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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1125_수요일_05:00pm
후원 / 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월요일_12:00pm~06:00pm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37(팔판동 115-52번지) B1 Tel. +82.2.737.4678 www.gallerydos.com
외상과 독백으로써의 자기 은유를 넘다 ● 1. 참다운 내 것에 조타를 맞추고,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일수록 해주는 일 속에서의 행복'을 위해 볼테르(Voltaire)는 "인간은 자신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고 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손꼽히는 프레데릭 르누아르(Frédéric Lenoir) 역시 '행복이란 그 자체로서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이 그처럼 예측 가능하게 계몽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을 철학하다(Happiness: A Philosopher's Guide)』(2014)에서 르누아르는 우화 속 노인과 마찬가지로 행복은 결국 우리 안에 있다고 이야기하나,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사란 오히려 상처와 번민, 쓸쓸함과 고통의 나날이 눈부신 트라우마로 남아 지속되기/ 되어 왔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자신을 진정으로 소유하고 잠재적인 존재를 드러내며, 상처 따윈 전혀 없이 더 실제적인 인간으로써의 행복을 이룬다는 건 매초, 매시 부딪히며 살아가는 인간에겐 이상화한 샤르데냐(Sardegna)의 단지에 불과할 뿐이다. 어쩌면 그건 '즐겁다', '기쁘다'와 같은 형용사를 주술처럼 읊조리는 공허함이며, 짧지만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인공자연을 구축하는 일과 진배없다. 혹은 여신 베누스(Venus)가 곡물의 신 아도니스(Adonis)에게 반하여 그를 납치한 후 한순간에 지고 말 꽃으로 바꾸어 놓은 '아도니스의 정원'에 잠시 목말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실체적 삶과 큰 관련 없는 하나의 텅 빈 광주리 혹은 항아리일 수도 있고.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작가 김유정의 '정원'은 사람의, 현대인들의, 규격화된 일상을 관상식물로 치환해 욕망하는 식물로 '재번역'한 결과이다. 평면화 된 자연물을 배경으로 여러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그림자처럼 등장하는 작품 「Paradox」에서도 언뜻 읽을 수 있듯, 그것은 획일화된 일상이 강요되는 현대인들의 씁쓸함을, 그들이 가두어 놓은 관상식물을 통해 반증하는 것이며 "공산품처럼 규격화된 우리들의 삶과 고민을 자연적인 물질로 승화시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즉, 삶에 관한 작가적 의식과 소고(小考), 일종의 회화적 랜더링(rendering)이 바로 김유정의 '정원' 시리즈인 것이다. ● 삶에 관한 작가적 의식과 소고(小考). 그렇다면 김유정이 지정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삶'이라는 단어자체는 낯설지 않다. 많은 작가들이 삶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그러나 친숙함이 곧 명쾌한 해답과 근친하는 건 아니며, 이성에 의한 해석이 실체의 파악을 도모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삶이란 모호함, 그 자체일 수 있으며 혹은 매일 자신의 묘비명과 자서전을 써 내려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혹은 플라톤(Platon)의 주장처럼 무언가를 얻기 위해 잃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우린 삶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아니, 늘 그 유무형의 무게에 억눌린 채 탈주와 속박을 오간다는 사실이다. ● 흥미롭게도 김유정의 정원은 그 '삶'의 중앙을 관통한다. 세월의 텃밭에서 자란 인연과 관계망을 통해 자신의 삶을 헤아리고, 회벽에 날카롭게 그리드 된 철필의 흔적처럼 나와 관계된 일상의 얼룩들을 독자적 표상(생존조건)으로 재구성한다. 실제로도 작가는 삶이라는 단어 아래 나와 부대끼는 타인들과 사물들을 공유하며, 그 미세한 떨림을 전신적인 욕망과 수없는 물음을 그림이라는 매제로 여민다. 특히 삶의 다양성 가운데 자신을 중심으로 한 내용들을 다이어리마냥 펼쳐놓곤, 그것을 근간으로 관계를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오늘의 우리를 소환한다. 따라서 김유정의 정원 연작은 '일상을 텃밭으로 자라는 상처와 치유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2. 김유정의 작품에는 일상의 단면과 감정, 기억과 회한들이 교차되어 있다. 인간사회에서 느끼는 내면적병과 외상, 아픔과 슬픔이 녹아 있는 반면 희망과 절망, 실존과 허상 등이 이입되어 있다. 최근 설치와 사진작업을 병행한 와이어 드로잉 「Floating」(2014), 「Alternative plant-love」(2015)와 같은 작업에선 사랑과 꿈과 같은 명사들이 여타 그림 속 빼곡하게 자리한 식물들의 잎사귀처럼 촘촘히 새겨놓고 있다.1) ● 물론 그건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소탈하게 적시한 것이지만 어떤 알 수 없는 희원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낱낱의 상징들(사회적 관계성을 띤 구성원으로써의 식물-박제화된 온실 혹은 건축물-그 내부에 똬리를 튼 채 살아가는 세상 등)의 이 현재의 투영-존재성의 기록임은 변하지 않는다.(2015년 작 「Gray Garden」과 「Framework」를 동시에 교합한 느낌으로 보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무채색 위주의 회벽에 뾰족한 도구로 날카롭게 또는 투박하게 긁어낸 흔적들이 하나의 생채기와 갈음되는 것 마냥, 그의 작품의 출발점은 우리네 삶 이면에 놓인 신산(辛酸)의 기표로서 작동한다.
