 청년작가들의 새로운 현실사회 변혁에 대한 신념과 그 실천적 운동에 바탕을 두고 펼쳐지면서 당시 탈식민지화의 흐름에 큰 동력이 되었다. 1980년대 한국적 미감의 바탕에 목판화 고유의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메시지 전달력이 보태지면서 그 쓰임의 영역이 크게 넓어졌다. 목판화들은 시위 현장의 걸개그림으로, 책 표지로, 각종 포스터로 널리 쓰였다. 목판화의 정치적 능동성을 날것으로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오윤(1946~1986)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다. 1980년대 내가 주목했던 화가들은 손상기(1949~1988), '현실과발언' 동인들, 그리고 오윤이다. 오윤의 목판화는 민담과 설화에서 표현된 '한국적인 것' 위에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중의 '정치적 진보성'을 담보한 주제 의식을 목판 양식만의 걸출한 표현으로 압도적인 성과를 끌어낸다.

이상국_홍은동에서-II_한지에 목판화_71×174cm_2013
이윤엽_2015 일상

1980년대 사회 변혁운동의 전위로 눈길을 끌던 한국 목판화는 1990년대 포스트모던 시대를 거쳐 2000년대로 접어들어오면서 다소 정체에 빠진 듯했다. 그것은 화가들 개인의 문제이기보다는 정치적 지형 변동이나 급변하는 시대 미학의 흐름과 맞물리는 문제이기도 하다. 죽음과 마비의 시대는 지나간 듯하다. 이쯤에서 오늘의 한국 목판화는 어디쯤 와 있는가. 그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는 시의적절하다. 분명한 것은 오늘의 목판화는 그 어느 시대에도 볼 수 없던 새 백화제방의 시대를 예감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가들의 작업에만 국한해서 보아도 그 점은 두드러진다. 여기 한 자리에 모인 중견, 중진 작가들의 작품을 일별해 보면 한국 목판화가 그 기법과 소재의 다양성에서 인상적인 성과를 드러냄과 더불어 역사성의 집요한 증언과 그 의미 탐색에서 일상의 무의식과 그 미의식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깊어지며 넓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기법의 층위에서 세 가지로 나눠 볼 수가 있다. 첫째, 목판화의 정통 판각법을 견고하게 잇는 작가들 ― 서상환·이상국·김억·류연복·이윤엽·정비파·홍선웅·손기환·정찬민·김봉준,― 둘째, 프린팅의 변주를 통해 판화의 표현 가능성을 찾는 작가들 ― 수성목판화(김준권)·한지릴리프(윤여걸), 셋째, 재료 실험 및 설치에서 낡음을 깨고 새로움을 끌어내려는 작가들 ― 프린팅(정원철)·실리콘 프린팅(안정민). 투박하게 보자면, 소재의 층위에서도 두 계열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 땅의 생명력과 그 역사성을 찾아내려는 국토 계열 ― 김상구·이상국·김 억·김준권·류연복·안정민·손기환·정비파·홍선웅을 들 수 있다면, 둘째, 삶과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과 그들이 걸어온 흔적을 복원하려는 민중 계열 ― 서상환·윤여걸·정원철·이윤엽·강경구·김봉준·정찬민을 들 수가 있다. 이들 중견, 중진 화가들의 작품들이 기법과 소재의 맥락에서 한 계열로 묶이면서도 개별 작가들은 '차이'를 드러낸다. 인간의 기본적인 정념과 정서들에 반향하는 그 '차이'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미적 변별성을 얻고 표현의 동시적 교향(交響)을 이룬다.

정비파_지리산 천왕봉_한지에 다색목판화_140×310cm_2015
정원철_Portrait in Gray-2_라이노컷_108×79cm_2001
홍선웅_평도 포격_목판다색_75×120cm_2012

'국토'와 '민중'이라는 전시 테마로 동시대 삶의 복잡성을 다 포획하고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오늘의 세계는 복잡성의 과잉으로 넘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술은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개별자의 일상을 지배하고, '파종성 영장류 질환'은 지구를 뒤덮고 있다. 그에 반해 '진보' 이념은 순진하고 시대의 '진실'은 쪼갤 수 없을만큼 무겁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국토'와 '민중'이라는 주제를 매우 진지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저마다 득의의 표현 양식을 선 보이고 있다. 다양성의 혼종 속에서 보다 진화된 의식과 목판화의 소슬한 가능성으로 직격하는 발군의 작가들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고 즐거움이었다. 강경구의「새벽이 오기 전」은 수직의 굵은 선에 의해 분할된 한국적 얼굴은 오윤 이래 하나의 정형을 얻은 목판의 거칢과 거침없음을 만끽할 수 있다. 힘과 단순성의 파열이라는 점에서 목판이 가진 장엄함이 잘 드러난다. 정비파의 평지돌출하는 산들의 잇대임에서 국토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미학적으로 표현한「천왕봉」도 인상적이다. 국토에 서린 힘과 신령함이 영혼의 쇄신을 자극하는 우레와 같은 울림으로 전두엽에 꽂히게 만드는 바가 있다. 이밖에도 이미 중견 작가의 반열에 들어선 김억의 인문지리학적인 국토의 디테일한 해석, 류연복의 역사를 새로운 상징으로 포획하려는 작업들, 김상구의 고도 경주의 미학적 재해석, 이상국의 대상의 해체와 재구축 작업, 손기환의 대담한 해석과 생략으로 제주, 통영 풍경의 표현주의적 재해석 들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 장석주

Vol.20151130c | 국토와 민중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