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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1124_화요일_05:00pm
프로젝트 기간 / 2015년 3월~11월
후원 / 경기문화재단_수원시미술전시관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수원시미술전시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Ⅱ SUWON ART CENTER_PROJECT SPACE Ⅱ 경기 수원시 장안구 송정로 19(송죽동 417–24번지) 2층 Tel. +82.31.243.3647 www.suwonartcenter.org
'근육의 생각'이라는 제목의 프로젝트는 아시아인의 삶의 방식을 보존하고 기억해온, 또 이를 통하여 문화적 상상력을 수행한 아시아인의 몸(근육)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이다. 또한 몸에 기록된 역사에 대한 추적이기도 하다. 김월식 작가는 "우리의 신체는 다양한 문화적인 몸들을 전수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전수된 '몸의 형식'에 맞춰 우리의 몸을 변형시킨다."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작가는 험난한 히말라야의 삶과 지금 막 근대화의 과정에서 혼란스러운 사회적 몸살을 앓고 있는 네팔인들의 몸에 보존되고 있는 삶의 상상력, 문화적 상상력과 동시대 대한민국의 로컬의 삶의 근육에 숨어있는 '근육의 생각'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그 예술적 잠재태와 가능태에 대한 실타래를 풀어가고 있다. ■ 수원미술전시관
프롤로그 (prologue) ● 그 시작은 이렇다. 네팔을 마주하고부터 계속 들어왔던 생각이다. 3억이 넘는 힌두의 신을 모시는 네팔인들이 신을 숭배하는 방법은 그들이 숭배하는 신만큼 다양하지만 우리가 인지하는 네팔과 히말라야의 문화는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인식하는 방법과 닮아있다. 측량 개념의 수직적 접근은 인과관계에 의존한 일방적인 이해, 전달, 수용만을 허락한다. 유라시아 대륙의 중부와 동부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의 대륙, 중앙-동남-서남-극동으로 구분되어지는 문화-지리적 다양성은 서구의 측량기준에 의존해 수직적 개념으로만 이해, 소비되어왔다. 수직적 시각은 효율적이나 딱딱하다. 그것은 상호네트워크를 허락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려다보기를 바라며 항상 인과관계를 찾는다. 반면 수평적 시각에서는 내려다보기 또는 올려다보기가 불가능하다. 수평적 측량에서는 뚜렷한 인과관계를 찾기 어렵다. ● 같은 높이를 곡선으로 연결하여 산을 평면적으로 재해석한 등고선(contour line, 수평곡선水平曲線)은 히말라야 지역의 사람들이 산을 대하는 태도와 닮아있다. 그들은 산을 오르지 않는다. 산과 수평으로 마주하고 촘촘한 삶과 문화의 간격을 긋는다. ● 동시대 아시아를 관통하고 있는 히말라야-네팔도 수평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길거리 기둥, 지저분한 길 모퉁이마다 현현顯現하는 혼성混成화된 신의 도상에서 과연 합리적 인과관계를 찾을 수 있겠는가. ● 네팔의 성스러운 신들은 하늘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길바닥에, 부엌 아궁이에, 낡아빠진 문 위에서 느닷없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이 모시는 신들의 모습처럼 이곳의 문화도 상하적 인과관계로는 이해할 수 없다. 험난한 히말라야를 살아내는, 히말라야를 다루는 기술은 과학적, 합리적 인과관계가 아닌 바로 그들의 삶 속에 있다. 히말라야 인들은 산을 오르지 않는다. 삶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2014년 아시아 문화 창조원 네팔 리서치 보고서 중) ■ 김은기
근육의 생각 ● 근육의 생각은 아시아인의 삶의 방식을 보존하고 기억해온, 또 이를 통하여 문화적 상상력을 수행한 아시아인의 몸(근육)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이다. 몸의 테크닉에 대하여 기술했던 마르셀 모스의 말의 빌어 표현하자면 각 사회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몸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방식들"을 '몸의 테크닉'이라고 표현한다. 모스에 의하면, '몸의 테크닉'은 우리가 아직 개념화하지 못한 미지의 것이며 학문의 변방에 위치한 '잡동사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몸의 테크닉'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나는, 예컨대 걷기나 수영 그리고 동일한 유형의 모든 종류의 것들이 정해진 사회들에 특유하다는 것을, 히말라야인들은 우리처럼 걷지 않는다는 것을, 나의 세대가 현재 세대처럼 걷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마르셀 모스는 예전에는 관찰되지 않던 문화의 '세부deta'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근육의생각은 " 또한 몸에 기록된 역사에 대한 추적이기도 하다. "누군가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는 것은 그를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문화는 역사적으로 전승되고 축적된 다양한 춤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정한 춤을 추게 하는 것은 '전승된 몸'을 개별적인 몸 안에 각인해 넣음으로써 그 몸을 지배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다양한 문화적인 몸들을 전수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전수된 '몸의 형식'에 맞춰 우리의 몸을 변형시킨다. 춤은 사회가 개인의 몸을 소유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러므로 같은 춤을 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몸은 서로 닮아간다. 춤은 그렇게 '몸에서 몸으로 이루어지는 침묵하는 실천적 커뮤니케이션'이다. 문화적인 몸을 개인적인 몸에 이식하는 춤은 '몸의 역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장르이다.