김유정의 작가노트를 보면 위와 같은 해석을 뒷받침 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그는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 우리는 자의 및 타의 아래 다양한 상황과 시도에 처해지는데, 생채기는 우리의 내면과 삶의 현장을 넘나들며 종전보다 바쁘게 활동한다."고 적고 있다. 이는 그가 어째서 굳이 '긁음'과 '훑음', '할큄'을 중요한 표현행위로 삼고 있는지 알려준다. 다시 말해, 그가 긁고 훑고 할퀴는 것은 상처받고 살아가는 우리네 초상의 짙은 배어듦(내적 상처들의 가시화)이면서 치유를 기원하는 작가의 의중, 중용(中庸)의 태도가 내포된 결과2)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때문에 식물이 잘 가꾸어진 관형(觀形)의 정원은 바로 치유의 공간이자, 안락함을 선물하는 식생의 무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흔적(trace)'이라는 개념이 이입 가능한 장소이면서 한편으론 허무하고 불편함이 노출된 외계의 시공으로 번역된다. 김유정이 "인공적이나 끊임없이 알맞은 조건을 만들어 가는 따뜻한 정원을 발견해 잠시나마 안정을 취하고 재생하기도 한다." 면서도 "부조리하되, 진실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모순을 목격, 침묵하면서 삶의 그늘에 지친 영혼을 잠시 맡겨두는 곳"으로 설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김유정의 작업은 스스로에게 솔직하되 심각하거나 자극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진정한 가치를 열람케 하는 매력이 있다.3)
규명하고 행동하지만 고정시키지는 않으며, 잊고 지내는 일상에서 실존을 불러들이고 성찰을 '개간'하는 특징을 함유한다. 특히 우리네 삶에 부유하는 다양한 것들에 대한 회고를 오늘에 반추해 새로운 의제를 도출시킴으로써 작가적 가치관을 명료화 한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더구나 묘사 위주의 겉과는 달리 그 내부엔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방식에 대한 여러 유의미한 지점을 열거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눈에 띄는 부분이다. ●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현실에 존재하고 서로 관련하면서 작용하는 개개의 존재(각각의 식물들과 사물들, 어둠과 밝음-덮음과 비워냄의 이중성으로써의 존재)를 정원으로 묶어 언급하는 동시에 '나는 이미 만인에 관여 되어 있으며' 현재의 내가 전체의 나일 수도 있음을 기술하는 전개를 밟는다. 또한 인간 존재와 인간적 현실의 의미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우리는 곧 가능존재라기 보단 보편적 실현존재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 표상은 언제나 종적의 이탈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구조 내에선 자유로움으로 도출된다. 작가는 그곳에 느낌과 감성, 일정한 스토리를 내재시키며, 작거나 큰 화면에 둔탁하고 곱지 않은 결을 험하게, 허나 따뜻한 저의와 공통의 가치 아래 표상화한다.
3. 둔탁하고 곱지 않은 결을 험하게, 허나 따뜻한 저의와 공통의 가치 아래에서의 표상화4) 는 김유정 만의 독특한 기법인 프레스코(fresco)로 구현된다. 그는 이 기법의 어원처럼 '신선하게' 다루는데, 채 마르지도 않은 회벽에 주어진 시간 내 사물을 묘사하고 재현하기 위해 채색 대신 긁기를 선택한다. 이는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외부로부터의 손상과 상실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5) ● 옛 기법을 오늘에 재현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귀납하기 위한 장치이며(물론 작가적 변별력을 부여하는 기능도 없진 않다), 전통성의 현대적 번안이다. 그의 말마따나 한편으론 "긁기를 통한 관상식물, 인공적인 풍경들의 재현은 빛과 생명력을 얻어 곧 우리의 인생"을 나타낸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생존조건'에 필요한 요소들을 배척하지 않은 채 공유와 공감-회생의 틈을 거듭 드러내 보인다. 즉, 피해갈 수 없는 경쟁과 복잡한 세상에 유기체로 살아가는 나와 우리네 삶의 아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지만, 세상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나아가기 위해, 상처받은 이들이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안락한 정원-상실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 역시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2015년 작품 「공생」에서도 잘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그의 그림에서 중요한 건, 김유정의 정원 시리즈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미메시스적 욕구와 가깝다는 것이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개념을 빌어 이해하자면 그의 정원은 여러 측면에서 삶의 본질을 모방(mimesis)하는 것과 좁은 거리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정원은 보편적-사실적 정원이 아니라,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말처럼 인생의 사막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평화롭고 아늑한 시공을 개방해놓은 확장의 정원이라는 것에 방점이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그의 근작들은 더 이상 '외상'에 대한 차가운 직시, '독백적인 자기-그리기로서의 은유'는 아닌 셈이다. ■ 홍경한
