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5_1121_토요일_03:00pm
2015창작문화공간여인숙 레지던시 입주작가 결과보고展
오프닝 토크 / 「군산의 시간」- 전시작가 작품 발표 및 질의질문
주최,주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전라북도_문화공동체 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군산 창작 문화공간 여인숙 Gunsan creative cultural space yeoinsug 전북 군산시 동국사길 3(월명동 19-13번지) Tel. +82.63.471.1993 cafe.naver.com/gambathhouse
정초롱 작가의 개인전 『네 개의 섬』은 섬을 은유로 하여 흩어져있는 네 개의 공간을 친밀한 의미들로 연결하고 있다. '섬(isle)'의 어원이 '고립되다(isolate)'이듯이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은 도달하기에는 쉽지않은 곳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떠나온 곳으로부터의 단절을 통하여 이전의 세계와는 격리된 채로 나를 고스란히 수용하는 장소이자 어떠한 해방을 주는 곳이 된다. ● 타인에 의해 해갈될 수 없는 외로움을 거짓말로 포장하는 '거짓의 섬', 개인들이 잃어버린 것의 상징들이 유실물 보관소와 같은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는 '상실의 섬', 스티커를 무작위로 조합한 과잉된 이미지들이 벽을 가득 채운 '성형의 섬', 그리고 돌무덤과 고요한 풍경이 있는 '기도하는 자들의 섬' 등과 같은 네 개의 섬들은 서로의 은밀한 비밀들을 공유한 채로 서로가 연결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 위의 섬이 늘 그러하듯이 이번 전시에서 각각의 섬에는 다른 섬들과 쉽게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 ● 모든 관계는 타동사적이라고 말하는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말처럼 우리는 결코 타인이 될 수 없다. 그에 의하면 '함께'라는 전치사를 지닌 모든 관계 안에서도 고독은 진부하리만큼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영원이란 결코 시간성을 상실한 단어가 아니듯이 도처에 존재하는 사물들마저도 우리 자신의 존재와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시각적인 것이든 혹은 언어이든지 간에, 어떠한 감각을 통하여 자신의 내밀한 것을 타인에게 전달할 때에는 -심지어 그것이 사물들을 향할 때 조차에도- 그것은 온전한 형태로서 타인 (사물)에게 닿을 수 없으며, 역으로 타인의 이야기들 앞에서 우리는 그저 짐작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 이렇듯 비사실적인 것들의 해독과 현혹들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과연 진실이란 전달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진실의 반댓말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의도한 것이든 혹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간에 얼마간의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신념', '확신', '사실' 과 같은 여러 얼굴들을 지닌 것 처럼 거짓 또한 '농담', '오해', '공상', '상상' 등 수많은 다른 얼굴들을 지니고 있다. 또한 라틴어에서도 진실(veritas)의 반대말은 거짓(falsum)이 아닌 망각(oblivion)이며 나아가 진리(alētheia)란 망각되지 않는 것일 뿐인 것 처럼 우리 나름은 세계 안에서 진실과 거짓 사이를 유보하는 간격을 이미 가지고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하여 이러한 '온전히 전달될 수 없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거짓의 섬'에서는 녹색의 플라스틱 팔레트와 우유 상자 더미 위에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데, 무엇보다 작가는 '전시'라는 하나의 인위적인 가공으로부터 탈주하고자 작품을 전시장의 흰 벽에 걸지 않고 오브젝트들 위에 전시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인 감추기 혹은 억제하기(in-hibit)의 공간은 관람객이 전시장의 문턱을 지나오는 순간 이미 해체된다. 전시장이라는 어쩔수 없는 드러나기(ex-hibit)의 문제는 이미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그로인해 작가의 의도는 그대로 해석되지 않은 채 다시금 하나의 설치 작품으로써 오인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섬의 「괜찮아요」 와 「동정은 필요없져」, 그리고 「전형적인 예술가」와 같은 작품들은 상충하는 이미지와 텍스트, 다시 말해 고독과 외로움을 홀로 견디고자 하는 작품 속 이미지들과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이미지에 반대되는 텍스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의 방어기제로써 익숙한 작품 속 제스춰들을 통하여 우리는 작가의 작품 속 내밀한 이야기들을 어쩌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여러 망들로 인하여 그 너머에 있는 작가의 이야기와 의도하였던 것들은 쉽게 전달되지 못한 채 공간에 침잠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거짓의 섬'이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공간이었다면, '상실의 섬'은 사물, 그리고 비-인간과의 관계에 관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일종의 설문지를 통해 문자의 형태로 전달받은 유실물들을 다시 회화 작품으로 바꾸어 진열장에 전시하였다. 