근육의생각은 근대적(서구적)과학담론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었던 비언어적인 아시아인들의 몸의 훈육에 대한 접근이기도 하다. "몸이 보편적인 것이고 모든 이의 수중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이라는 도구의 매우 많은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무지하기만 하다. 우리는 단지 특정 문화의 필요조건 안에서, 항상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몸의 가능성들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이다."이러한 선언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몸의 가능성이 얼마나 협착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몸의 가능성이 얼마나 적은지, 우리의 문화적인 몸이 얼마나 많이 상실되었는지, 우리가 얼마나 낯설고 이국적인 몸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또한 몸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이해가 있다. 그런 이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몸의 이해'이며, 현재 우리의 지적인 의식이 가장 놓치기 쉬운 이해의 방식이다. 이러한 '몸의 이해'는 우리에게는 낯선 믿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몸의 훈육이란 정신이 '아니오'라고 말할 때조차도 몸은 '예'라고 하며 받아들이는 그런 종류의 믿음을 만들어낸다.
근육의 생각은 단언컨대 서구적으로 표준화 되어 버리고 있는 아시아의 감각에 대한 불편한 고민이다. 근대적인 과학 담론은 대개 몸의 감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체 감각을 통해 인지한 경험주의적 사실이 지식과 믿음의 확실한 기반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식의 척도인 몸의 감각이란 결코 선험적이며 불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몸의 감각은 역사와 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굴절되며 생성하고 소멸한다. 요컨대 몸의 감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민족과 역사에 따라 몸의 감각 능력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 우리의 세계에서처럼 시각이 다른 감각을 압도하는 '시각 과잉'의 문화도 있고, 시각보다는 청각이 지배적인 문화도 있다. 따라서 감각의 위계와 감각의 우위 또한 문화와 역사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감각의 해부학을 통해 감각을 표준화하고 이를 통해 모든 인간의 공통감각을 가정하는 것은 근대가 만들어낸 '감각의 신화'일 뿐이다. 감각의 문제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감각의 표준화'는 항상 그에 상응하는 '의식의 표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 근육의 생각은 험난한 히말라야의 삶과 지금 막 근대화의 과정에서 혼란스러운 사회적 몸살을 앓고 있는 네팔인들의 몸에 보존되고 있는 삶의 상상력과 문화적 상상력, 또 동시대 대한민국의 로컬의 삶의 근육에 숨어있는 '근육의 생각'에 대한 연구, 그 예술적 잠재태와 가능태에 대한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이는 '나카자와 신이치'의 말대로 '대칭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써의 몸을 활성화 ( 감각의 통로를 열어 근육에서 지시하고 상상하는 방법 )시키고 로컬을 기억하는 문화적 몸을 통하여 아시아의 숨어있었던 감각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근육의 생각은 어떤 계획에 의해 준비되는 공정이 아니고, 손 주변에 있는 구체적 물건을 가지고 하는 일이기도 하다. 도표를 그리거나 계획을 세우고 시도하는 현대적 메커니즘과는 달리 이미지(영상)와 같이 감각적으로 나타난 구체적인 존재와 연결시키고 '개념적 지시'를 통해 감각적 직관을 믿고 따르며 동시대적 삶속에도 잔존해 있는 야생의 사고를 회복하는 작업이다. 말하자면 대장장이가 망치질을 통하여 쇠를 두드릴 때, 쇠를 두드려야 하는 때를 아무리 언어로 설명하려 해도 할 수 없다는 그 이야기이다. 그건 '감각의 논리'이며 '구체적인 상황'에 의해 좌우되는 기술이다. 또는 나무를 만지는 대목장이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목장 장인은 나무를 볼 때, "이건 대들보감, 저건 서까레감" 등 구체적인 대상(사물)과 연결하여 인식한다. 나무의 앞뒤를 '등과 배'라고 하듯이 나무의 부분을 설명할 때도 인간의 몸과 대비하는 '유비적 사고'를 드러낸다. 유비적 사고는 야생인 인지방식의 한 특징이다. 다시 우리 삶의 영역으로 돌아와서 '김장하기'에서도 비슷한 예가 있다. 전통적으로 김치를 담글 때 우리 어머니들은 그 흔한 메모도 하나 없이, 일면 보기에 전혀 체계적인 계획도 없이 그 복잡한 과정으로 얽혀있는 '김장하기'를 시작한다. 혹 누군가 주변에서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어느 정도 준비하고 일을 했냐고 물으면 잘 기억도 못한다. 계량적인 인식도 부족하다. 배추 숨을 죽일 때, 소금을 어느 정도 치느냐고 물으면, 그냥 어림대중으로 '이 만큼'이라고 대답한다. 적당히 배추가 숨이 죽은 정도를 판단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복잡한 과정을 다 잘 치르고 맛있는 김장김치를 담근다는 것이다. 김장하는 과정을 잘 관찰하면 어머니들은 그때그때 필요한 게 보일 때마다, 또는 생각날 때마다 즉각 움직여서 처리한다. 이런 행동이 구체적인 존재와 연결시키는 '개념적 지시'이고 현장에서 드러나는 '구체의 과학'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종교와 스포츠','앎과 삶이 하나인 몸', '몸의 연금술', 2007, ㈜살림출판사 에 인용된 글들에 작가의 생각을 더해서 쓴 글입니다.)