* 주석 1) 작품 「Paradox」와 「Gray Garden」에서 엿보이는, 흐트러지듯 질서를 지닌 그 하나하나의 장면들은 흡사 누구에겐 지독하기만 한 삶을, 누구에겐 살며 살아가는 짧고도 긴 여정 속에서 인간이 겪어야할 복잡함이 비춰지고, 「Incubator」 시리즈에서는 사건에 관한 편리(片利)와 내적 욕망 등이 얽히고설킨 미완의 거푸집처럼 다가온다. 2) 덧붙이자면 적어도 이 지점에서 이젠 외상과 마주친 주체의 발언-자기 독백적인 은유의 단계는 넘어 서고 있다. 고통과 절망에 관한 해결책을 묻지는 않는다. 단지 타자 측의 목소리를 염두에 두고, 사유할 수 있는 거리감을 제공하는 계단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3) 자주 강조하는 것이지만, 사실 삶의 투영이 진실하게 반영되지 않은 작품이란 미를 가장한 시각적 쾌락, 혹은 고통을 전달하는 가식적이거나 불편한 매개로 남겨질 가능성이 크다. 사유를 담아내지 못하는 예술이란 껍데기의 재현이요, 편애된 성공일 확률이 높다. 예술 표현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이 어떤 프로세스를 거치든 예술가의 경험과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한 자아의식이 드러나야 한다는 점이며, 예술적 실현의지가 미적 철학과 미의식 아래 이입되어 존재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궁금해 하는 좋은 작품이란 그런 범주에 들어맞는 것들이다. 4) 인간사의 식물에의 대입, 자연의 인위적 이식과 전유, 감정의 내면성의 발화 및 확장 등등 5) 그래서 이 기법은 시간의 궤를 돌아 많은 것들을 들여다보도록 하고, 각기 다른 자신들의 삶을 대입-비교-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감정질량의 문제마저 지정한다.
나는 프레스코회화를 통해 전통 미술과 동시대 미술 관계를 반영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회벽에 행해지는 대상을 재현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회벽이 마르기전에 채색하는 것 대신에 "긁기의 외상적 행위", 즉 스크래치를 가하는 작업을 택하고 있다. 이는 대상을 보다 상세하고 굳게 각인시키기 위함이며, 표면에 가하는 상처의 기법이 채색보다 대상의 본연의 모습(사유를 근간으로 한)을 잘 구현해 줄 것이라는 나의 방법론이다. 이는 전통적인 것을 현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며, 스크래치로 인해 드러나는 미세한 요철들의 생성들은 치유를 갈망하는 상처받은 현대인들의 삶을 표현하는 기법적 은유이자 현대인들의 삶 그 자체이다. ● 획일화된 일상이 강요되는 현대인들의 씁쓸함을 그들이 가두어 놓은 관상식물을 통해 반증하려는 것이며, 공산품처럼 규격화된 우리들의 삶과 고민을 자연적인 물질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긁기를 통한 관상식물, 인공적인 풍경들의 재현은 빛과 생명력을 얻어 곧 우리의 인생을 재현해 낸다. 그리고 인간들의 상실된 내면을 시각을 정화시키는 예술로 표현하여 공감대를 형성하는 한편, 한줄기 위로로 다가간다. 우리에게 재생산된 관상식물들의 어울림, 치유의 정원을 선사하는 것이다.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과 산소, 공기 등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지금 속해있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조건에 처해져 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이번 전시에서 나는 우리의 현 모습을 담아낸다. 회벽에 긁어대는 생채기는 현재 우리 삶의 기본적인 상처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 우리는 자의와 타의로 다양한 상황과 시도에 처해지는데, 생채기는 우리의 내면과 삶의 현장을 넘나들며 종전보다 바쁘게 활동한다. 지난 상처를 기억하며 공간위에 힘없이 수동적으로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무수한 관계 맺기에서 때로는 버려지기도 하고 수면 아래에 갇히기도 한다. ● 부조리하되, 진실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모순을 목격, 침묵하면서 삶의 그늘에 지친 영혼을 잠시 맡겨둔다. 이내 회복한 듯 다른 세계와의 교류를 시도하고, 공유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인공적이나 끊임없이 알맞은 조건을 만들어 가는 따뜻한 정원을 발견해서 잠시나마 안정을 취하고 재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과정들은 너무나 필수적인 우리 삶의 생존 조건들이다. 이 때 생채기는 고단함과 상처로 부터 단단해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내고 있는 우리 본연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기법으로 다시 한번 자리매김한다. ■ 김유정
Vol.20151125f | 김유정展 / KIMYUJUNG / 金維政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