그것은 사물이기도 하지만 어떠한 것들은 개인의 추억 혹은 시간(젊음)과 같은 관념적인 것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문자(character)로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실제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어떠한 상징으로써 전시된다. 이 곳은 소중하게 간직해 온 것에 관한 상실감들이 유배되어 있는 장소이자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텅 빈 것으로 가득한 기억의 장소가 된다. 이 작품은 더 오랜 기간의 수집을 통하여 확장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작가에게는 유랑하는 수많은 상징들을 어떻게 가두는 지에 관한 숙제가 남아있다. ● '성형의 섬'에서 작가는 관객 참여적인 작품을 통하여 타인과의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투명한 비닐에 스티커들을 무작위로 붙여서 만든 과잉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 관람객들은 직접 스티커를 붙임으로써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관람객(타인)의 참여는 단지 인위적인 이미지들의 조합으로부터 벗어나 관람객이 단지 작가 혹은 작품으로부터 메시지를 전달받는 것 아닌 과잉된 이미지들을 직접 체험하게끔 유도한다.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자들의 섬'에는 두 점의 회화 작품과 돌무덤이 전시되어 있다. 「오렌지빛 과부」는 작가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그리스인 조르바 』에서 마녀사냥의 희생양으로써 몰매를 맞아 죽은 크레타섬의 젊은 과부를 애도하며 그린 것으로 그 앞에는 젊은 과부를 위로하는 듯한 군산의 월명산에서 주워온 돌로 만든 돌무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켠에 있는 「세상과 나」라는 작가가 편안함을 느꼈던 불교 교리,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이 있다. 다른 섬들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타인과의 관계맺기가 아닌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이 공간은 내면으로 향하는 이야기들로 인하여 오히려 침묵하는 장소가 된다. ● 작가의 첫 개인전이기도 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섬'이라는 은유를 통하여 타인과의 이분법적인 대립이 아닌, 타인과 자신 사이의 이격의 관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은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의도했던 것과 실제로 실현했던 것의 차이를 작품 안에 담겨져있는 개인의 예술 계수(Art Coefficient)'라는 개념을 통해 이야기한 바 있다. 즉,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의도하는 것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표현하는 것이 늘 양립하며 이렇게 벌어진 틈 사이에 관람자가 들어와 자신이 본 것을 말할 때 비로소 예술가의 창조적인 행위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관람객은 『네 개의 섬』과 자신과의 거리가 얼만큼인지에 따라 그 곳이 격리되는 섬인지 혹은 다다를 수 있는 섬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초롱 작가의 전시는 우리로 하여금 섬들을 자유롭게 유영하게 하며, 네 개의 섬 위의 각각의 작품들은 우리가 섬을 건너왔을 때 두고왔던 것들을 다시금 환기시킬 것이다. ■ 박정연
예술에 부여되는 특권의식이나 권위의식은 갤러리 벽을 더 하얗게 만들고, 밝은 조명에 작품이 그럴 듯 해 보이게끔 만든다. (최초의 시도가 작품에 대한 방해를 줄이고 몰입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관람객들은 작품을 손대서는 안 되는 것, 다가가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인식하며, 더욱이 믿을만한 어떤 권위처럼 여기기도 한다. 과거에는 신앙을 위해 미술이 존재했지만, 미술 자체가 신앙이 되었다. 단순한 말에 어려운 수식어를 덧붙이고 동어반복을 늘어 놓아 도무지 무슨 말인지 해석이 불가능한 글을 쓰는 것도 그러한 맥락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갤러리 벽과 조명이라는 특수한 위치를 벗어나 보려고 노력해보았다. 관람객들은 벽을 등지고, 회화는 설치 속 오브제처럼 기능한다. 어딘가 떠있거나 바닥에 기대어 있거나. 물론, 이 시도가 시행착오로 끝날지라도, 가능한 한 바람직하게 걸려있는 작업을 피하고 싶었다. ■ 정초롱
Vol.20151122c | 정초롱展 / JEONGCHORONG / painting