감각(감성)의 활성화를 위한 몸각(근육)의 사용 ● 일본의 대표 철학자이자 인문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의는 그의 저서 '예술인류학'에서 신화와 신화적 사고의 의미를 일반적 논리에는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비틀림'을 가진 특유의 논리로 이야기 한다. 이는 무시간적이며 모든 것을 명확히 분리하지 않는 '대칭성의 논리'와 , 모든 것을 이야기의 질서에 따라 배열하여 말할 수 있는 논리력의 결합체가 곧 신화라고 이야기 하는데 원초적 야생이 살아 있는 감성적 영역으로써의 '대칭성의 논리'와 합리적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비대칭성 논리'를 대등한 입장에서 바라보며 이 상반된 입장이 균형 감 있게 조화를 이루는 중요성으로 동시대의 역할을 주문한다. 근육의 생각은 실제로 산업화 이 후 과학 문명이 고도로 성장 발전을 이룬 현대인들의 두뇌 구조에서 상대적으로 그 효용성과 가치가 절하된 '우뇌'의 기능회복과 그 잠재적 가치의 부활에 대한 주문인 동시에 시각 중심적이며 이성 중심적인 상식의 관성에 대한 경계의 의미로 풀이 할 수 있다. 때문에 신화가 갖고 있는 '비틀림'의 논리는 결국 동시대 예술계에서 감각의 회복, 감각의 번역, 새로운 프레임의 감각 공학적 실험으로 확장되며 , 전통적인 제의와 기복적 감성의 떨림에서부터 새로운 매체를 직관적으로 해석하며 그 기능을 해체하고, 불확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영토를 개척하는 탐험가의 심정으로 감각의 스펙트럼을 개간한다. 그런데 이 감각의 스펙트럼은 이성의 바깥에서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영역을 투과해서 존재하기도 하며 스며들어 있기도 하고 입체적으로 병치되어 있기도 하여서 좀처럼 그 범주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이른바 감각의 장치들이 개입되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현되며 의도적으로 이성을 놓아 버리는 경우도 발행하고 추적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감각의 함정과 덫을 놓기도 하며, 작업의 수행과정에서 부조리함과 결합하여 감각의 길을 잃게도 만들고, 타임머신처럼 시 공간을 분절시켜 이성적 해석과 접근이 불가능한 초현실적 경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많은 작가들이 감각을 번역하는데 있어 근육을 활용하는 것은 이제 동시대 개별적 상상력,자율적 창의성을 만드는 과정의 중요한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1981년 노벨 생리, 의학상 수상자인 인지과학의 대부 로저 스페리(R. Sperry)는 좌뇌 와 우뇌의 기능분화설과 그 상호작용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감성을 활성화하기 위한 신호로써 신체를 활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역설한다. 우리 몸의 다양한 감각 중 시각은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관성으로 대상을 구분하기 때문에 바람과 같이 다른 감각에 의존하여 관찰해야 할 대상을 표현할 경우 매우 정보적이며 기호적인 수준의 패턴화된 감상의 결과를 도출하기 쉽다. 결국 감각을 활용하여 개별적이고 창의적 작업을 한다는 것은 시각 중심의 보는 방법을 확장하여 다른 감각과 연동하여 입체적으로 관찰하고 사고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각적 관찰방식에 익숙하고 이성적 판단으로 사고하는 시스템으로 조직화 되어있는 현대인들에게 오감을 통한, 때로는 육감의 영역까지 총체적으로 활용하여 관찰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각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있던 감각들은 시각이 구축해 놓은 이성적 관성에 늘 방어적이며 소극적인데, 결국 이 방어기제에 익숙한 감각들을 본래 야성의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로 부활시키는데 있어서 신체(몸)의 자극을 통하여 본능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방식은 주요해 보인다. 몸을 자극하고 신체의 움직임을 열어서 감성을 흔들며 순간적 판단력들이 작업에 감각적으로 작동할 때 접신 상태에서 영혼을 만나는 샤먼처럼 비로소 작업은 신화와의 경계점을 넘어서는 판타지가 된다. ■ 김월식
Vol.20151126h | 김월식展 / KIMWOLSIK / 金月植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